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원 “실패 거울, 나 먼저 변화”

입력 2009.11.11 (11:29)

수정 2009.11.1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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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남자부 LIG 손해보험 박기원(58) 감독은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현대캐피탈을 꺾은 다음 날인 11일 아침 TV로 LIG손보와 삼성화재 재방송 경기를 보고 있었다.
팀 창단 후 최다 연승 타이기록인 4연승을 거두면서 즐길 법도 하지만 "한 경기 한 경기 온 힘을 다하겠다"면서 세심하게 다른 팀들의 전력을 분석했다.
LIG손보는 2006-2007 리그부터 3시즌 내리 4위에 그쳤다. 외국인 용병이 없었던 KEPCO45와 아마추어 초청 팀인 신협 상무를 빼면 사실상 꼴찌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2009-2010 V리그에서 프로배구 양강인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을 잇달아 격파하면서 4전 전승을 달리며 돌풍을 몰고 왔다.
돌풍의 중심에는 2007년 부임해 올해로 3년째인 박 감독이 있다.
숙소인 경북 구미시 금오산호텔에서 박 감독은 "어젯밤 경기가 끝나고 나서 친구들이 뉴스를 보고 전화를 많이 해 왔다"며 기뻐했다.
박 감독은 그동안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부터 바꾸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내가 한국말은 하고 있지만 30년간 외국에서 생활해 한국 문화와 우리 팀 문화를 너무 몰랐었다"며 "이후 선수들의 사고방식이나 스타일 등을 알려고 무진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국가대표 센터로 이름을 날렸던 박 감독은 197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세계배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이 남자 배구 사상 최고 성적인 4위에 오를 때 주역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이탈리아 프로배구에 진출했다.
박 감독은 당시 이탈리아 리그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 1호였다. 박 감독은 2년 동안 선수로 뛴 뒤 한국인으로는 또 처음으로 이탈리아 배구팀 감독을 맡으면서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이탈리아 배구에 몸담았다.
이어 2002년부터는 배구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이란의 대표팀 지휘봉을 잡아 그 해 2002 부산아시안게임 은메달을 따냈고 2003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일본을 꺾고 3위를 차지하는 등 좋은 성적을 냈다.
최하위권을 맴돌던 LIG손보는 박 감독의 지도력을 높이 사 2007년 사령탑으로 모셔왔다.
약 30년 동안 외국 생활을 접고 2007년 귀국한 박 감독은 의욕에 넘쳐 세계 최강인 이탈리아 자율배구를 선수들에게 주입하려 했다.
선수들은 박 감독이 지시할 때마다 '예'라는 답변을 했지만 그것이 한국에서 윗사람에게 말하는 형식적인 답변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박 감독을 털어놓았다.
감독과 선수들 간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박 감독은 이후 훈련 중이나 경기 중에도 선수들을 격려하고 한 마디라도 말을 더 나누려고 하면서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그 사이 선수들과 신뢰가 차츰 쌓여갔다.
이와 함께 더는 선수 자율에만 맡겨두지 않고 올 시즌을 앞두고 훈련량도 크게 늘렸다.
"지난 시즌까지는 선수들이 고비를 못 넘기고 주저앉았다. 한계선이 뚜렷했고 그걸 언제나 넘기지 못했다"며 "하지만 올 시즌을 대비해서는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훈련을 많이 한 것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LIG손보는 5월부터 시즌 개막 직전인 10월까지 6개월 동안 새벽부터 야간까지 하루에 4번 훈련을 했다. 예전에 없었던 새벽과 야간 훈련을 새로 하고 오후에도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늘려 3시간씩 훈련을 했다.
또 7월에는 선수들이 1주일 실미도에서 해병대 훈련을 받으면서 만년 하위팀의 패배 의식을 떨쳐 버렸다.
박 감독은 "처음에는 늘어난 훈련량에 선수들의 불만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 한계를 넘다 보니 자율적으로 연습을 찾아 하게 됐는데 이것이 연승의 기초가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박 감독이 원했던 자율 배구가 자연스럽게 정착해 선수들이 훈련을 찾아 하는 단계에 올라선 것이다.
선수들은 지난 1일 라이벌인 대한항공을 꺾고는 그 즐거움도 뒤로 한 채 경기가 끝난 뒤 배구장에서 자율적으로 훈련을 찾아 하는 등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박 감독은 선수들의 세대교체가 끝나면서 전력이 안정된 것도 상승세의 원인으로 꼽았다.
2007년 부임과 동시에 박 감독은 팀 전력을 강화하고자 세대교체에 착수했다.
'원조 거미손'이었던 센터 방신봉을 비롯해 손석범, 이동엽 등 고참 선수들을 내보내고 신인인 김요한, 황동일, 하성래, 한기호 등 신인 선수들을 팀 주축으로 키워 프로구단 중 가장 젊은 구단으로 변모시켰다.
박 감독이 온 뒤 남아 있는 기존 선수는 이경수와 하현용에 불과할 정도다.
세대교체의 진통을 겪으면서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성적은 만년 4위에 머물렀다.
박 감독은 "처음부터 단기간에 성적을 내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지만 팀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이를 위해 위험부담을 안고 세대교체를 했고 이젠 전력이 안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한순간에 해임되는 프로스포츠 감독에게 성적을 내는 데 시간이 필요한 세대교체는 모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난 시즌 LIG손보의 성적이 4위에 그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자 배구계에서는 박 감독이 3년 임기를 다 못 채우고 해임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마저 나왔다.
박 감독은 "계약 기간이 많은 사람이 아는 것처럼 3년이 아니라 2년이었고 이미 지난 시즌으로 끝났었다"며 회사에서 1년 더 기회를 주면서 올 시즌 재계약한 것이라고 말했다.
LIG손보도 이 같은 박 감독의 노력을 평가해 지난 두 시즌 성적이 나오지 않았지만 해임 대신 박 감독과 재계약을 선택했고 올 시즌 4연승을 이어가고 있다.
올 시즌 목표를 묻자 박 감독은 "지난 2년 동안 우승이 목표라고 언제나 말했는데 공수표였다"며 "목표가 우승이 아닌 감독이 있겠느냐마는 올해는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심정으로 매 경기를 꼭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화려한 선수생활을 하고 외국 감독도 거친 박 감독은 "마지막 배구 인생을 LIG손보 우승에 걸었다"며 "우승이라는 모자이크 한 조각을 꼭 채워넣고 싶다"고 말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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