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新풍속도] (13) ‘눈물의 비디오’와 4차 산업혁명

입력 2016.04.22 (09:05) 수정 2016.06.1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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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준비하며', IMF 한파가 몰아치던 19년 전 이맘때,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제일은행 홍보실에서 만든 영상물의 제목이다. 25분짜리 이 비디오에는 지점 통폐합과 인력 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젊은 은행원들의 심정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순식간에 사라진 48개의 점포, 직장을 떠나는 2천여 명의 동료, 선배들…. 영상물은 당시 테헤란로 지점 이 모 차장의 하루와 떠나는 직원, 남은 직원의 당부와 각오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고 있다.

특히 직장을 떠나는 아픔 속에서도 은행의 재기를 절절하게 당부한 한 여행원의 눈물은 당시 감원 한파에 시달렸던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가슴을 적셨고, 영상물은 '눈물의 비디오'라는 이름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KBS 9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조·상·제·한·서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해온 5대 시중은행을 언론은 이렇게 불렀다. 조흥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어쩌면 낯설게 들릴지 모를 이름들이지만 그 시절 서민들은 이들 은행의 통장을 몇 개씩은 갖고 있었고, 지점 창구의 직원들은 친구이자, 자식이자, 인생 상담사였다.

얼마 전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성덕선의 아버지 성동일이 다니던 은행도 이 가운데 하나인 한일은행이다.

수십 년 대한민국 금융을 좌지우지하던 '조·상·제·한·서'는 IMF 위기를 거치면서 다른 은행과 합병하거나 신생 은행에 흡수되면서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른바 금융빅뱅기를 맞은 것이다.

조흥은행은 신한은행에 흡수됐고,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한빛은행으로 통합했다 다시 우리은행으로 변신했다. 제일은행은 글로벌 금융그룹인 스탠다드차타드(SC) 그룹으로 넘어가면서 SC은행으로, 서울은행은 KEB 하나은행에 합병됐다.

이 가운데 제일은행의 이름은 되살아났다. SC은행이 전 세계적으로 통합된 이름을 고집하는 본사를 설득해 SC제일은행으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과거의 고객을 되찾고 소비자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겠다는 전략이다. 소매금융을 기반으로 하는 국내 금융산업에서 '이름'은 은행의 신뢰도와 친밀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는다.

되살아난 '눈물의 비디오'

문제는 되살아난 게 은행 이름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제일은행을 상징했던 '눈물의 비디오'라는 아픈 상처가 금융권에 번지고 있는 것이다. 인력 감축, 구조조정 바람이다.

지방은행을 비롯한 전국 12개 시중은행의 직원 수는 지난해 8만 7,171명으로 2014년보다 2,169명이나 줄었다. 이들 가운데 KB 국민, KEB 하나, SC은행 등 3개 시중은행에서만 2,600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올해도 연초부터 희망퇴직 신청이 시작된 가운데 많은 은행원이 줄지어 직장을 떠나고 있다.

형식은 대부분 '희망퇴직'이다. 은행의 구조조정을 위해 퇴직을 희망하는 사람들만 신청을 받아 퇴직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IMF 위기 때나 지금이나 무늬만 '희망'일 뿐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은행원들이 대부분이다.

회사의 일방통보를 받고, 남을 경우 받게 될 불이익과 부당한 대우를 우려해 퇴직을 신청하는 것이다. '눈물의 비디오'는 그렇게 떠나간 한 은행원의 심경을 시로 담고 있다.



한때 최고 직업 중 하나였던 은행원들의 이런 아픔은 앞으로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른바 '은행원 없는 은행'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은행 거래에서 대면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11.2%(2분기 말 기준)에 그쳤다. 90% 가까운 은행 거래가 온라인 중심의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인터넷과 모바일 뱅킹이 확대된 데 이어 IT와 금융을 결합한 이른바 '핀테크(Fin tech)혁명'이 빨라지면서 금융의 패러다임과 은행의 미래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

물론 은행들도 새로운 물결에 맞서 힘겨운 생존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지난 1월 열린 다보스 포럼의 전망도 이를 뒷받침한다.

ICT 융합을 기반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으로 앞으로 5년 동안 7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며 이 가운데 475만 개의 은행직을 포함하는 사무직이 사라진다는 예측이다. 씨티은행도 앞으로 10년 안에 은행원 200만 명이 사라진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다보스포럼의 창시자이자 회장인 클라우스 슈왑이 지난 1월 46차 연례회의에서 자신의 저서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다보스포럼의 창시자이자 회장인 클라우스 슈왑이 지난 1월 46차 연례회의에서 자신의 저서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 인공지능 기술이 상징하는 4차 산업혁명은 금융권에는 스마트금융으로, 제조업에는 스마트카와 스마트홈, 스마트TV로, 우리 일상생활에는 스마트부동산과 스마트바이오 등으로 서서히 침투해오고 있다.

그 거대한 흐름, 변화의 물결은 기존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가며 우리의 삶과 미래를 흔들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블루 오션으로, 누군가에게는 쓰라린 아픔과 눈물로...


김종명 에디터의 [사무실 新풍속도] 시리즈
☞ ① “점심은 얼간이들이나 먹는거야”
☞ ② 변기보다 400배 지저분한 ‘세균 폭탄’…그곳에서 음식을?
☞ ③ 당신의 점심시간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 ④ ‘유령 회사’의 시대…일자리는 어디로?
☞ ⑤ 아인슈타인과 처칠, 구글과 나이키의 공통점?
☞ ⑥ 당당히 즐기는 낮잠…NASA의 ‘26분’ 법칙
☞ ⑦ 직장인이 듣고 싶은 '하얀 거짓말'
☞ ⑧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과는 무엇입니까?
☞ ⑨ 남자는 키 여자는 체중?…직장인과 나폴레옹 콤플렉스
☞ ⑩ 직장 내 ‘폭탄’들의 승승장구 비결…왜?
☞ ⑪ 2016 한국인 행복곡선은 L자형?
☞ ⑫ 미래 기업에 ‘사무실은 놀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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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무실 新풍속도] (13) ‘눈물의 비디오’와 4차 산업혁명
    • 입력 2016-04-22 09:05:50
    • 수정2016-06-17 11:32:13
    사무실 新 풍속도 시즌1
'내일을 준비하며', IMF 한파가 몰아치던 19년 전 이맘때,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제일은행 홍보실에서 만든 영상물의 제목이다. 25분짜리 이 비디오에는 지점 통폐합과 인력 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젊은 은행원들의 심정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순식간에 사라진 48개의 점포, 직장을 떠나는 2천여 명의 동료, 선배들…. 영상물은 당시 테헤란로 지점 이 모 차장의 하루와 떠나는 직원, 남은 직원의 당부와 각오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고 있다. 특히 직장을 떠나는 아픔 속에서도 은행의 재기를 절절하게 당부한 한 여행원의 눈물은 당시 감원 한파에 시달렸던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가슴을 적셨고, 영상물은 '눈물의 비디오'라는 이름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KBS 9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조·상·제·한·서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해온 5대 시중은행을 언론은 이렇게 불렀다. 조흥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어쩌면 낯설게 들릴지 모를 이름들이지만 그 시절 서민들은 이들 은행의 통장을 몇 개씩은 갖고 있었고, 지점 창구의 직원들은 친구이자, 자식이자, 인생 상담사였다. 얼마 전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성덕선의 아버지 성동일이 다니던 은행도 이 가운데 하나인 한일은행이다. 수십 년 대한민국 금융을 좌지우지하던 '조·상·제·한·서'는 IMF 위기를 거치면서 다른 은행과 합병하거나 신생 은행에 흡수되면서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른바 금융빅뱅기를 맞은 것이다. 조흥은행은 신한은행에 흡수됐고,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한빛은행으로 통합했다 다시 우리은행으로 변신했다. 제일은행은 글로벌 금융그룹인 스탠다드차타드(SC) 그룹으로 넘어가면서 SC은행으로, 서울은행은 KEB 하나은행에 합병됐다. 이 가운데 제일은행의 이름은 되살아났다. SC은행이 전 세계적으로 통합된 이름을 고집하는 본사를 설득해 SC제일은행으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과거의 고객을 되찾고 소비자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겠다는 전략이다. 소매금융을 기반으로 하는 국내 금융산업에서 '이름'은 은행의 신뢰도와 친밀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는다. 되살아난 '눈물의 비디오' 문제는 되살아난 게 은행 이름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제일은행을 상징했던 '눈물의 비디오'라는 아픈 상처가 금융권에 번지고 있는 것이다. 인력 감축, 구조조정 바람이다. 지방은행을 비롯한 전국 12개 시중은행의 직원 수는 지난해 8만 7,171명으로 2014년보다 2,169명이나 줄었다. 이들 가운데 KB 국민, KEB 하나, SC은행 등 3개 시중은행에서만 2,600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올해도 연초부터 희망퇴직 신청이 시작된 가운데 많은 은행원이 줄지어 직장을 떠나고 있다. 형식은 대부분 '희망퇴직'이다. 은행의 구조조정을 위해 퇴직을 희망하는 사람들만 신청을 받아 퇴직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IMF 위기 때나 지금이나 무늬만 '희망'일 뿐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은행원들이 대부분이다. 회사의 일방통보를 받고, 남을 경우 받게 될 불이익과 부당한 대우를 우려해 퇴직을 신청하는 것이다. '눈물의 비디오'는 그렇게 떠나간 한 은행원의 심경을 시로 담고 있다. 한때 최고 직업 중 하나였던 은행원들의 이런 아픔은 앞으로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른바 '은행원 없는 은행'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은행 거래에서 대면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11.2%(2분기 말 기준)에 그쳤다. 90% 가까운 은행 거래가 온라인 중심의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인터넷과 모바일 뱅킹이 확대된 데 이어 IT와 금융을 결합한 이른바 '핀테크(Fin tech)혁명'이 빨라지면서 금융의 패러다임과 은행의 미래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 물론 은행들도 새로운 물결에 맞서 힘겨운 생존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지난 1월 열린 다보스 포럼의 전망도 이를 뒷받침한다. ICT 융합을 기반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으로 앞으로 5년 동안 7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며 이 가운데 475만 개의 은행직을 포함하는 사무직이 사라진다는 예측이다. 씨티은행도 앞으로 10년 안에 은행원 200만 명이 사라진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다보스포럼의 창시자이자 회장인 클라우스 슈왑이 지난 1월 46차 연례회의에서 자신의 저서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 인공지능 기술이 상징하는 4차 산업혁명은 금융권에는 스마트금융으로, 제조업에는 스마트카와 스마트홈, 스마트TV로, 우리 일상생활에는 스마트부동산과 스마트바이오 등으로 서서히 침투해오고 있다. 그 거대한 흐름, 변화의 물결은 기존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가며 우리의 삶과 미래를 흔들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블루 오션으로, 누군가에게는 쓰라린 아픔과 눈물로... 김종명 에디터의 [사무실 新풍속도] 시리즈 ☞ ① “점심은 얼간이들이나 먹는거야” ☞ ② 변기보다 400배 지저분한 ‘세균 폭탄’…그곳에서 음식을? ☞ ③ 당신의 점심시간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 ④ ‘유령 회사’의 시대…일자리는 어디로? ☞ ⑤ 아인슈타인과 처칠, 구글과 나이키의 공통점? ☞ ⑥ 당당히 즐기는 낮잠…NASA의 ‘26분’ 법칙 ☞ ⑦ 직장인이 듣고 싶은 '하얀 거짓말' ☞ ⑧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과는 무엇입니까? ☞ ⑨ 남자는 키 여자는 체중?…직장인과 나폴레옹 콤플렉스 ☞ ⑩ 직장 내 ‘폭탄’들의 승승장구 비결…왜? ☞ ⑪ 2016 한국인 행복곡선은 L자형? ☞ ⑫ 미래 기업에 ‘사무실은 놀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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