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⑥ 짜장면, 검은 면발의 치명적인 유혹

입력 2016.06.16 (14:57) 수정 2016.07.0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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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에 얽힌 추억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돼지고기와 양파, 감자, 더러는 호박과 당근 등을 콩을 발효시킨 춘장에 볶아서 갓 삶아낸 120그램 정도의 국수에 얹어 먹는 간단한 음식, 짜장면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국민음식입니다.

배고프고 추웠던 어린 시절, 짜장면은 학교에 가기 싫어서, 공부하기 싫어, 심부름하기 귀찮아서 떼를 쓰는 어린아이들을 유혹하는 환상의 음식이었습니다. 호주머니가 가벼워 외식은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가장이 모처럼 가족들을 데리고 한번 어깨 펴고 쏠 수 있는 근사한 음식이었습니다.

졸업식에도 생일에도 그리고 눈이 맞은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날에도 짜장면은 단골 메뉴였습니다. 소형 승용차 선전 문구였던가요? '작은 차, 큰 기쁨' 처럼 짜장면은 '작은 돈, 큰 만족'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도 짜장면보다 더 검은 밤이 오더라도, 담벼락에서 비를 쫄딱 맞는 연인도, 슬픔이 밀려오고, 나무 젓가락처럼 부러질 수도 있는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도 모두 짜장면을 먹으면서 힘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짜장면이 이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안도현 시인은 에세이 '짜장면'에서 우선 그 냄새에서 온다고 추측합니다.

"그 마력은 뭐니 뭐니 해도 냄새가 퍼뜨리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그 냄새에 슬쩍 감염되면 지위고 체통이고 다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 한다. 가족도 국가도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 냄새 앞에서는 백기를 들고 투항할 수밖에 없다." (안도현, '짜장면')

짜장면 앞에서는 지위나 체통 같은 개인적 가치는 물론 국가도 이데올로기도 백기 투항한다니, 짜장면의 위력은 핵폭탄보다 더 강한 것이겠습니다.

서민들의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서 그런지 짜장면은 나라가 관리하는 물가의 중대한 항목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올려도 짜장면만큼은 함부로 올리지 못하게 해서, 사실 장사를 하는 분들은 불만이기도 합니다. 짜장면 값은 얼마나 올랐을까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1970년 전후에는 평균 50원 정도였습니다. 1980년에는 350원, 1990년에는 1,300원, 2015년에는 4,500원 정도로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45년 만에 90배 정도 오른 셈입니다. 그래도 아직 5,000원짜리 한 장으로 한 끼를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짜장면은 서민들의 든든한 벗인 셈입니다.

하루에 짜장면 700만 그릇 먹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짜장면을 얼마나 먹을까요? 요식업 협회의 통계로는 하루에 무려 600만 내지 700만 그릇을 먹어치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5,150만 명 정도니까 줄잡아 한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은 짜장면을 먹는 셈입니다.

하긴 요즘은 식당에서뿐 아니라 상점에서도 거의 다 조리된 짜장면이나, 인스턴트 짜장면을 사다 집에서 끓여먹을 수 있으니 우리나라는 짜장면 왕국입니다. 지금도 밥을 먹으러 가자는 말을 짜장면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1984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평지의 농민들이 새참으로 밥대신 짜장면을 먹고 있다.1984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평지의 농민들이 새참으로 밥대신 짜장면을 먹고 있다.


그뿐입니까? 가정과 직장에서는 물론 농가에서 바쁜 일손을 놀리다 허기지면 시켜 먹는 새참 1순위도 짜장면이고, 건설 현장에서 이삿짐을 나르다, 심지어는 해수욕을 하거나 낚시를 하다가 시켜 먹는 음식도 짜장면이 으뜸입니다.

오죽하면 최남단 섬 마라도 그 좁은 곳에 짜장면 집이 10군데 넘게 생기고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광고 카피가 유행했으려고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음식 배달을 잘하는 나라인 이유가 '배달의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재치 있는 유머도 있습니다만, 배달 음식의 대명사 역시 짜장면입니다.

지금은 줄어들었지만, '철가방'이라 불리는 하얀 알루미늄 배달통을 싣고 쏜갈같이 내달리는 오토바이를 보고 있노라면, 멀쩡하던 배가 고파오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짜장면이 떠오르면서 군침이 돕니다. 마치 파블로프가 실험해서 알아냈다는 '조건반사'의 법칙처럼.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다음해에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부터 차이나타운이 형성됐다. 최초로 짜장면을 판 것으로 알려진 ‘공화춘’도 이 곳에서 시작했다.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다음해에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부터 차이나타운이 형성됐다. 최초로 짜장면을 판 것으로 알려진 ‘공화춘’도 이 곳에서 시작했다.


짜장면은 개화기인 1890년대 우리나라로 들어온 중국 산동지방의 상인들이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천을 중심으로 일하던 부두 하역노동자나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만든 것이 시초라는 것이지요. 최초로 짜장면을 만들어 판 것으로 알려진 '공화춘' 건물은 올해 등록문화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시작은 중국이었지만 현재 중국 각지에서 맛볼 수 있는 짜장면과는 재료와 요리 방식이 전혀 다르니 짜장면은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입니다. 특히 짜장면의 주 재료인 춘장은 콩을 발효시킨 것인데 까만 색깔이 독특해 짜장면은 우리가 주로 먹는 음식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마치 검은 커피가 모든 차와는 두드러지는 색깔과 맛으로 사랑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검은색은 좀 묘합니다. 우리의 입맛을 돋우는 색은 대개 빨강이나 노랑 같은 밝고 따뜻한 계열이고 실제로 많은 음식들이 이런 색깔을 띱니다. 하다못해 초록이나 파랑처럼 시원한 맛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검은색은 식욕을 돋우기 어려운 색입니다.

특히 동양사회에서 검은색은 생성보다는 소멸, 탄생보다는 죽음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역설적으로 이 검은색이 뿜어내는 마력은 중독성이 강하고 치명적입니다. 먹고 살만해진 지금도 중식당에 가서 근사한 요리를 배불리 먹어도 마무리는 짜장면을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최근 짜장면을 소재로 한국 사회를 풀어낸 책 '짜장면뎐'을 펴낸 양세욱 교수가 부친 책의 부제가 '시대를 풍미한 검은 중독의 문화사' 였습니다. 짜장면이라는 보잘 것 없는 음식이 우리의 삶에 미친 만만찮은 영향을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긴 면발은 나의 혼, 나의 분신

경복궁 옆 청운동에는 아주 작은 중국음식점이 있습니다. '청운반점' 이라고 동네 이름을 딴 듯한 음식점인데요, 60대 중반의 부부가 오순도순 꾸려가는 허름하지만 맛깔스러운 식당입니다. 종종 이 부근에서 열리는 강연이나 강의를 들으러 가는 저는 더러 짜장면 생각이 나서 들르곤 합니다. 어느 날 어지럽게 음식 메뉴가 붙은 벽 한구석에 아무런 치장도 없이 백지에 프린트한 시 한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짜장면을 먹으며 이 시를 자꾸 쳐다봤습니다. 시를 쓴답시고 온갖 그럴듯한 단어와 표현을 찾으려 낑낑대는 제 머리를 쾅 내리치는 것 같았습니다. 시가 언어를 통해 삶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고해성사라면 이 시보다 더 진솔한 시가 있을까요?

저는 짜장면을 먹으면서 벽에 붙은 시와 주인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아저씨는 요리하는 틈틈이 시를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저씨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중식당에서 접시 닦고 청소하는 일부터 시작해 주방 일을 배웠고, 40년 전쯤부터 이 작은 집을 열어 가정을 꾸리며 자식을 길러냈다 했습니다. 그러니 무수히 반죽하고 뽑아냈을 긴 면발은 아저씨의 분신이고 혼이고 또 꿈이었겠지요.

40년 동안 푸른 잎이 돋고 붉은 단풍이 물들고 청춘은 흘러 머리에는 어느덧 흰 서리가 내려앉았지만 아저씨는 면발 덕에 푸른 세월 잘 살았다고 말합니다.

삶의 용기를 얻는 묘약 짜장면

언제 먹어도 짜장면은 맛있지만 셰프 사장인 박찬일 씨는 특히 우울할 때 먹는다고 말합니다.



"뭔가 일이 안 풀리거나 고민해야 할 일이 있으면,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놓고 그걸 기다린다.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모든 감각이 오직 짜장면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로 변해 복잡한 머릿속은 정돈이 되고, 생각이라는 이름의 모호한 안개가 걷힌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한두 시가 좋겠다. 외근 나온 영업사원이나 환경미화원이나 막노동자 같은, 혼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시간에 중국집에 깃든다. 건강한 육체노동자들의 왕성한 식사 현장을 훔쳐보는 것이다. 대개 그들은 곱빼기를 시킨다. 이 말에 복 있으라. 짜장면은 양껏 젓가락으로 말아 올려, 입가에 소스를 묻히며 후루룩 소리도 요란하게 한 다발의 짜장면을 넘기는 장면..... 나는 거기서 생명의 힘을 느낀다." (박찬일,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감정노동자의 애환과 인권 문제가 연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합니다만, 외판을 해야 하는 세일즈 사원들이야말로 얼마나 고달플지요? 고객의 온갖 주문과 요구에 시달리고, 때로는 개인적 불만과 화풀이에 험악한 욕설까지 들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점심 때를 놓치기 일쑤겠지요.

그럴 때 윤기 흐르고 끈기있는 짜장면을 젓가락으로 힘차게 말아올려 입이 터져라 넣을 때의 그 힘, 또 그 힘의 생성과 소멸 현장을 바라보면서 얻게 되는 힘, 짜장면이 이토록 힘이 있을 줄이야!



이런 광경도 보신 적 있지 않나요? 이도 제대로 나지 않는 어린아이가 얼굴에 온통 검은 소스를 묻혀가며 면발을 빨아올릴 때의 경이로움, 감탄이 터져 나옵니다.

저도 우울한 날에는 짜장면을 먹으러 갑니다. 권태로운 날에도 짜장면을 먹으러 갑니다. 돈 없어 기운 없고, 기운 없어 온몸이 묵직하고, 온몸이 묵직해서 슬픈 날에는 짜장면을 먹으러 갑니다.

저도 짜장면을 먹으면서 시 한편 써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짜장면 한 그릇으로 세상의 우울을 다 담아 맛있게 비벼 드시고 다시 힘차게 식당문을 나서시길!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① 시 속의 경제, 경제 속의 시
② 한 방에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
③ 밥벌이, 그 숭고한 비루함
④ 연탄, 검은 눈물로 빚은 붉은 희망
⑤ 최악의 종이자 최상의 군주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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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⑥ 짜장면, 검은 면발의 치명적인 유혹
    • 입력 2016-06-16 14:57:53
    • 수정2016-07-01 09:48:20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짜장면에 얽힌 추억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돼지고기와 양파, 감자, 더러는 호박과 당근 등을 콩을 발효시킨 춘장에 볶아서 갓 삶아낸 120그램 정도의 국수에 얹어 먹는 간단한 음식, 짜장면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국민음식입니다. 배고프고 추웠던 어린 시절, 짜장면은 학교에 가기 싫어서, 공부하기 싫어, 심부름하기 귀찮아서 떼를 쓰는 어린아이들을 유혹하는 환상의 음식이었습니다. 호주머니가 가벼워 외식은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가장이 모처럼 가족들을 데리고 한번 어깨 펴고 쏠 수 있는 근사한 음식이었습니다. 졸업식에도 생일에도 그리고 눈이 맞은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날에도 짜장면은 단골 메뉴였습니다. 소형 승용차 선전 문구였던가요? '작은 차, 큰 기쁨' 처럼 짜장면은 '작은 돈, 큰 만족'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도 짜장면보다 더 검은 밤이 오더라도, 담벼락에서 비를 쫄딱 맞는 연인도, 슬픔이 밀려오고, 나무 젓가락처럼 부러질 수도 있는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도 모두 짜장면을 먹으면서 힘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짜장면이 이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안도현 시인은 에세이 '짜장면'에서 우선 그 냄새에서 온다고 추측합니다. "그 마력은 뭐니 뭐니 해도 냄새가 퍼뜨리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그 냄새에 슬쩍 감염되면 지위고 체통이고 다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 한다. 가족도 국가도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 냄새 앞에서는 백기를 들고 투항할 수밖에 없다." (안도현, '짜장면') 짜장면 앞에서는 지위나 체통 같은 개인적 가치는 물론 국가도 이데올로기도 백기 투항한다니, 짜장면의 위력은 핵폭탄보다 더 강한 것이겠습니다. 서민들의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서 그런지 짜장면은 나라가 관리하는 물가의 중대한 항목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올려도 짜장면만큼은 함부로 올리지 못하게 해서, 사실 장사를 하는 분들은 불만이기도 합니다. 짜장면 값은 얼마나 올랐을까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1970년 전후에는 평균 50원 정도였습니다. 1980년에는 350원, 1990년에는 1,300원, 2015년에는 4,500원 정도로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45년 만에 90배 정도 오른 셈입니다. 그래도 아직 5,000원짜리 한 장으로 한 끼를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짜장면은 서민들의 든든한 벗인 셈입니다. 하루에 짜장면 700만 그릇 먹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짜장면을 얼마나 먹을까요? 요식업 협회의 통계로는 하루에 무려 600만 내지 700만 그릇을 먹어치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5,150만 명 정도니까 줄잡아 한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은 짜장면을 먹는 셈입니다. 하긴 요즘은 식당에서뿐 아니라 상점에서도 거의 다 조리된 짜장면이나, 인스턴트 짜장면을 사다 집에서 끓여먹을 수 있으니 우리나라는 짜장면 왕국입니다. 지금도 밥을 먹으러 가자는 말을 짜장면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1984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평지의 농민들이 새참으로 밥대신 짜장면을 먹고 있다. 그뿐입니까? 가정과 직장에서는 물론 농가에서 바쁜 일손을 놀리다 허기지면 시켜 먹는 새참 1순위도 짜장면이고, 건설 현장에서 이삿짐을 나르다, 심지어는 해수욕을 하거나 낚시를 하다가 시켜 먹는 음식도 짜장면이 으뜸입니다. 오죽하면 최남단 섬 마라도 그 좁은 곳에 짜장면 집이 10군데 넘게 생기고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광고 카피가 유행했으려고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음식 배달을 잘하는 나라인 이유가 '배달의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재치 있는 유머도 있습니다만, 배달 음식의 대명사 역시 짜장면입니다. 지금은 줄어들었지만, '철가방'이라 불리는 하얀 알루미늄 배달통을 싣고 쏜갈같이 내달리는 오토바이를 보고 있노라면, 멀쩡하던 배가 고파오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짜장면이 떠오르면서 군침이 돕니다. 마치 파블로프가 실험해서 알아냈다는 '조건반사'의 법칙처럼.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다음해에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부터 차이나타운이 형성됐다. 최초로 짜장면을 판 것으로 알려진 ‘공화춘’도 이 곳에서 시작했다. 짜장면은 개화기인 1890년대 우리나라로 들어온 중국 산동지방의 상인들이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천을 중심으로 일하던 부두 하역노동자나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만든 것이 시초라는 것이지요. 최초로 짜장면을 만들어 판 것으로 알려진 '공화춘' 건물은 올해 등록문화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시작은 중국이었지만 현재 중국 각지에서 맛볼 수 있는 짜장면과는 재료와 요리 방식이 전혀 다르니 짜장면은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입니다. 특히 짜장면의 주 재료인 춘장은 콩을 발효시킨 것인데 까만 색깔이 독특해 짜장면은 우리가 주로 먹는 음식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마치 검은 커피가 모든 차와는 두드러지는 색깔과 맛으로 사랑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검은색은 좀 묘합니다. 우리의 입맛을 돋우는 색은 대개 빨강이나 노랑 같은 밝고 따뜻한 계열이고 실제로 많은 음식들이 이런 색깔을 띱니다. 하다못해 초록이나 파랑처럼 시원한 맛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검은색은 식욕을 돋우기 어려운 색입니다. 특히 동양사회에서 검은색은 생성보다는 소멸, 탄생보다는 죽음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역설적으로 이 검은색이 뿜어내는 마력은 중독성이 강하고 치명적입니다. 먹고 살만해진 지금도 중식당에 가서 근사한 요리를 배불리 먹어도 마무리는 짜장면을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최근 짜장면을 소재로 한국 사회를 풀어낸 책 '짜장면뎐'을 펴낸 양세욱 교수가 부친 책의 부제가 '시대를 풍미한 검은 중독의 문화사' 였습니다. 짜장면이라는 보잘 것 없는 음식이 우리의 삶에 미친 만만찮은 영향을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긴 면발은 나의 혼, 나의 분신 경복궁 옆 청운동에는 아주 작은 중국음식점이 있습니다. '청운반점' 이라고 동네 이름을 딴 듯한 음식점인데요, 60대 중반의 부부가 오순도순 꾸려가는 허름하지만 맛깔스러운 식당입니다. 종종 이 부근에서 열리는 강연이나 강의를 들으러 가는 저는 더러 짜장면 생각이 나서 들르곤 합니다. 어느 날 어지럽게 음식 메뉴가 붙은 벽 한구석에 아무런 치장도 없이 백지에 프린트한 시 한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짜장면을 먹으며 이 시를 자꾸 쳐다봤습니다. 시를 쓴답시고 온갖 그럴듯한 단어와 표현을 찾으려 낑낑대는 제 머리를 쾅 내리치는 것 같았습니다. 시가 언어를 통해 삶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고해성사라면 이 시보다 더 진솔한 시가 있을까요? 저는 짜장면을 먹으면서 벽에 붙은 시와 주인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아저씨는 요리하는 틈틈이 시를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저씨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중식당에서 접시 닦고 청소하는 일부터 시작해 주방 일을 배웠고, 40년 전쯤부터 이 작은 집을 열어 가정을 꾸리며 자식을 길러냈다 했습니다. 그러니 무수히 반죽하고 뽑아냈을 긴 면발은 아저씨의 분신이고 혼이고 또 꿈이었겠지요. 40년 동안 푸른 잎이 돋고 붉은 단풍이 물들고 청춘은 흘러 머리에는 어느덧 흰 서리가 내려앉았지만 아저씨는 면발 덕에 푸른 세월 잘 살았다고 말합니다. 삶의 용기를 얻는 묘약 짜장면 언제 먹어도 짜장면은 맛있지만 셰프 사장인 박찬일 씨는 특히 우울할 때 먹는다고 말합니다. "뭔가 일이 안 풀리거나 고민해야 할 일이 있으면,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놓고 그걸 기다린다.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모든 감각이 오직 짜장면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로 변해 복잡한 머릿속은 정돈이 되고, 생각이라는 이름의 모호한 안개가 걷힌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한두 시가 좋겠다. 외근 나온 영업사원이나 환경미화원이나 막노동자 같은, 혼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시간에 중국집에 깃든다. 건강한 육체노동자들의 왕성한 식사 현장을 훔쳐보는 것이다. 대개 그들은 곱빼기를 시킨다. 이 말에 복 있으라. 짜장면은 양껏 젓가락으로 말아 올려, 입가에 소스를 묻히며 후루룩 소리도 요란하게 한 다발의 짜장면을 넘기는 장면..... 나는 거기서 생명의 힘을 느낀다." (박찬일,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감정노동자의 애환과 인권 문제가 연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합니다만, 외판을 해야 하는 세일즈 사원들이야말로 얼마나 고달플지요? 고객의 온갖 주문과 요구에 시달리고, 때로는 개인적 불만과 화풀이에 험악한 욕설까지 들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점심 때를 놓치기 일쑤겠지요. 그럴 때 윤기 흐르고 끈기있는 짜장면을 젓가락으로 힘차게 말아올려 입이 터져라 넣을 때의 그 힘, 또 그 힘의 생성과 소멸 현장을 바라보면서 얻게 되는 힘, 짜장면이 이토록 힘이 있을 줄이야! 이런 광경도 보신 적 있지 않나요? 이도 제대로 나지 않는 어린아이가 얼굴에 온통 검은 소스를 묻혀가며 면발을 빨아올릴 때의 경이로움, 감탄이 터져 나옵니다. 저도 우울한 날에는 짜장면을 먹으러 갑니다. 권태로운 날에도 짜장면을 먹으러 갑니다. 돈 없어 기운 없고, 기운 없어 온몸이 묵직하고, 온몸이 묵직해서 슬픈 날에는 짜장면을 먹으러 갑니다. 저도 짜장면을 먹으면서 시 한편 써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짜장면 한 그릇으로 세상의 우울을 다 담아 맛있게 비벼 드시고 다시 힘차게 식당문을 나서시길!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① 시 속의 경제, 경제 속의 시 ② 한 방에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 ③ 밥벌이, 그 숭고한 비루함 ④ 연탄, 검은 눈물로 빚은 붉은 희망 ⑤ 최악의 종이자 최상의 군주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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