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27일 긴급 금융통위원회를 소집해 유례 없는 파격적인 조치를 내렸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내리고 은행채.특수채 5조∼10조원 정도를 환매조건부채권(RP) 방식으로 사들이기로 결정한 것은 한은이 발족한 이래 처음 단행한 초강수다.
이는 경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은은 그동안 여러 대책 시행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이 갈수록 추락하는 데다 실물경제도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가계와 중소기업의 이자부담은 한국경제의 위기를 증폭시킬 것이라는 판단도 이번 결정의 배경이 됐다.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기 위해서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도 금통위의 결정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정부는 시장이 불안에서 벗어날 때까지 선제적이고 충분하며 확실하게 유동성을 공급할 것"이라며 "문제는 오히려 심리적인 것으로 실제 이상으로 상황에 과잉반응하고 공포심에 휩싸이는 것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은행의 이런 조치가 경제위기 극복에 어느정도 기여할 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한국 경제의 위기는 내부적인 요인보다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세계경기 침체라는 대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한은, 파격적인 금리 인하
한국은행의 이번 금리인하는 시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다음달 7일에 예정돼 있는 정례 금통위 회의에서 금리를 내릴 것이라는 전망은 많았지만 임시 금통위 소집을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은이 임시 금통위를 개최한 것은 지난 2001년 9.11테러 당시 이후 처음이다. 한은은 9.11테러 직후인 2001년 9월19일 임시 금통위를 소집해 기준금리를 4.50%에서 4.0%로 내린 바 있다.
금리 인하폭 0.75% 포인트도 파격적인 것으로 한으로서는 이렇게 크게 내린 적이 없었다. 한은은 그동안 경기 여건상 금리인하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인하 자체가 채권시장에서 자본유출을 초래해 환율을 끌어올리는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지적하곤 했다.
따라서 금리를 내리더라도 0.25%포인트씩 서서히 내릴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한은은 예상과 달리, 0.5%포인트도 아닌 0.75%포인트를 선택하는 초강수를 택했다. 예상수준을 뛰어넘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한은이 은행채 뿐 아니라 산업은행채권을 포함한 특수채를 RP대상 거래에 포함시켜 사들이기로 한 것도 예상밖의 조치에 해당된다. 해당 채권은 중소기업은행.농협.수출입은행.토지공사.주택공사.중소기업진흥공단 발행 채권과 주택금융공사가 발행한 주택저당증권(MBS) 등이 대거 포함됐다.
한은이 RP방식으로 사들인다는 5조∼10조원 규모도 당초 예상보다 많은 규모다.
◇ 금리 서둘러 내린 이유는
한은이 서둘러 금리를 큰 폭으로 내린 것은 경제가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와 유럽 등 각국이 위기대응을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세계 금융불안은 여전히 증폭되고 있으며 이는 한국의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을 거세게 흔들고 있다.
코스피지수는 지난 24일 1,000선이 붕괴하면서 세자릿수로 주저앉았다. 이 지수는 전날보다 110.96포인트(10.57%)나 폭락한 938.75로 장을 마쳤다. 지난 주말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전날보다 달러당 15.20원 상승한 1,424.0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이런 끝없는 금융불안은 실물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 통계에 따르면 전기대비 성장률은 3분기에 0.6%로 2004년 3월의 0.5% 이후 가장 낮았다. 내수와 투자는 이미 바닥권으로 떨어진지 오래됐다. 민간소비는 전분기보다 0.1% 늘어나는데 그쳤다. 설비투자는 2.3%, 건설투자는 0.3% 각각 증가하는데 머물렀다.
또 지난 9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시중의 대출자금 금리는 계속 오르면서 중소기업과 가계의 부담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금리 전격 인하의 요인중 하나로 꼽힌다.
이 총재는 이번에 금리를 내린 배경과 관련 "경제활동이 상당히 빠르게 둔화하고 있고 고용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으며 가계나 중소기업의 원리금 상환부담이 많은 상황으로 봤다"면서 "따라서 한은이 더욱 확실하게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기준금리 인하는 부동산시장의 붕괴를 막는데도 어느정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가격마저 급락하면 한국경제의 위기는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빠져들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은이 공개시장 조작대상에 은행채와 특수채를 포함시킨 것은 금융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용경색을 막기 위한 것이다.
금통위는 통화정책 발표문에서 "금융시장의 부분적인 경색으로 장단기 시장금리가 상승하고 자금사정이 불안정하다"면서 "최근의 부동산시장과 건설경기 침체, 중소기업의 자금사정 악화 등을 감안해 이들 부문과 관련성이 높은 일부 특수채도 대상증권에 포함시켰다"고 설명했다.
◇ 추가 금리인하 가능성..물가.환율 불안 우려
한국은행은 앞으로 기준금리를 추가로 내릴 가능성이 높다. 기준금리를 0.75% 포인트 내린 것만으로 금융시장이 안정세로 돌아서고 실물침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은 관계자는 "시장 상황에 따라 금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면서 "그러나 언제, 어느정도 내릴지는 속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총재도 추가 금리 인하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총재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내수가 상당히 빨리 둔화되고 있다"면서 "수출은 잘 돼 왔으나 큰 나라들의 경제가 둔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수출이 계속 잘 될 것으로 자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금융시장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이어서 중앙은행이 여러가지 위험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면서 "그 쪽에 관심을 갖는 것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금리인하는 환율불안과 물가상승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금리하락은 국내 채권시장에서의 외국인 자금 이탈을 촉진하면서 가뜩이나 불안한 환율을 더욱 끌어올리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도 잇따라 금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런 부담은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이 한은의 판단이다.
이 총재는 "기준금리가 내려가도 국내자본의 이탈에는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 "이는 주요국에서 기준금리를 상당한 폭으로 내리고 있고, 자본의 움직임이 최근에는 금리보다는 유동성이 줄어드는 외부 요건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금리인하는 통화량을 늘리면서 물가불안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최근 국제유가가 뚝 떨어지면서 이런 부담은 상당히 줄었다는 것이 한은의 시각이다.
장재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의 환율 상승은 금리 문제보다는 달러 유동성, 달러 유출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금리 인하가 환율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 투자심리 개선에 효과
한은의 0.75% 포인트 금리인하는 선제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시장의 요구에 부응한 것으로 투자심리의 급격한 악화를 막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봤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은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내리는 동시에 다른 유동성 대책들을 패키지로 내놓음으로써 시장 심리의 급격한 악화를 막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무엇보다 가계, 중소기업 등의 금리부담을 직접적으로 줄이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홍성국 대우증권 투자분석부 상무는 "다른 국가들이 이미 0.5%포인트, 1.0%포인트 이상씩 금리를 내린 상황에서 이번 금리 하나만으로 효과를 보긴 어렵고 해외 요인도 고려해야 하지만 0.75%포인트 인하가 대내적인 요인에는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금리인하 조치가 경제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글로벌 신용경색과 세계 경기 침체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경제가 다시 회복세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한국의 금융시장과 실물경제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짓누르는 악순환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일반적으로 이런 경제충격이 왔을 때 회복하는데는 4∼5년 걸린다"면서 "특히 한국은 수출 둔화에 따라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