오은선 “봄이 오면 안나푸르나 정복”

입력 2009.11.1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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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결정은 단호..그러나 기다리며 후회도 했다"

대학로 행인들 사이로 걸어오는 오은선(43.블랙야크)의 모습이 저만치 보였다. 등산복을 입은 모습만이 눈에 익었던 터라, 평상복에다 백팩까지 등에 멘 모습이 낯설었다.
"귀여우시다"라는 인사에 오은선은 쑥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구두를 신으니 좀 어색하긴 하네요"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안나푸르나(8천91m) 등정 일보 직전에서 악천후에 발길을 돌렸던 오은선은 9일 대학로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 라이브 인터뷰릍 통해 만났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에서 푹 쉬었다는 그는 `저소증'에 얽힌 에피소드로 말문을 열었다.
오은선은 카트만두 국제공항 화장실에서 휴대전화와 비상금 1만 달러가 든 지갑 등이 담긴 조그만 손가방을 놓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를 까맣게 몰랐던 그는 기내에서 물품 대금을 결제하려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챘다고 했다.
발을 동동 구르는 그를 본 승무원이 자초지종을 듣고 기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기장은 즉시 공항에 연락을 취해 손가방을 즉시 회수했다. 다행히 그는 며칠 뒤 가방을 돌려받았다.
오은선은 "산소가 희박한 8천m 올라갔다 오면 이렇게 자주 깜빡하는 `저소증'에 시달린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또 한번 웃었다.
인터뷰 장소인 카페 4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없냐고 묻는 그에게 `8천m를 오르내리는 분이 고작 4층 가는데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느냐'라고 농을 던지자, "8천m 올라갔다 오면 계단 하나도 걸어서 올라가기 싫어요"라는 농이 되돌아왔다.
`철녀'(鐵女), `독한 여자'라는 별명을 가진 오씨지만 8천m 등정은 그만큼 피를 말리는 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나푸르나 정상 직전에서 발길을 돌렸을 당시 심정을 묻자 오씨는 "그 때는 많이 속상했다"라면서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잘 됐다'라고 생각한다. 너무 앞만 보고 질주해 숨고르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라고 `모범생형' 답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기자가 `그래도 그 고비만 넘기면 됐었는데..'라며 재차 묻자 그는 "결정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라면서도 "베이스캠프로 와서 (재도전할 때를) 기다리는데 날씨가 호전되지 않았다. 그 당시 `좀 더 갈걸...조금만 더 갔으면 이미 끝났잖아'라는 생각이 들더라"라며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2차 등정 당시 등정을 포기하려다 딱 하루만 더 기다려보기로 한순간을 회상하다가 "또 눈이 오는 거예요"라고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눈가는 촉촉해졌다.
이번 등반에 대한 강한 의욕과 무산으로 인한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씩씩했다. "돌아설 때는 미련을 갖지 않고 과감하게 돌아선다"라고 말한 그는 14좌 완등 시점을 묻자 "안나푸르나가 저를 받아줘야 하겠지만, 받아만 준다면 내년 5월초까지는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오은선은 `자신있느냐'는 우문(愚問)에 "산에 갈 때 자신감은 항상 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꼭 정상에 설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맘껏 등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면서 "정상에 서느냐의 여부는 차후 문제"라는 `현답'(賢答)을 내놓았다.
오은선은 재등정 도전을 시작하는 내년 2월 초까지 등반 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다음은 오은선과 일문일답.
--첫 등정 시도 당시 정상을 200여m 가량 남겨 두고 발길을 돌렸을 때 심정은.
▲그때는 많이 속상했지만 지금은 차라리 잘됐다 생각한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서 숨고르기가 필요했다.
--당시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나.
▲당연하다. 두 어시간 더 걸으면 됐다. 그런데 습기를 많이 머금은 습설이 계속 내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몰랐다. 4~5시간 뒤 어떻게 될 지 몰랐다. 날씨가 나빠질 때는 하산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베이스캠프에 내려온 다음 후회는 없었나.
▲결정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무사 귀환이 기쁘기만 했다. 그런데 이후 폭설이 오고 계속 제트기류가 머무르자, `그때 좀 더 갈걸. 좀만 더 가면 이미 끝났잖아'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두번째 등반 당시 포기하려다 하루 더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만큼 간절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그렇다. 대장 세르파가 아프다고 해서 내려보냈다. 등반하면서 가장 의지하는 친구여서 등반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내가 왜 혼자 못하느냐'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 결정을 미뤘다.
그렇게 해서 하루를 기다리는데 또 눈이 엄청나게 왔다. 캠프 1에 있던 내 헬멧이 눈 무게에 찌그러졌다. (오은선의 목이 잠기고 눈가는 촉촉해졌다) `이번에는 진짜 안되나 보다'라고 생각해서 내려갔다.
--등정 포기 직후 `최고 등반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평소 생각인가.
▲누구보다 죽음과 가장 가깝게 맞닥뜨린 상황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냐. 어영부영 하다가는 그대로 간다. 이번 경험으로 그런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돌아서야 할 때는 미련을 갖지 않고 과감하게 돌아선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등정 포기 직후 위로 전문을 보냈다던데.
▲아차, 전화 드린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이것 역시 바로 `저소증' 때문이다.(웃음) 내용도 잊어버렸다. 그렇지만 그 전문을 받는 순간 감격했었다.
--14좌 완등을 끝낼 시점은 언제가 될까.
▲5월초 이전에 국민께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면 좋겠다. 그러나 이건 제 소망이고, 늘 얘기하지만 산이 허락해야 가능하다. 안나푸르나가 저를 받아주기만을 바란다.
--이번 등반에서는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분명히 기상예보로는 3~4일까지 날씨가 좋다고 그랬다. 이건 과학적 데이터다. 그런데 3일부터 날씨가 급변하면서 폭설이 내리치는데, 이건 완전히 탈출이나 다름없었다. 다행스러울 뿐이다.
--내년 봄 오은선, 스페인의 파사반, 오스트리아의 칼텐브루너 이 3명이 또다시 14좌 완등을 놓고 뜨거운 경쟁을 벌이게 됐다. 어떻게 전망하나.
▲경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멋있는 산악인이다. 그들을 롤 모델로 잡고 지금까지 죽 무산소 등정을 해오고 있다. 다만 그들은 그들 스타일 대로 등반하고 나는 내 스타일대로 한다.
신이 그들을 허락한다면 어쩔 수 없고 제가 두 번째라도 완등해야 하지 않겠나. 너무 민감하거나 예민하지는 않다.
--지난 7월 유명을 달리한 고미영씨 유품은 안나푸르나에 묻었나.
▲첫 등반 당시 내려오면서 캠프 3 텐트 안에 모셔뒀다. 히말라야봉 9개를 함께 오른 피켈은 텐트 바깥에 두고 왔다. 정말 또 한번 (등정)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안나푸르나가 기회를 주지 않더라.
--내년 봄 출국 전까지 3개월 이상 남았는데 어떻게 준비할건가.
▲등반 이후에는 보름에서 한달 간 아무것도 안하고 쉬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이달 말이나 내달 초 잠깐 쉴 생각이지만, 이후 몸도 만들고 후원업체도 물색하는 등 등반 준비를 하려고 한다.
--내년 봄 도전이 자신있느냐는 `우문'을 던진다면.
▲산에 갈 때 늘 자신은 있다. 그런데 그 자신이라는 건 `꼭 정상에 설 수 있다' 이런 것이 아니라 산에서 맘껏 등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상에 서는 것은 차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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