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출한 박준범’ 구단 욕심에 상처만

입력 2009.11.14 (07:58)

수정 2009.11.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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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9월30일 대한배구협회 회의실.

거포 이경수(30.LIG손해보험)의 진로를 정하기 위해 드래프트가 시행됐던 날이다. 구슬 추첨기를 돌려 지명권을 받은 대한항공은 이경수를 찍은 다음 LG화재(LIG손보 전신)에 양도하고 대신 신인선수 1차 지명권을 받았다.
2001년 한양대 4학년이던 이경수가 LG화재와 계약한뒤 배구협회의 드래프트를 거부하면서 촉발된 '이경수 파동'이 무려 1년8개월을 끌며 법정공방까지 불사한 끝에 간신히 매듭을 짓던 날이었다.
6년이 넘게 흘러 13일 중구 남대문로 밀레니엄힐튼호텔 그랜드볼룸.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대학배구 최고 거포 박준범(21.한양대 3학년)은 마침내 프로배구 무대에 진출한다는 부푼 꿈을 안고 초조하게 드래프트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행사장에서는 '긴급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니 드래프트 개시를 두 시간 지연한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프로배구 구단 단장들은 박준범이 나온다면 드래프트 자체를 무산시키겠다고 강수를 뒀다. 이어 대학배구연맹에 3학년생들의 드래프트 신청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4학년 졸업반) 15명 이상을 뽑아주고 내년부터는 제도 개선을 통해 시즌 개막 이전에 드래프트를 완료할 테니 올해는 제발 박준범을 빼고 가자'는 게 구단들의 주장이었고, 선수를 프로구단에 '취업'시켜야 하는 대학연맹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준범은 드래프트 신청을 철회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닮은꼴 거포'인 이경수와 박준범은 대전중앙고, 한양대 9년 차이 선후배.
6년 전 이경수는 코트의 미아가 될 뻔했다가 실업팀 유니폼을 입은 반면 박준범은 프로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1년 더 대학 코트에 서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렇다면 왜 박준범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 걸까.
논의의 출발은 신생팀 우리캐피탈이 창단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화재 이후 13년 만에 창단된 신생팀을 위해 리그에 안착할 기반을 만들어주자는 의미에서 두 시즌에 걸쳐 신인선수 우선 지명권 4장씩을 부여했다.
박준범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없었다면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았을 법한 합의였다.
하지만 박준범이 '규정'에 따라 대학의 동의를 얻어 드래프트에 나오기로 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다른 구단들은 우리캐피탈이 시장에 나온 박준범을 데려간다면 사실상 내년 드래프트까지 미리 '쓸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반발했다. 결국 KOVO 총재가 대표로 있는 회사가 대주주인지라 '판'을 깰 수 없는 우리캐피탈을 압박했고 백기를 받아낸 셈이다.
사실 박준범을 놓고는 평가가 분분하다.
강만수, 하종화, 임도헌, 신진식, 이경수 등으로 이어져온 한국 배구 레프트 계보를 이어받을 거포 중 한 명임에는 틀림없지만 현재 국가대표 왼쪽 공격수를 맡고 있는 문성민(터키 할크방크), 김요한(LIG손보)과 비교할 때는 견해가 엇갈린다.
문성민, 김요한이 서브 리시브가 불안한 반면 박준범은 수비력까지 갖췄다는 장점을 지녔다. 하지만 아직 대학배구 MVP 외에는 이렇다 할 수상 경력이 없고 국제무대와 프로에서 검증을 받은 것은 더더욱 아니라면서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눈길을 끈 장면이라면 2007년 11월 대표팀이 일본에서 세계랭킹 1위 브라질에 0-3으로 완패했을 당시 신영수, 김학민(이상 대한항공) 등 쟁쟁한 선배를 제치고 팀 내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렸던 경기 정도이다.
그러나 레프트 공격수로는 최장신급(198㎝)인 신장으로 타점 높은 공격을 구사하는데다 탄력과 유연성만 좀 더 기르면 해외에 진출해 있는 문성민도 능가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프로에서 뛰고 싶은 마음만큼은 간절했다는 박준범은 이번 드래프트 논란으로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당장 (프로 무대에) 가서 빨리 적응하고 싶다. 뽑아주는 팀에서 뛰고 싶다"고 말하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 속절없이 1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대학배구연맹 전무를 맡고 있는 박용규 한양대 감독은 "준범이의 상처를 어떻게 어루만져 줘야 할지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대학 코트에서 1년간 더 발전시켜 나가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
내년 이맘때 드래프트에서 박준범이 다시 한 번 배구판 전체를 뒤흔들 '최대어'로 당당히 시장에 나올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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