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성사된 클린턴 방북

입력 2009.08.04 (15:09)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4일 북한 방문은 2000년 미완으로 끝났던 방북계획을 마침내 실현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클린턴 방북 카드'가 검토된 것은 남북관계가 획기적 전환점을 맞았던 시기인 2000년 10월이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완연해진 한반도 해빙무드 속에서 미국은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는 대가로 북한과의 수교를 추진하기로 방향을 잡았고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은 이를 완성하는 일종의 `화룡점정' 카드로 여겨졌다.
그해 10월13일 북한의 2인자인 조명록 차수가 북한군 정복차림으로 클린턴 대통령을 공식 예방했고 이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공동성명을 채택해 ▲상호 적대시 정책 배제 ▲상호주권 존중 ▲무력 불사용 ▲내정 불간섭 원칙에 대해 합의를 이뤘다.
이어 10월23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사전 조율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하면서 북.미관계는 그야말로 수교직전까지 다다른 듯한 느낌이었다.
당시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의 11월 방북을 통해 북.미 수교를 단행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1998년 대포동1호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미국 본토의 안보에 현실적 위협으로 부상한 북핵 및 미사일 문제를 임기 내에 어떤 식으로든 매듭짓겠다는 클린턴 행정부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중동평화협상과 관련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의 회담이 발등의 불이 되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문제는 후순위로 밀려났다. 여기에 대북 강경론을 폈던 미국 공화당이 반대하고 북한까지 비타협적 자세로 나오면서 수교협상은 결국 결렬됐고 클린턴 방북 카드도 `없던 일'이 됐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안도 제시했으나 이 역시 김정일 위원장의 불응으로 무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일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성사됐다면 북핵 및 미사일 문제와 북.미수교를 일괄타결지음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큰 획을 그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게 외교 전문가들의 얘기다.
클린턴 대통령은 앞서 1999년 북한의 핵과 미사일문제를 '경제제재 해제'와 '북.미관계 정상화'로 푸는 포괄적 접근법인 `페리 프로세스'를 채택했었기 때문이다.
클린턴 방북 카드 무산에 이어 2000년 11월 민주당의 앨 고어 부통령이 대선에서 패배하고 공화당의 조지 부시 행정부가 등장함에 따라 북핵 및 미사일 문제는 다시금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클린턴 전 대통령은 한 두차례 개인자격의 방문을 희망한 적이 있으나 당시 행정부측이 난색을 표했다는 후문이다.
외교가에서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번 방북이 9년만에 실현된 것이라는 의미를 넘어 북핵과 북.미관계 정상화 문제를 동시에 푸는 포괄적 접근법이 다시금 북핵 논의의 테이블에 오르는 모멘텀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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