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In] ⑥ “꿈이로구나”…‘몽유도원도’와 안평대군

입력 2016.07.20 (06:58) 수정 2016.08.0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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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 꿈을 꾼 것은 정묘년(丁卯年, 1447)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꽃이 지는 소리에 잠을 뒤척이다 홀연히 꿈에 빠졌다.

깊은 골짜기 그윽한 그곳에, 화사한 복사꽃의 은근한 손짓이 눈앞에 선명하거늘, 꿈이었다.

안견을 불러야겠다. “그대가 내 꿈을 그려줘야겠네.”

사흘 뒤 안견은 다시 대군 앞에 섰다. 두 사람 사이에는 ‘꿈 그림’이 놓여 있었다.

“꿈이로구나, 꿈이로구나” 안평대군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비단에 채색, 일본 덴리(天理)대학교 소장안견의 ‘몽유도원도’, 비단에 채색, 일본 덴리(天理)대학교 소장

대군의 눈앞엔 봄날의 붉은 복사꽃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복숭아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쳐 마치 노을이 지는 것 같았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그림의 전개 방식부터 특이했다. 통상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가면서 보는 게 원칙인데 이 그림은 정반대였다.

왼쪽의 현실 세계와 오른쪽의 도원 세계가 대조를 보이고, 몇 개의 경관이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왼쪽 하단부에서 오른쪽 상단부의 도원까지 파노라마처럼 그린 그림이다.

서울 DDP에서 전시 중인 ‘몽유도원도’ 디지털 복원 작품서울 DDP에서 전시 중인 ‘몽유도원도’ 디지털 복원 작품

조선 초기 산수화의 진수인 ‘몽유도원도’가 우리 눈앞에 펼쳐 있다.

그림 밖으로는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그림 속 자연 풍광은 미세하게 움직인다. 색조 또한 보다 뚜렷해져 500년 전에도 그랬을 것으로 짐작되는 모습을 되찾아간다.

하지만 이 그림은 실물이 아닌 디지털 기술로 재현된 복사본이다. 시민들의 소액 기부 모금으로 디지털 사본을 구입한 뒤 전문가들의 재능 기부로 복원시킨 것이다.

‘몽유도원도’와 같은 국보급 국외 소재 문화재 7점이 디지털 기술로 복원돼 8월까지 서울 DDP에서 전시된다.

‘디지털 귀향’으로 이름 부쳐진 이번 전시는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어떻게 기억하고 향유할 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였다. 결론은 우리 것이지만 맘껏 볼 수 없는 문화재를 디지털 기술로 되살려 활용하자는 것이다.

전시 기획자인 남상민 작가는 “국외 소재 문화재의 디지털화가 문화재 반환을 유도하고, 후세에 전해 오래도록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안평대군의 자택인 비해당(匪懈堂)에는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 초청됐다.

성삼문, 이개, 박팽년, 신숙주, 김종서, 최항 등등.

이들이 초청된 이유는 안평대군의 기이한 꿈을 그린 그림인 ‘몽유도원도’를 감상하고 찬문(贊文)을 짓기 위함이었다.

문사들은 저마다 그림 속에 묘사된 기묘한 도원의 풍경과 여기에 깃든 안평대군의 큰 뜻을 찬양하는 글을 지었다.

“잠깐 사이에 꾼 꿈이라 하지만 꿈 속에서 겪은 일 낱낱이 현실이라네” (신숙주)

“지체 높고 맑은 생각 고상하신 분, 도가 절로 트여 초연히 세상 밖의 신선 사는 곳을 꿈꾸셨네” (이개)

안평대군의 큰 뜻은 다름 아닌 세속의 정치를 떠나 은거하며 왕위의 순조로운 장자 승계를 돕겠다는 충의의 표현이었다. 조선에서 장자 승계는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실현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군의 뜻은 얼마 안 돼 여지없이 꺾인다.

지난 2009년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지난 2009년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2009년 9월 말 국립중앙박물관. 일본에서 빌려 온 ‘몽유도원도’가 전시 중이었다.

전시실 앞에는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사람들이 너무 몰리자 박물관 측은 관람시간을 1분으로 제한했다. 서너 시간 줄을 서 1분 관람하는데도 줄어들기는 커녕 더 늘었다. 전시기간 내내 하루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작품을 봤다.

일본 소장자가 “다시는 몽유도원도를 전시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국내에 전해진 탓이 컸다.

고국을 찾은 안견의 ‘몽유도원도’고국을 찾은 안견의 ‘몽유도원도’

그 전에도 ‘몽유도원도’는 우리나라를 찾은 적이 있다. 지난 1996년 호암미술관이 주최한 ‘위대한 문화 유산을 찾아서-조선전기 국보전’에서이다.

‘몽유도원도’가 우리에게 선을 보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작품에는 탄성을, 일본 소유라는 데에는 탄식을 쏟아냈다.


그럼, ‘몽유도원도’는 어디에 있는가? 이역만리 일본 나라현의 덴리(天理)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우리 곁에 두고 감상해야 할 조선 최고의 그림이 어쩌다 일본에 넘어갔으며, 왜 우리는 그것을 힘겹게 빌려와야 하는가?

조선의 황금시대인 세종조에 탄생한 이 서화는 계유정난(1453) 때 안평대군이 희생되면서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만여 권의 책과 희귀한 그림들, 비해당 역시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몽유도원도’는 어떻게 된 일일까?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전한 상태로 전해진 것은 아마도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전에 안평대군이 어딘가에 따로 소중히 보관해뒀기 때문은 아닐까?

‘몽유도원도’는 은둔의 시간을 보내다가 1893년 일본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 우여곡절 끝에 일본 덴리대가 소장하게 된다.


‘몽유도원도’에는 극적인 요소가 다 들어가 있다.

먼저 예술적으로 봤을 때 작품에는 박팽년, 신숙주, 김종서 등 당시 대표적 문인들의 시문과 글씨가 함께 모여 있다. 시(時)·서(書)·화(畵)의 세가지 예술이 종합적으로 구현돼 있는 것이다.

‘몽유도원도’를 탄생하도록 한 안평대군은 또 누구인가? 학문과 예술에 두루 뛰어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고 예술품 수집가였다. 인품이 호방해 주변에는 사람이 넘쳤다.

안평대군이 스물다섯이 되던 해, 아버지 세종은 ‘게으르지 말라’는 의미의 비해(匪懈)라는 당호를 내린다. 비해라니... 대군의 이름인 안평(安平)과는 너무 다르지 않는가?

이는 20대 초반에 학문과 예술에서 일가를 이룬 것에 자만하지 말고 계속해서 학문을 열심히 닦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시 말해 나라의 근간인 ‘충의’를 항상 염두에 두라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안평대군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북악산 뒤쪽에 별서를 짓고 무릉도원 계곡이라는 뜻으로 무계정사를 열었다. 그리고 ‘무계수창시(武溪酬唱詩)’를 남기는데 무릉도원을 꿈에 본 이래 정치에서 은퇴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훗날 비해당(匪懈堂)에 모인 문사들은 상반된 길을 걷게 된다. 일부는 충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일부는 배신을 통해 영화로운 삶을 누린다.

그들은 '몽유도원도'를 보며 함께 ‘꿈의 세계’를 노래했지만 어떤 이(박팽년, 성삼문 등)는 꿈을 꾼 자(안평대군)와 같은 길을 걸었고, 어떤 이(신숙주, 최항 등)는 그 꿈에서 돌아서 나왔다.

그럼, 그 꿈을 그린 사람(안견)은 어떻게 됐을까? 꿈을 꾼 사람과 함께 갔을까, 아니면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했을까?

역사는 안견이 계유정난에서 목숨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훗날 그의 아들은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적고 있다.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 채고, 될 수 있으면 안평대군을 멀리 했기 때문이다.

세상만사가 그림 속의 꿈처럼 헛된 것일까?

[문화人·In]
☞ ⑤ ‘브로드웨이 朴’의 세상에 없는 무대
☞ ④ 잃어버린 언어를 그리는 ‘무진기행’ 김승옥
☞ ③ 아코디언 전설이 된 ‘대통령의 악사’
☞ ② 신명나게 ‘현실’을 비판한 작가, 오윤
☞ ① “서화에 생명 불어넣은 50년,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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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人·In] ⑥ “꿈이로구나”…‘몽유도원도’와 안평대군
    • 입력 2016-07-20 06:58:09
    • 수정2016-08-08 14:36:20
    취재K
안평대군이 꿈을 꾼 것은 정묘년(丁卯年, 1447)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꽃이 지는 소리에 잠을 뒤척이다 홀연히 꿈에 빠졌다.

깊은 골짜기 그윽한 그곳에, 화사한 복사꽃의 은근한 손짓이 눈앞에 선명하거늘, 꿈이었다.

안견을 불러야겠다. “그대가 내 꿈을 그려줘야겠네.”

사흘 뒤 안견은 다시 대군 앞에 섰다. 두 사람 사이에는 ‘꿈 그림’이 놓여 있었다.

“꿈이로구나, 꿈이로구나” 안평대군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비단에 채색, 일본 덴리(天理)대학교 소장
대군의 눈앞엔 봄날의 붉은 복사꽃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복숭아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쳐 마치 노을이 지는 것 같았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그림의 전개 방식부터 특이했다. 통상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가면서 보는 게 원칙인데 이 그림은 정반대였다.

왼쪽의 현실 세계와 오른쪽의 도원 세계가 대조를 보이고, 몇 개의 경관이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왼쪽 하단부에서 오른쪽 상단부의 도원까지 파노라마처럼 그린 그림이다.

서울 DDP에서 전시 중인 ‘몽유도원도’ 디지털 복원 작품
조선 초기 산수화의 진수인 ‘몽유도원도’가 우리 눈앞에 펼쳐 있다.

그림 밖으로는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그림 속 자연 풍광은 미세하게 움직인다. 색조 또한 보다 뚜렷해져 500년 전에도 그랬을 것으로 짐작되는 모습을 되찾아간다.

하지만 이 그림은 실물이 아닌 디지털 기술로 재현된 복사본이다. 시민들의 소액 기부 모금으로 디지털 사본을 구입한 뒤 전문가들의 재능 기부로 복원시킨 것이다.

‘몽유도원도’와 같은 국보급 국외 소재 문화재 7점이 디지털 기술로 복원돼 8월까지 서울 DDP에서 전시된다.

‘디지털 귀향’으로 이름 부쳐진 이번 전시는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어떻게 기억하고 향유할 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였다. 결론은 우리 것이지만 맘껏 볼 수 없는 문화재를 디지털 기술로 되살려 활용하자는 것이다.

전시 기획자인 남상민 작가는 “국외 소재 문화재의 디지털화가 문화재 반환을 유도하고, 후세에 전해 오래도록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안평대군의 자택인 비해당(匪懈堂)에는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 초청됐다.

성삼문, 이개, 박팽년, 신숙주, 김종서, 최항 등등.

이들이 초청된 이유는 안평대군의 기이한 꿈을 그린 그림인 ‘몽유도원도’를 감상하고 찬문(贊文)을 짓기 위함이었다.

문사들은 저마다 그림 속에 묘사된 기묘한 도원의 풍경과 여기에 깃든 안평대군의 큰 뜻을 찬양하는 글을 지었다.

“잠깐 사이에 꾼 꿈이라 하지만 꿈 속에서 겪은 일 낱낱이 현실이라네” (신숙주)

“지체 높고 맑은 생각 고상하신 분, 도가 절로 트여 초연히 세상 밖의 신선 사는 곳을 꿈꾸셨네” (이개)

안평대군의 큰 뜻은 다름 아닌 세속의 정치를 떠나 은거하며 왕위의 순조로운 장자 승계를 돕겠다는 충의의 표현이었다. 조선에서 장자 승계는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실현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군의 뜻은 얼마 안 돼 여지없이 꺾인다.

지난 2009년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2009년 9월 말 국립중앙박물관. 일본에서 빌려 온 ‘몽유도원도’가 전시 중이었다.

전시실 앞에는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사람들이 너무 몰리자 박물관 측은 관람시간을 1분으로 제한했다. 서너 시간 줄을 서 1분 관람하는데도 줄어들기는 커녕 더 늘었다. 전시기간 내내 하루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작품을 봤다.

일본 소장자가 “다시는 몽유도원도를 전시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국내에 전해진 탓이 컸다.

고국을 찾은 안견의 ‘몽유도원도’
그 전에도 ‘몽유도원도’는 우리나라를 찾은 적이 있다. 지난 1996년 호암미술관이 주최한 ‘위대한 문화 유산을 찾아서-조선전기 국보전’에서이다.

‘몽유도원도’가 우리에게 선을 보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작품에는 탄성을, 일본 소유라는 데에는 탄식을 쏟아냈다.


그럼, ‘몽유도원도’는 어디에 있는가? 이역만리 일본 나라현의 덴리(天理)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우리 곁에 두고 감상해야 할 조선 최고의 그림이 어쩌다 일본에 넘어갔으며, 왜 우리는 그것을 힘겹게 빌려와야 하는가?

조선의 황금시대인 세종조에 탄생한 이 서화는 계유정난(1453) 때 안평대군이 희생되면서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만여 권의 책과 희귀한 그림들, 비해당 역시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몽유도원도’는 어떻게 된 일일까?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전한 상태로 전해진 것은 아마도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전에 안평대군이 어딘가에 따로 소중히 보관해뒀기 때문은 아닐까?

‘몽유도원도’는 은둔의 시간을 보내다가 1893년 일본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 우여곡절 끝에 일본 덴리대가 소장하게 된다.


‘몽유도원도’에는 극적인 요소가 다 들어가 있다.

먼저 예술적으로 봤을 때 작품에는 박팽년, 신숙주, 김종서 등 당시 대표적 문인들의 시문과 글씨가 함께 모여 있다. 시(時)·서(書)·화(畵)의 세가지 예술이 종합적으로 구현돼 있는 것이다.

‘몽유도원도’를 탄생하도록 한 안평대군은 또 누구인가? 학문과 예술에 두루 뛰어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고 예술품 수집가였다. 인품이 호방해 주변에는 사람이 넘쳤다.

안평대군이 스물다섯이 되던 해, 아버지 세종은 ‘게으르지 말라’는 의미의 비해(匪懈)라는 당호를 내린다. 비해라니... 대군의 이름인 안평(安平)과는 너무 다르지 않는가?

이는 20대 초반에 학문과 예술에서 일가를 이룬 것에 자만하지 말고 계속해서 학문을 열심히 닦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시 말해 나라의 근간인 ‘충의’를 항상 염두에 두라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안평대군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북악산 뒤쪽에 별서를 짓고 무릉도원 계곡이라는 뜻으로 무계정사를 열었다. 그리고 ‘무계수창시(武溪酬唱詩)’를 남기는데 무릉도원을 꿈에 본 이래 정치에서 은퇴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훗날 비해당(匪懈堂)에 모인 문사들은 상반된 길을 걷게 된다. 일부는 충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일부는 배신을 통해 영화로운 삶을 누린다.

그들은 '몽유도원도'를 보며 함께 ‘꿈의 세계’를 노래했지만 어떤 이(박팽년, 성삼문 등)는 꿈을 꾼 자(안평대군)와 같은 길을 걸었고, 어떤 이(신숙주, 최항 등)는 그 꿈에서 돌아서 나왔다.

그럼, 그 꿈을 그린 사람(안견)은 어떻게 됐을까? 꿈을 꾼 사람과 함께 갔을까, 아니면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했을까?

역사는 안견이 계유정난에서 목숨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훗날 그의 아들은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적고 있다.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 채고, 될 수 있으면 안평대군을 멀리 했기 때문이다.

세상만사가 그림 속의 꿈처럼 헛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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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⑤ ‘브로드웨이 朴’의 세상에 없는 무대
☞ ④ 잃어버린 언어를 그리는 ‘무진기행’ 김승옥
☞ ③ 아코디언 전설이 된 ‘대통령의 악사’
☞ ② 신명나게 ‘현실’을 비판한 작가, 오윤
☞ ① “서화에 생명 불어넣은 50년,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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