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In] ⑦ 깎지도 않고 덜컥 100억…간송의 배포

입력 2016.09.06 (17:06) 수정 2016.09.0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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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막 서른을 넘겼을까 싶은 청년 앞에 고려청자가 놓여 있다.

이리저리 둘러본 청년은 아무 말 없이 커다란 가죽 가방을 내민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2만 원이오.”

지금의 가치로 보면 100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돈이다.

일본인 골동품상은 그 배포에 놀랄 따름이다.

전형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명품 청자라는 생각에 단 한 푼도 깎지 않았다.

이 청자가 국보 제68호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이하 사진들은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이하 사진들은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 “천 원을 달랍니다.”

거간꾼은 너무 많이 부른 것은 아닐까 하고 전형필의 얼굴을 살폈다.

전형필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귀한 보물은 집 한 채 값이 아니라 열 채 값이라도 부족합니다.”

천 원은 거간꾼의 사례비로 치르고 만 원을 더 내놓았다.

“훈민정음과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책을 받아 본 전형필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제70호)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제70호)

간송(澗松) 전형필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구입할 때는 돈을 깎지 않았다. 설사 물건을 파는 사람이 그 가치를 몰라서 싼값을 부른 경우에도 제값을 주고 샀다.

귀한 것을 귀하게 대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구하면 앞 다퉈 그에게 가져왔다.

그렇게 해서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들은 물론 고려와 조선시대의 뛰어난 자기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간송 전형필간송 전형필

1906년 서울 종로에서 미곡상을 하던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간송은 젊은 시절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유산만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조선 최고 갑부 중의 한명이었을 간송은 재물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춘곡 고희동과 위창 오세창과의 만남이 그의 운명을 바꾼다.

휘문고보 시절 스승인 고희동은 책읽기와 장서 수집을 즐기던 간송에게 글을 읽는 선비가 아니라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가 될 것을 권한다.

이후 간송은 독립 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오세창을 만나 본격적으로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문화재 수집은 재산과 안목만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었다. 배포와 용기가 필요했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의 경우가 그러했다.

조선어 교육 금지령 등 문화말살 정책을 폈던 1940년대 초는 훈민정음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만약 해례본 보유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간송은 비록 총은 들지 않았지만 우리 문화유산 수호를 통해 독립 운동을 펼친 것이다.

보화각 (현 간송미술관, 서울 성북동)보화각 (현 간송미술관, 서울 성북동)

간송은 반드시 조국이 해방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하곤 했다.

“기필코 이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내 모든 것을 바쳐 지켜 내리라. 이것이 금생에 내게 맡겨진 의무이다.”

1932년 간송은 고서점인 한남서림을 인수해 고서화를 모으는 등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나선다. 이후 그의 나이 32살 때인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세워 수집품들을 보관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국보 제72호), 김홍도의 황묘농접,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제294호), 신윤복의 단오풍정(국보 제135호)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국보 제72호), 김홍도의 황묘농접,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제294호), 신윤복의 단오풍정(국보 제135호)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만 해도 12점, 보물은 10점에 이른다.

간송은 광복 이후 자신이 모은 문화재를 바탕으로 왜곡되고 단절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밝히는 작업을 진행한다.

조선 후기 문화의 절정기인 진경 시대를 살펴봄으로써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한글의 과학성을 알렸다.

이렇듯 그가 지켜낸 것은 그저 예술품이 아닌 우리의 민족문화, 민족혼이었다.

왼쪽부터 간송의 장남인 전성우, 차남 전영우, 손자 전인건왼쪽부터 간송의 장남인 전성우, 차남 전영우, 손자 전인건

간송의 유지가 잘 받들어진 데는 후손들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간송이 급성 신우염으로 유명을 달리할 당시 장남인 전성우는 미국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꿈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부친의 뜻을 이었다.

1966년 동생인 전영우와 함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세워 수집품을 상세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1년부터는 그 전까지 개방하지 않았던 간송미술관을 외부에 개방했다. 단 일 년에 두 차례 무료 전시회를 통해서이다.

간송문화전 (201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간송문화전 (201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이런 간송미술관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건 간송의 큰 손자인 전인건이다.

간송미술관을 벗어나 외부에서 소장품을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드디어 2014년 전시 공간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옮겼다. 80년 가깝게 걸어 둔 빗장을 푼 것이다.

광복 70주년인 지난해에는 할아버지가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을 원본대로 재현해 복간했다. 한지의 촉감을 살리면서 오염된 부분까지도 살려 제작한 것이다. 실제 해례본을 보는 듯하다.

손자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미국에서는 독립선언문 사본을 거실에 걸어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독일에서는 금속 활자본인 구텐베르크 성경 사본을 소장하는 사람도 있죠. 훈민정음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정신이 온전히 집결된 문화재가 아닙니까? 국민들이 옆에 두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자주 접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창원의 ‘간송의 기억’ (간송 탄생 110주년 기념전, 9월 10일~10월 23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창원의 ‘간송의 기억’ (간송 탄생 110주년 기념전, 9월 10일~10월 23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올해는 간송 전형필이 태어난 지 11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젊은 작가 33명이 전시회를 마련했다.

9월 10일부터 시작되는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OLD & NEW - 法古創新」이다. 우리 문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조상들의 작품을 현대적 기법으로 표현해 내며, 간송의 유훈을 기리는 내용이다.

젊은 작가들은 간송의 삶과 업적을 설치 작품과 회화, 영상 등 다양한 장르로 재해석해 소개한다.

유승호,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코디 최, VIRTUE714. 이세현, Between Red-016JUL01. 정주영, 인왕산 No.8-1.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유승호,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코디 최, VIRTUE714. 이세현, Between Red-016JUL01. 정주영, 인왕산 No.8-1.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는 고미술품 두 점도 함께 출품된다. 겸재 정선의 ‘풍악내산총람’과 ‘통천문암’이다.

두 작품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 정선의 대표작이다. 겸재 정선은 간송이 수집 대상으로 가장 먼저 생각했던 화가이기도 하다.

왼쪽이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覽; 정선, 견본채색), 오른쪽은 ‘통천문암’(通天門岩; 정선, 지목수묵)왼쪽이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覽; 정선, 견본채색), 오른쪽은 ‘통천문암’(通天門岩; 정선, 지목수묵)

간송은 평소 우수한 예술품일수록 그 시대와 문화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 준다며 이 시대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나의 것’에 대한 근본이 무엇인지 자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점에서 전시 제목 「OLD & NEW - 法古創新」이 갖는 의미를 반추해 볼 수 있다.

옛 것을 본받아 새 것을 만드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이것이야말로 선조들이 낳은 불후의 명작을 목숨 걸고 지켜낸 문화적 의인(義人)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문화人·In]
☞ ⑥ “꿈이로구나”…‘몽유도원도’와 안평대군
☞ ⑤ ‘브로드웨이 朴’의 세상에 없는 무대
☞ ④ 잃어버린 언어를 그리는 ‘무진기행’ 김승옥
☞ ③ 아코디언 전설이 된 ‘대통령의 악사’
☞ ② 신명나게 ‘현실’을 비판한 작가, 오윤
☞ ① “서화에 생명 불어넣은 50년,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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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人·In] ⑦ 깎지도 않고 덜컥 100억…간송의 배포
    • 입력 2016-09-06 17:06:31
    • 수정2016-09-06 22:49:25
    취재K
# 이제 막 서른을 넘겼을까 싶은 청년 앞에 고려청자가 놓여 있다.

이리저리 둘러본 청년은 아무 말 없이 커다란 가죽 가방을 내민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2만 원이오.”

지금의 가치로 보면 100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돈이다.

일본인 골동품상은 그 배포에 놀랄 따름이다.

전형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명품 청자라는 생각에 단 한 푼도 깎지 않았다.

이 청자가 국보 제68호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이하 사진들은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 “천 원을 달랍니다.”

거간꾼은 너무 많이 부른 것은 아닐까 하고 전형필의 얼굴을 살폈다.

전형필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귀한 보물은 집 한 채 값이 아니라 열 채 값이라도 부족합니다.”

천 원은 거간꾼의 사례비로 치르고 만 원을 더 내놓았다.

“훈민정음과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책을 받아 본 전형필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제70호)
간송(澗松) 전형필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구입할 때는 돈을 깎지 않았다. 설사 물건을 파는 사람이 그 가치를 몰라서 싼값을 부른 경우에도 제값을 주고 샀다.

귀한 것을 귀하게 대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구하면 앞 다퉈 그에게 가져왔다.

그렇게 해서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들은 물론 고려와 조선시대의 뛰어난 자기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간송 전형필
1906년 서울 종로에서 미곡상을 하던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간송은 젊은 시절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유산만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조선 최고 갑부 중의 한명이었을 간송은 재물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춘곡 고희동과 위창 오세창과의 만남이 그의 운명을 바꾼다.

휘문고보 시절 스승인 고희동은 책읽기와 장서 수집을 즐기던 간송에게 글을 읽는 선비가 아니라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가 될 것을 권한다.

이후 간송은 독립 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오세창을 만나 본격적으로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문화재 수집은 재산과 안목만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었다. 배포와 용기가 필요했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의 경우가 그러했다.

조선어 교육 금지령 등 문화말살 정책을 폈던 1940년대 초는 훈민정음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만약 해례본 보유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간송은 비록 총은 들지 않았지만 우리 문화유산 수호를 통해 독립 운동을 펼친 것이다.

보화각 (현 간송미술관, 서울 성북동)
간송은 반드시 조국이 해방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하곤 했다.

“기필코 이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내 모든 것을 바쳐 지켜 내리라. 이것이 금생에 내게 맡겨진 의무이다.”

1932년 간송은 고서점인 한남서림을 인수해 고서화를 모으는 등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나선다. 이후 그의 나이 32살 때인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세워 수집품들을 보관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국보 제72호), 김홍도의 황묘농접,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제294호), 신윤복의 단오풍정(국보 제135호)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만 해도 12점, 보물은 10점에 이른다.

간송은 광복 이후 자신이 모은 문화재를 바탕으로 왜곡되고 단절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밝히는 작업을 진행한다.

조선 후기 문화의 절정기인 진경 시대를 살펴봄으로써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한글의 과학성을 알렸다.

이렇듯 그가 지켜낸 것은 그저 예술품이 아닌 우리의 민족문화, 민족혼이었다.

왼쪽부터 간송의 장남인 전성우, 차남 전영우, 손자 전인건
간송의 유지가 잘 받들어진 데는 후손들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간송이 급성 신우염으로 유명을 달리할 당시 장남인 전성우는 미국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꿈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부친의 뜻을 이었다.

1966년 동생인 전영우와 함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세워 수집품을 상세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1년부터는 그 전까지 개방하지 않았던 간송미술관을 외부에 개방했다. 단 일 년에 두 차례 무료 전시회를 통해서이다.

간송문화전 (201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이런 간송미술관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건 간송의 큰 손자인 전인건이다.

간송미술관을 벗어나 외부에서 소장품을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드디어 2014년 전시 공간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옮겼다. 80년 가깝게 걸어 둔 빗장을 푼 것이다.

광복 70주년인 지난해에는 할아버지가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을 원본대로 재현해 복간했다. 한지의 촉감을 살리면서 오염된 부분까지도 살려 제작한 것이다. 실제 해례본을 보는 듯하다.

손자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미국에서는 독립선언문 사본을 거실에 걸어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독일에서는 금속 활자본인 구텐베르크 성경 사본을 소장하는 사람도 있죠. 훈민정음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정신이 온전히 집결된 문화재가 아닙니까? 국민들이 옆에 두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자주 접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창원의 ‘간송의 기억’ (간송 탄생 110주년 기념전, 9월 10일~10월 23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올해는 간송 전형필이 태어난 지 11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젊은 작가 33명이 전시회를 마련했다.

9월 10일부터 시작되는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OLD & NEW - 法古創新」이다. 우리 문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조상들의 작품을 현대적 기법으로 표현해 내며, 간송의 유훈을 기리는 내용이다.

젊은 작가들은 간송의 삶과 업적을 설치 작품과 회화, 영상 등 다양한 장르로 재해석해 소개한다.

유승호,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코디 최, VIRTUE714. 이세현, Between Red-016JUL01. 정주영, 인왕산 No.8-1.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는 고미술품 두 점도 함께 출품된다. 겸재 정선의 ‘풍악내산총람’과 ‘통천문암’이다.

두 작품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 정선의 대표작이다. 겸재 정선은 간송이 수집 대상으로 가장 먼저 생각했던 화가이기도 하다.

왼쪽이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覽; 정선, 견본채색), 오른쪽은 ‘통천문암’(通天門岩; 정선, 지목수묵)
간송은 평소 우수한 예술품일수록 그 시대와 문화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 준다며 이 시대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나의 것’에 대한 근본이 무엇인지 자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점에서 전시 제목 「OLD & NEW - 法古創新」이 갖는 의미를 반추해 볼 수 있다.

옛 것을 본받아 새 것을 만드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이것이야말로 선조들이 낳은 불후의 명작을 목숨 걸고 지켜낸 문화적 의인(義人)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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