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청사 복원…100주년 기념행사 다채

입력 2019.04.11 (21:40) 수정 2019.04.1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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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이곳에서 불과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있습니다.

홍커우 의거 이후 일제 탄압은 혹독해졌고, 결국 임시정부는 6년 동안 머무른 상하이 임정청사를 떠나 피난길에 오릅니다.

단장인 김구 선생에겐 현상금 60만 원, 현재가치로 200억 원에 달하는, 역대 최대 현상금이 걸렸습니다.

일본의 추적은 그만큼 집요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중국 내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국권회복이라는 일념 하나로 버팁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나서야 충칭에 정착했고, 임시정부는 이곳에 마지막 청사를 세우고, 우리 국군의 뿌리인 광복군을 창설합니다.

충칭을 연결해 임시정부의 여정과 광복군의 흔적 짚어봅니다.

안양봉 특파원, 지난 달 충칭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복원됐다고요. 일반인에게 내부가 공개됐나요?

[기자]

네, 충칭시 정부는 공사가 끝나는대로 곧 일반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이 사진이, 광복군을 만든 날 김구 주석과 지청천 사령관이 함께 찍은 사진인데요.

이곳에 오시면 이런 사진과 각종 사료들을 통해서 우리 광복군이, 일제에 맞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30여 개 식민지 국가 중 군대를 보유한 나라는 우리가 유일했는데요, 정부와 의회, 또 군대까지 갖추면서 사실상 국가 체계를 완성한 겁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요, 좀 전엔 기념식이 펼쳐졌고요, 어제는 광복군 청사 복원 기념 문화제도 열렸습니다.

임정은 1919년 상하이에서 출범해 장장 27년 동안 중국 대륙을 옮겨 다니며 독립투쟁을 이어갔는데요.

상하이에서 이곳 충칭까지 망명정부 27년, 그 고난의 길을 돌아봤습니다.

[리포트]

우리 민족 최초의 민주공화 정부.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는 이승만 박사, 문지기를 자처했던 김구 선생은 경무국장을 맡습니다.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립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 :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 했다. 그 태연자약함이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이후 임정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거점을 저장성 항저우로 옮깁니다.

이곳에서 군사 인재를 양성해 무장투쟁 기반을 조성합니다.

[최춘봉/중국 항저우사범대 교수 : "(군사 인재들이)광복군 기간원이 됩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정 요인 체포에 혈안이 된 일제, 부득이 김구 선생은 항저우 밖 지아싱에 은신합니다.

김구 선생은 이때 항일투쟁의 큰 그림을 완성 합니다.

[수메이좬/지아싱 김구 선생 피난처 안내인 : "여기에서 많은 강령 서류를 작성합니다. 한국 임시정부의 앞으로 방향을 정리했습니다"]

김구 선생 독립운동 활동에 가장 큰 위기였던 1938년.

동포가 쏜 흉탄을 맞은 김구 선생은 이 병원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집니다.

이후 창사, 광저우, 다시 류저우로 긴 망명 투쟁을 이어간 임시 정부는 마침내 충칭에서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한국광복군이 출범하고. 지청천 장군이 총사령관을 맡습니다.

1942년 김원봉 선생의 조선의용대가 결합하고, 탈영한 일제 학도병도 몰려들면서 45년엔 병력이 천 여명으로 불어납니다.

최근 발굴된 친필편지에서 김원봉 선생은 "광복군이 중국은 물론 국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순커즈/상하이 푸단대 교수 : "광복군은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망명정부로 만들었고, 제국주의 투쟁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서울 진격.

한국광복군은 미군 OSS의 도움을 받아 이 암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중국군 400명 보다 우리 광복군 7명이 더 낫다는 미군 지휘관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작전 회의를 마친 김구 주석과 도노반 소장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집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 : '아! 왜적이 항복,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다 허사다."]

그후 임정 요인들은 뿔뿔이 귀국했고, 무장 해제 상태로 입국한 광복군도 1946년 6월 해산됐습니다.

KBS 뉴스 안양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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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군 청사 복원…100주년 기념행사 다채
    • 입력 2019-04-11 21:46:17
    • 수정2019-04-11 2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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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이곳에서 불과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있습니다.

홍커우 의거 이후 일제 탄압은 혹독해졌고, 결국 임시정부는 6년 동안 머무른 상하이 임정청사를 떠나 피난길에 오릅니다.

단장인 김구 선생에겐 현상금 60만 원, 현재가치로 200억 원에 달하는, 역대 최대 현상금이 걸렸습니다.

일본의 추적은 그만큼 집요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중국 내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국권회복이라는 일념 하나로 버팁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나서야 충칭에 정착했고, 임시정부는 이곳에 마지막 청사를 세우고, 우리 국군의 뿌리인 광복군을 창설합니다.

충칭을 연결해 임시정부의 여정과 광복군의 흔적 짚어봅니다.

안양봉 특파원, 지난 달 충칭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복원됐다고요. 일반인에게 내부가 공개됐나요?

[기자]

네, 충칭시 정부는 공사가 끝나는대로 곧 일반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이 사진이, 광복군을 만든 날 김구 주석과 지청천 사령관이 함께 찍은 사진인데요.

이곳에 오시면 이런 사진과 각종 사료들을 통해서 우리 광복군이, 일제에 맞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30여 개 식민지 국가 중 군대를 보유한 나라는 우리가 유일했는데요, 정부와 의회, 또 군대까지 갖추면서 사실상 국가 체계를 완성한 겁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요, 좀 전엔 기념식이 펼쳐졌고요, 어제는 광복군 청사 복원 기념 문화제도 열렸습니다.

임정은 1919년 상하이에서 출범해 장장 27년 동안 중국 대륙을 옮겨 다니며 독립투쟁을 이어갔는데요.

상하이에서 이곳 충칭까지 망명정부 27년, 그 고난의 길을 돌아봤습니다.

[리포트]

우리 민족 최초의 민주공화 정부.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는 이승만 박사, 문지기를 자처했던 김구 선생은 경무국장을 맡습니다.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립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 :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 했다. 그 태연자약함이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이후 임정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거점을 저장성 항저우로 옮깁니다.

이곳에서 군사 인재를 양성해 무장투쟁 기반을 조성합니다.

[최춘봉/중국 항저우사범대 교수 : "(군사 인재들이)광복군 기간원이 됩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정 요인 체포에 혈안이 된 일제, 부득이 김구 선생은 항저우 밖 지아싱에 은신합니다.

김구 선생은 이때 항일투쟁의 큰 그림을 완성 합니다.

[수메이좬/지아싱 김구 선생 피난처 안내인 : "여기에서 많은 강령 서류를 작성합니다. 한국 임시정부의 앞으로 방향을 정리했습니다"]

김구 선생 독립운동 활동에 가장 큰 위기였던 1938년.

동포가 쏜 흉탄을 맞은 김구 선생은 이 병원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집니다.

이후 창사, 광저우, 다시 류저우로 긴 망명 투쟁을 이어간 임시 정부는 마침내 충칭에서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한국광복군이 출범하고. 지청천 장군이 총사령관을 맡습니다.

1942년 김원봉 선생의 조선의용대가 결합하고, 탈영한 일제 학도병도 몰려들면서 45년엔 병력이 천 여명으로 불어납니다.

최근 발굴된 친필편지에서 김원봉 선생은 "광복군이 중국은 물론 국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순커즈/상하이 푸단대 교수 : "광복군은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망명정부로 만들었고, 제국주의 투쟁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서울 진격.

한국광복군은 미군 OSS의 도움을 받아 이 암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중국군 400명 보다 우리 광복군 7명이 더 낫다는 미군 지휘관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작전 회의를 마친 김구 주석과 도노반 소장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집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 : '아! 왜적이 항복,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다 허사다."]

그후 임정 요인들은 뿔뿔이 귀국했고, 무장 해제 상태로 입국한 광복군도 1946년 6월 해산됐습니다.

KBS 뉴스 안양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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