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보 1시간 30분…영상은 도착하지 않았다
10월 20일 오후 4시 30분, KBS 보도본부의 뉴스 스튜디오.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첫 뉴스 특보가 시작됐다. 앵커를 중심으로 한쪽엔 북한부 기자인 필자가, 다른 쪽엔 강호권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과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가 앉았다.
큐시트 상 시나리오는 이랬다. 첫 단체상봉 시작 시간은 오후 3시 30분, 현장에서 방송사 촬영기자들이 행사 초반 20분 동안 촬영한 뒤 디스크들을 모아 4시에 금강산 출발, 군사분계선 통과 4시 30분, 강원도 고성 남북출입사무소에 대기 중인 중계차에 도착하면 4시 45분. 이때부터 현장의 감격적인 상봉 장면을 바로 송출할 수 있으니, 특보 초반 15분 동안 미리 준비한 리포트를 틀고, 행사 일정과 이번 행사의 특징들을 소개하다 자연스럽게 현장의 상봉 장면 설명으로 넘어간다는 계획이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4시 5분에 행낭이 금강산을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예정대로라면 디스크가 고성 중계차에 도착해야 할 시간은 4시 50분. 하지만 이때 들어온 소식은 ‘디스크 도착’이 아니라, 무언가 문제가 있어 행낭이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았다. 당국이 북측과 문제 해결에 나설 테니 곧 영상이 송출되지 않겠느냐는 전망을 시청자들에게 전했다. 이어 5시 10분, 10분 뒤 디스크가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디스크는 오지 않았다.
KBS 특보
눈길을 끄는 사연자들 소개와 행사장 분위기, 이번 상봉의 의미 등을 전달하며 특보를 이어갔다. 현장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답답한 시간만이 흘러갔다. 결국, 특보 종료가 예정된 6시까지 디스크는 도착하지 않았고, 현장의 생생한 상봉 장면을 시청자들에게 보여드리지 못한 채 1시간 30분이나 이어진 특보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 송출 지연 내막, 알고 보니…
나중에 알려진 당시 상황을 시간 순서대로 재구성해 봤다. 행낭은 처음에 알려진 대로 4시쯤 금강산을 출발했다. 그런데 행낭이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북측 관계자들이 난데없이 행낭 속 촬영 영상을 보자고 요구했다. 우리 측 담당자들은 사전에 합의된 내용이 아니라며 항의했고, 북측이 계속 내용 확인을 요구하자 우리 측 인원들은 금강산으로 다시 돌아갔다.
우리 당국이“사전에 협의한 원칙대로 하자”고 항의해서 다시 행낭이 금강산을 출발한 시간이 4시 55분. 그런데 북측에서 이번엔 행낭 담당자가 사전에 통보받은 사람과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또 행낭이 되돌아갔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 부분은 통일부에도 책임도 있었다. 행낭 담당 직원 4명의 명단을 북측에 사전 통보했으나 북측으로부터 확답을 받지 않고 일을 진행한 것이다.
다시 남북 간 행낭 요원에 대한 조정을 마친 뒤 금강산을 출발하려 했지만, 이번엔 차량 준비가 제대로 안 됐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결국, 행낭이 우리 측 중계차에 도착해 영상이 송출된 시각은 예정보다 3시간이나 늦은 7시 50분이었다. 방송사들의 저녁 뉴스 준비는 당연히 큰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 되살아난 2006년의 악몽
리포트 오디오 송출 중단시키는 북측 지원요원
이번 송출 지연 사태를 겪으면서 필자는 지난 2006년의 악몽이 떠올랐다. 2006년 3월 20일, 필자는 제13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 공동 취재단의 일원으로 금강산에 있었다. 첫날 상봉일정을 취재한 뒤 리포트 오디오를 중계차에서 송출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우리 중계차가 금강산까지 직접 가서 영상과 오디오를 현지에서 송출했다.) 타 방송기자의 리포트 오디오 송출을 옆에 앉아서 지켜보던 북측 보장성원(지원요원)이 갑자기 송출을 중단시킨 것이다. 37년 만에 남측의 아내와 아들을 만난 납북 어부의 소식을 전하면서 우리 기자가 ‘납북’ ‘나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였다. 다음 송출 차례를 기다리던 필자를 비롯해 모든 기자가 북측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항의했고 심한 말다툼이 오갔다. 결국, 현장에서의 오디오 송출은 무산됐고, 방송사들은 미리 송출 받은 화면을 활용해 본사의 다른 기자가 기사를 작성해 보도하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다음 날에도 북측의 취재 방해는 노골화됐다. 현장에서 기자가 멘트 하는 장면을 촬영하려 하면 보장성원들은 기자를 밀어냈다. 우리 기자들은 기자단의 이름으로 강력히 항의했다. 하지만 북측은 일부 방송사 기자의 철수를 요구하며 이산가족들의 개별 상봉을 지연시키는가 하면 우리 상봉단의 귀환 시간을 늦추기까지 했다. 공동 취재단은 북측의 방해로 더는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항의 성명을 발표한 뒤 종료를 이틀 남겨둔 행사 나흘째 모두 철수했다. 공동 취재단의 행사 기간 중 철수는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 방북 취재 돌발 변수 줄이려면…
2006년, 역사적인 취재 현장을 떠나기로 한 결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언론의 자유, 자유로운 취재 보장에 대한 공동 취재단의 요구는 절실한 것이었다. 당시 북측은 취재진이 철수한다면 더는 상봉 행사를 취재할 생각을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방북 취재는 계속됐다. 현지 중계차 송출은 2009년 또다시 촬영을 둘러싼 마찰이 생기면서, 2010년 제18차 행사 때부터 중단돼 행낭에 의한 영상 배달 방식으로 바뀌었다.
방북 취재엔 항상 돌발 변수가 따른다. 그래서 방송사들은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지만, 예측 못 한 상황은 어김없이 발생한다. 이번같이 북측이 우리 측의 행낭을 보겠다고 요구한 것은 지난 19번의 행사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남한 언론 길들이기 차원의 북한의 의도된 방해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로의 불신과 오해에서 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다. 이해 부족이라는 간극을 메우려는 남북 양측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 외에도 종교·문화·체육 등의 분야에서 남북이 함께 하는 행사와 공동 취재 경험이 많아져야 상호 이해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북한의 방해와 돌발 변수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최근의 민간교류 활성화 움직임 속에 남북한 언론 교류와 방북 취재 기회도 확대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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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특보] 남북 이산가족 상봉 (2015.10.20.)
☞ [뉴스9] [심층취재]취재진 전면 철수…상봉 정상 진행(2006.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