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50주년, ‘미완’에서 이룬 ‘민주화 결실’

입력 2010.04.19 (22:14)

<앵커 멘트>

민주주의 원형질이었던 4.19 혁명이 대한민국을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키워나간 원동력이 됐음을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고 있죠.

김도엽 기자가 당시 참가자들을 만나 소회를 들어봤습니다.

<리포트>

그날로부터 꼭 50년…. 마침내, 그의 영정 앞에 꽃이 바쳐집니다.

3.15 부정 선거 규탄 집회에 나섰다 싸늘한 주검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고 김주열 열사, 50년 만에 장례식이 거행됐습니다.

<녹취>김영자(김주열 열사 큰누나) : "그런 세월이 지금 50년이 지났다."

그가 도화선이 된 4.19 혁명.

광장에는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수천 수만의 김주열이 모여들었습니다.

<인터뷰>김칠봉(동국대 당시 시위 참가자) : "경무대로 가자, 가서 이 박사를 만나자 그랬죠."

183명의 생명과 부상자 수천 명의 피로 얻어낸 승리.

<녹취> 이승만 하야 성명(1960년 4월 26일) :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의 염원은 다시 짓밟혔고 그래서 4.19는 한동안 '미완의 혁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혁명 이후 광부로, 회사원으로, 정치인으로 7,80년대 우리 사회를 짊어진 것은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6.3 항쟁, 5.18 민주화 운동, 87년 6월 항쟁 때 그들은 광장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인터뷰>호영송(4.19 혁명/6월 항쟁 참가자) : "4.19 때 고등학생으로 만났는데, 그때는 넥타이 부대로 만난거지."

87년 얻어낸 직선제와 민주화의 기틀도 4.19 정신의 승리였습니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을 별개로 구분하려는 시각도 있지만 그 동력은 분명 하나였습니다.

<인터뷰>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 "자유와 창의정신을 고양시킨 것이 바로 민주화고 그 민주화가 결국 산업화에도 산업화를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해마다 봄이 오면 사람들은 광장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촛불이든 혹은 월드컵이든, 그 역동적 에너지가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원동력임을 50년 전 오늘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도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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