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너머의 여순]⑤ 여순사건 해결 위해선 ‘여순’ 넘어서야

입력 2020.10.23 (16:18) 수정 2020.10.2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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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의 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여수와 순천’이라는 명칭이 붙은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지역, 전북 지역까지 직접 여순사건의 피해를 봤고, 제주 4.3의 무차별 학살과 6.25 직후 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연관됐습니다.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인 셈입니다. 여순사건 72주년을 맞아 지역적 한계를 넘어 여순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합니다.

[여순사건 72주년 기획보도, 여순 너머의 여순]
① 여순사건 72년, 여순 ‘너머’를 생각한다
② 남도 곳곳은 여순사건 ‘학살터’
③ 4.3·형무소·보도연맹…여순사건이 부른 죽음들
④ 현대사 트라우마 여순사건…‘여순 체제’의 그늘
⑤ 여순사건 해결 위해선 ‘여순’ 넘어서야

■ 5.18과 4.3…발생은 지역, 관심은 전국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시작된 5.18.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을 외친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자비한 진압의 여파는 오래갔습니다. 한때는 ‘광주 사태’라고 불리며 멸시를 받았고,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는 왜곡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시작된 4.3.

분단과 정부 수립의 혼란기, 무장봉기와 진압의 소용돌이 속에서 막대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 속에 희생을 이야기조차 하지 못하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의 공식 사과까지 나오면서 4.3은 많은 이들이 추모하고 기억하는 역사로 남게 됐습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 4.3에 얽힌 이야기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기념관이 구성돼 있습니다.제주 4.3 평화기념관. 4.3에 얽힌 이야기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기념관이 구성돼 있습니다.

두 사건의 발생지는 광주와 제주라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관심은 전국적입니다. 특정 지역만 영향받은 단편적인 사건이 결코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와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리고 내가 아닌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지만, 그 영향이 큰 만큼 이 역사를 알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 5.18과 4.3은 이런 범국민적 합의를 기반으로 전국화가 가능했습니다.

■ ‘반란이냐 아니냐’ 굴레에 갇힌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시작된 여순사건은 어떨까요? 기획보도 ‘여순 너머의 여순’을 통해 살펴봤듯이 여순사건도 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큽니다. 여수와 순천뿐 아니라 남도 곳곳에서 여순사건으로 인한 학살이 벌어졌을 뿐 아니라, 4.3‧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큰 영향을 미쳤죠. 반공주의와 국가폭력이라는 어두운 역사에도 여순사건의 여파가 미쳤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순사건은 반란이냐 아니냐는 식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심지어 특정 지역의 ‘민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여순사건 직후 출간된 〈반란과 민족의 각오〉. 정부가 문인들을 여수와 순천 지역에 파견해 만든 책입니다. 이는 여수와 순천 지역을 '반란의 고장'으로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여순사건 직후 출간된 〈반란과 민족의 각오〉. 정부가 문인들을 여수와 순천 지역에 파견해 만든 책입니다. 이는 여수와 순천 지역을 '반란의 고장'으로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반공 국가의 분위기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유족들이 억울한 죽음에 대해 호소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속으로 삼킨 눈물을 정치권과 지역사회가 외면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러나 국가폭력 가해자이기도 한 정부가 규정한 인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 가장 클 겁니다.

이와 관련해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여순사건도 5.18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지역적 성격을 가진 사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에 반대하는 성격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이를 지역화‧고립화하길 원했다.”라며 “70년 전 정부의 인식을 지금도 깨지 못했다고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 어두운 역사,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독일이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부당한 이유로 인권을 말살하고 인명을 앗아가는 행위를 반성하기 위해서겠죠. 학살, 국가폭력, 억압,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여순사건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고,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 장면. 여순사건 당시 진압 장면.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열림교양대학 교수는 “여순사건은 단순한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폭력과 대량학살로 이어지는데, 정상적인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의 상을 투영시키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라도 여순사건의 전국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폭력으로 얼룩진 안타까운 역사를 청산해야 그 위에 바람직한 국가의 상을 그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70여 년 전 지방의 작은 소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지금도 기려야 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공식 진상규명으로 성격과 영향력 밝혀야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제도적 해결의 중요성은 그래서 더 강조됩니다. 아무리 여순사건이 중요하다고 외쳐도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 없이는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주 4.3 얘기로 잠깐 돌아가 보겠습니다. 진상규명에 대한 끈질긴 요구로 2000년 4.3 특별법이 제정됐고, 2003년에는 국가의 진상조사보고서가 발표됐죠. ‘빨갱이 폭동’ 정도로만 기억되던 4.3의 인식도 그 뒤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기념재단과 평화공원이 만들어졌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4.3을 기리기 시작했습니다.

여순사건도 국가의 조사가 있기는 했었습니다. 2005년 설립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여러 차례 관련 보고서를 낸 겁니다. 그러나 조사는 순천, 여수, 구례 등 지역별로 따로 이뤄졌습니다. 신청인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지다 보니 더 큰 피해가 가려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순사건의 총체적 평가가 불가능했습니다.

21대 국회 본회의 모습. 여순사건 특별법은 아직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21대 국회 본회의 모습. 여순사건 특별법은 아직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21대 국회에서는 여순사건 특별법안이 발의돼 있습니다. 특별법안의 핵심은 제주 4.3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공식 보고서를 내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증언으로만 전해지는 피해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사건의 실체를 정리하자는 것이죠.


20년 동안 무산된 여순사건 특별법…이번에는?

여순사건 특별법이 처음 발의된 건 2001년, 제16대 국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이라는 목표로 법안이 나왔지만, 국회 문턱을 못 넘었습니다. 18대, 19대 국회에서도 꾸준히 법안이 발의됐지만, 무관심과 반대 의견에 부딪혀 잇따라 폐기됐습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는 특별법안이 5건이나 발의돼 높은 관심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역시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계류되다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좌절됐습니다.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이번 21대 국회에서 출범 두 달 만인 지난 7월 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의 대표발의로 여순사건 특별법안이 다시 등장한 겁니다. 역대 최다인 국회의원 152명이 동참했고, 현재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돼 있는 상태입니다. 소병철 의원은 “여순사건의 상처를 꼭 치유해야 한다”며 “국정감사가 끝난 뒤 정기국회에서 특별법 제정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여순사건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주철희 박사는 여기에 더해 국가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여순사건의 성격과 영향력도 밝혀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 박사는 “피해 조사를 통한 명예회복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그 차원을 한 단계 뛰어넘어, 국가 차원의 조사를 통해 여순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야 여순사건의 재인식이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전남 여수 만성리의여순사건 집단학살지에 세워진 비석. 묘비에는 말줄임표만 찍혀 있습니다. 오랫동안 여순사건을 제대로 얘기하지 못한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전남 여수 만성리의여순사건 집단학살지에 세워진 비석. 묘비에는 말줄임표만 찍혀 있습니다. 오랫동안 여순사건을 제대로 얘기하지 못한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 왜 ‘여순 너머의 여순’인가?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여순 너머의 여순’ 기획보도를 전해드렸습니다. 여순사건은 분명히 특정 지역에 가둘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상처입니다. 여순사건의 해결이라는 길 앞에는 지역의 울타리를 뛰어넘고 여순을 전국적, 역사적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무거운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여순사건을 반란이라고 부릅니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아픈 현대사가 제대로 이야기되지 못했던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과거 여순사건을 말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던 억압과 폭력은 비웃음과 무관심으로 상당 부분 대체됐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만 떨어져서 여순을 응시하면, 이념 논쟁에 가려진 실체가 조금은 드러납니다. 여순사건이라는 이름 속에 숨어 있는 억울한 희생자들의 눈물과 폭력‧억압의 역사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순 너머의 여순’으로 시각을 확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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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순 너머의 여순]⑤ 여순사건 해결 위해선 ‘여순’ 넘어서야
    • 입력 2020-10-23 16:18:42
    • 수정2020-10-23 16:19:37
    취재K

편집자 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이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의 일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여수와 순천’이라는 명칭이 붙은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남 전역과 경남 서부 지역, 전북 지역까지 직접 여순사건의 피해를 봤고, 제주 4.3의 무차별 학살과 6.25 직후 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연관됐습니다. 여순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인 셈입니다. 여순사건 72주년을 맞아 지역적 한계를 넘어 여순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들여다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합니다.

[여순사건 72주년 기획보도, 여순 너머의 여순]
① 여순사건 72년, 여순 ‘너머’를 생각한다
② 남도 곳곳은 여순사건 ‘학살터’
③ 4.3·형무소·보도연맹…여순사건이 부른 죽음들
④ 현대사 트라우마 여순사건…‘여순 체제’의 그늘
⑤ 여순사건 해결 위해선 ‘여순’ 넘어서야

■ 5.18과 4.3…발생은 지역, 관심은 전국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시작된 5.18.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을 외친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자비한 진압의 여파는 오래갔습니다. 한때는 ‘광주 사태’라고 불리며 멸시를 받았고,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는 왜곡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시작된 4.3.

분단과 정부 수립의 혼란기, 무장봉기와 진압의 소용돌이 속에서 막대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 속에 희생을 이야기조차 하지 못하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의 공식 사과까지 나오면서 4.3은 많은 이들이 추모하고 기억하는 역사로 남게 됐습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 4.3에 얽힌 이야기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기념관이 구성돼 있습니다.
두 사건의 발생지는 광주와 제주라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관심은 전국적입니다. 특정 지역만 영향받은 단편적인 사건이 결코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와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리고 내가 아닌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지만, 그 영향이 큰 만큼 이 역사를 알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 5.18과 4.3은 이런 범국민적 합의를 기반으로 전국화가 가능했습니다.

■ ‘반란이냐 아니냐’ 굴레에 갇힌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시작된 여순사건은 어떨까요? 기획보도 ‘여순 너머의 여순’을 통해 살펴봤듯이 여순사건도 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큽니다. 여수와 순천뿐 아니라 남도 곳곳에서 여순사건으로 인한 학살이 벌어졌을 뿐 아니라, 4.3‧형무소‧보도연맹 학살에도 큰 영향을 미쳤죠. 반공주의와 국가폭력이라는 어두운 역사에도 여순사건의 여파가 미쳤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순사건은 반란이냐 아니냐는 식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심지어 특정 지역의 ‘민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여순사건 직후 출간된 〈반란과 민족의 각오〉. 정부가 문인들을 여수와 순천 지역에 파견해 만든 책입니다. 이는 여수와 순천 지역을 '반란의 고장'으로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반공 국가의 분위기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유족들이 억울한 죽음에 대해 호소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속으로 삼킨 눈물을 정치권과 지역사회가 외면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러나 국가폭력 가해자이기도 한 정부가 규정한 인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 가장 클 겁니다.

이와 관련해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여순사건도 5.18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지역적 성격을 가진 사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에 반대하는 성격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이를 지역화‧고립화하길 원했다.”라며 “70년 전 정부의 인식을 지금도 깨지 못했다고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 어두운 역사,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독일이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부당한 이유로 인권을 말살하고 인명을 앗아가는 행위를 반성하기 위해서겠죠. 학살, 국가폭력, 억압,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여순사건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고,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 장면.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열림교양대학 교수는 “여순사건은 단순한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폭력과 대량학살로 이어지는데, 정상적인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의 상을 투영시키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라도 여순사건의 전국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폭력으로 얼룩진 안타까운 역사를 청산해야 그 위에 바람직한 국가의 상을 그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70여 년 전 지방의 작은 소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지금도 기려야 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공식 진상규명으로 성격과 영향력 밝혀야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제도적 해결의 중요성은 그래서 더 강조됩니다. 아무리 여순사건이 중요하다고 외쳐도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 없이는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주 4.3 얘기로 잠깐 돌아가 보겠습니다. 진상규명에 대한 끈질긴 요구로 2000년 4.3 특별법이 제정됐고, 2003년에는 국가의 진상조사보고서가 발표됐죠. ‘빨갱이 폭동’ 정도로만 기억되던 4.3의 인식도 그 뒤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기념재단과 평화공원이 만들어졌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4.3을 기리기 시작했습니다.

여순사건도 국가의 조사가 있기는 했었습니다. 2005년 설립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여러 차례 관련 보고서를 낸 겁니다. 그러나 조사는 순천, 여수, 구례 등 지역별로 따로 이뤄졌습니다. 신청인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지다 보니 더 큰 피해가 가려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순사건의 총체적 평가가 불가능했습니다.

21대 국회 본회의 모습. 여순사건 특별법은 아직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21대 국회에서는 여순사건 특별법안이 발의돼 있습니다. 특별법안의 핵심은 제주 4.3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공식 보고서를 내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증언으로만 전해지는 피해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사건의 실체를 정리하자는 것이죠.


20년 동안 무산된 여순사건 특별법…이번에는?

여순사건 특별법이 처음 발의된 건 2001년, 제16대 국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이라는 목표로 법안이 나왔지만, 국회 문턱을 못 넘었습니다. 18대, 19대 국회에서도 꾸준히 법안이 발의됐지만, 무관심과 반대 의견에 부딪혀 잇따라 폐기됐습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는 특별법안이 5건이나 발의돼 높은 관심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역시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계류되다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좌절됐습니다.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이번 21대 국회에서 출범 두 달 만인 지난 7월 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의 대표발의로 여순사건 특별법안이 다시 등장한 겁니다. 역대 최다인 국회의원 152명이 동참했고, 현재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돼 있는 상태입니다. 소병철 의원은 “여순사건의 상처를 꼭 치유해야 한다”며 “국정감사가 끝난 뒤 정기국회에서 특별법 제정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여순사건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주철희 박사는 여기에 더해 국가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여순사건의 성격과 영향력도 밝혀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 박사는 “피해 조사를 통한 명예회복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그 차원을 한 단계 뛰어넘어, 국가 차원의 조사를 통해 여순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야 여순사건의 재인식이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전남 여수 만성리의여순사건 집단학살지에 세워진 비석. 묘비에는 말줄임표만 찍혀 있습니다. 오랫동안 여순사건을 제대로 얘기하지 못한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 왜 ‘여순 너머의 여순’인가?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여순 너머의 여순’ 기획보도를 전해드렸습니다. 여순사건은 분명히 특정 지역에 가둘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상처입니다. 여순사건의 해결이라는 길 앞에는 지역의 울타리를 뛰어넘고 여순을 전국적, 역사적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무거운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여순사건을 반란이라고 부릅니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아픈 현대사가 제대로 이야기되지 못했던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과거 여순사건을 말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던 억압과 폭력은 비웃음과 무관심으로 상당 부분 대체됐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만 떨어져서 여순을 응시하면, 이념 논쟁에 가려진 실체가 조금은 드러납니다. 여순사건이라는 이름 속에 숨어 있는 억울한 희생자들의 눈물과 폭력‧억압의 역사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순 너머의 여순’으로 시각을 확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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