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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④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면 진다는데…
입력 2019.09.07 (07:01) 수정 2019.09.08 (07:11) 취재K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할 때 그것을 인지한 대한제국은 분쟁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그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영훈 외, 대일 종족주의 169~170페이지)

이영훈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 독도에 관해 우리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취지로 들립니다. 그럴까요.

진짜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가면 우리가 질까요. 이 교수의 이런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 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우리 영토이고, 우리가 70년 가까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우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ICJ 재판관들에게 가져갈 이유는 '1' 도 없습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반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①말 바꾼 일본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크게 두 가지 논리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나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자국의 고유 영토였다는 주장, 그리고 독도가 무주지(無主地)였다는 주장입니다. 이 모순되는 두 주장을 일본은 필요에 따라 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독도(일본식 사서에는 송도로 불림)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일본 사서의 기록들이 많이 발견되자 독도가 무주지였다는 논리를 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독도 무주지론은 일본이 매우 정교하게 논리를 개발해 놨기 때문에 저들의 주장을 제대로 파악해서 대응해야 합니다.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편입 당시 한일 양국 어느 나라도 역사적으로 독도를 영유하지 않았고, 선점 또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도는 국제법상 무주지였다. 이러한 무주지에 일본인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란 어부가 어업을 했고, 그러한 '현실의 점령'을 국가가 추인했으니 국제법상 선점(先占)의 방식에 의한 영토 편입에 해당한다"

1900년대 초에 일본 어부들이 독도에서 조업하고 있는 모습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수집 자료) 1900년대 초에 일본 어부들이 독도에서 조업하고 있는 모습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수집 자료)

②나카이 요사부로의 어로 활동

그런데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부 한 명이 독도에서 어로 활동을 했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사실일까요. 그 어로 활동이라는 것이 독도를 주 근거지로 삼아 이뤄진 것이었을까요.

그렇게 보기도 어렵습니다. 1902~1903년 당시 일본 자료들을 보면 독도 출어는 사실상 울릉도를 근거로 이뤄지던 것이었습니다. 1902년 울릉도에 주재하던 일본 경찰의 보고 내용은 이렇습니다.

"울릉도의 정동쪽 약 50해리에 소삼도(우리나라의 독도를 지칭)가 있는데, 속칭 량코도라고도 하고, 송도라고도 한다. 전복 채취를 위해 울릉도에서 이 섬으로 출어하는 자가 있지만, 이곳에는 음료수가 부족해 오래 출어할 수 없어 4~5일 경과하면 울릉도로 귀항한다" (「明治 35년 鬱陵島狀況, 부산영사관보고서, 일본외교사료관 소장」내용으로 「허영란, 독도 영유권 문제의 성격과 주요 쟁점」에서 재인용)

즉 이 기록을 보면 일본이 내세우는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부의 독도 어로 행위가 독자성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물이 없고 사람이 살기 어려운 독도의 환경, 그렇기 때문에 독도 출어가 울릉도를 근거지로 이뤄졌음을 이 문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울릉도를 근거지로 이뤄진 독도 출어는, 일본인 나카이 요사부로만 했을까요. 조선 어부들은 안 했을까요. 일본의 독도 선점 주장은 그래서 터무니없습니다.

③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독도에 대한 관심은 없었던 일본이 독도에 주목한 것은 러일전쟁이 계기가 됐습니다. 군사적 활용 목적이 컸죠.

독도에 주목한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각의)에서 량코도를 죽도라 명명하며 시마네현(島根縣)에 소속시키자는 내무성의 건의를 승인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도(隱岐島)에서 서북리로 85리 떨어져 있는 이 무인도는 타국이 점령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고.......일본인 나카이 요사부로가 이 섬에 이주해 어업에 종사한 사실은 관계 서류에 의해 명백하므로 국제법상 점령의 사실이 있다고 인정하고 일본 소속으로 정한다"

1946년 1월29일자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 677호. 독도를 ‘TAKE’로 표시하고 한국 관할로 표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외교부)1946년 1월29일자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 677호. 독도를 ‘TAKE’로 표시하고 한국 관할로 표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외교부)

④ 일본 각의 결정은 무효

2019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바로 이 고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각의 결정은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게 많은 학자의 지적입니다.

우선 독도라 무주지라는 기본 전제부터 틀렸습니다. 앞 편에서 설명해 드렸듯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조선의 땅이라는 인식이 양국 간에 있었습니다.

조선 어부 안용복이 "너희들이 송도(지금의 독도)라 부른 것은 우리나라의 우산도"라고 외친 이후 일본의 많은 고문서와 지도들이 송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1868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뒤 일본의 태정관은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확인했고, 이를 훈령 문서로도 작성했습니다. 독도는 무주지가 아닌 울릉도 부속도서라는 점은 더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게다가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의 관할 범위를 명시하는데, 시리즈 2편에서 언급했듯이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로 정했습니다. 방언 연구를 기초로 대한제국 칙령 41호에 '석도'를 독도를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근거 자료들이 향토 사가들에 의해 축적된 상태입니다.

('석도=독도'라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자 최근에 일본은 대한제국 칙령이 독도를 관할구역으로 규정했다 하더라도 이 사실만으로 국제법상 한국의 영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즉 칙령을 공포했어도 칙령 전후에 한국정부나 한국인이 그 섬을 점유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영토로 볼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한국 외교부가 만든 독도 관련 자료한국 외교부가 만든 독도 관련 자료

1905년 일본 각의 결정은 형식 면에서도 황당합니다. 분쟁의 소지가 큰 섬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중요한 결정을 지방의 고시(告示)로 처리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관보에도 게재하지 않았고, 현지 중앙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국제법적으로도 영토 문제를, 인접한 이해 당사국인 대한제국에 정식으로 통보도 해주지 않은 것은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행위였습니다.

독도에 설치된 접안시설(왼쪽)과 주민숙소 (사진 출처 : 연합뉴스)독도에 설치된 접안시설(왼쪽)과 주민숙소 (사진 출처 : 연합뉴스)

⑤카이로선언과 포츠담 선언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일본 시마네현의 고시가 있었던 1년 뒤인 1906년 3월에서야 대한제국은 일본이 독도를 영토 선언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에 놀란 울도군수 심흥택은 이 사실을 중앙 정부에 보고했고, 정부는 항의 문서까지 작성했지만 이미 외교권을 빼앗긴 탓에 발송하지 못합니다.

외교권까지 빼앗은 나라의 팔을 비틀어 일본은 독도를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 나온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 대해 '폭력 및 탐욕에 의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독도도 다시 한국에 되돌려줘야 했고, 이런 원칙은 1946년 1월 29일 자 연합국 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에도 명기됩니다. 여기에는 '울릉도, Liancourt Rocks(Take Island), 제주도'를 분명히 적시해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2일 자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1033호에서는 일본의 선박과 승무원의 Liancourt Rocks 12해리 이내 접근을 금지했습니다.

물론 1951년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아쉬운 건 사실입니다.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① 우산도는 단순한 허상일까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② 어부 안용복, 뭘 남겼나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③ 울도군수 심흥택의 다급한 보고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④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면 진다는데…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⑤ 이승만, 김대중, 이명박의 독도는…
  •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④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면 진다는데…
    • 입력 2019-09-07 07:01:18
    • 수정2019-09-08 07:11:25
    취재K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할 때 그것을 인지한 대한제국은 분쟁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그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영훈 외, 대일 종족주의 169~170페이지)

이영훈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 독도에 관해 우리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취지로 들립니다. 그럴까요.

진짜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가면 우리가 질까요. 이 교수의 이런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 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우리 영토이고, 우리가 70년 가까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우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ICJ 재판관들에게 가져갈 이유는 '1' 도 없습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반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①말 바꾼 일본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크게 두 가지 논리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나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자국의 고유 영토였다는 주장, 그리고 독도가 무주지(無主地)였다는 주장입니다. 이 모순되는 두 주장을 일본은 필요에 따라 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독도(일본식 사서에는 송도로 불림)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일본 사서의 기록들이 많이 발견되자 독도가 무주지였다는 논리를 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독도 무주지론은 일본이 매우 정교하게 논리를 개발해 놨기 때문에 저들의 주장을 제대로 파악해서 대응해야 합니다.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편입 당시 한일 양국 어느 나라도 역사적으로 독도를 영유하지 않았고, 선점 또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도는 국제법상 무주지였다. 이러한 무주지에 일본인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란 어부가 어업을 했고, 그러한 '현실의 점령'을 국가가 추인했으니 국제법상 선점(先占)의 방식에 의한 영토 편입에 해당한다"

1900년대 초에 일본 어부들이 독도에서 조업하고 있는 모습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수집 자료) 1900년대 초에 일본 어부들이 독도에서 조업하고 있는 모습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수집 자료)

②나카이 요사부로의 어로 활동

그런데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부 한 명이 독도에서 어로 활동을 했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사실일까요. 그 어로 활동이라는 것이 독도를 주 근거지로 삼아 이뤄진 것이었을까요.

그렇게 보기도 어렵습니다. 1902~1903년 당시 일본 자료들을 보면 독도 출어는 사실상 울릉도를 근거로 이뤄지던 것이었습니다. 1902년 울릉도에 주재하던 일본 경찰의 보고 내용은 이렇습니다.

"울릉도의 정동쪽 약 50해리에 소삼도(우리나라의 독도를 지칭)가 있는데, 속칭 량코도라고도 하고, 송도라고도 한다. 전복 채취를 위해 울릉도에서 이 섬으로 출어하는 자가 있지만, 이곳에는 음료수가 부족해 오래 출어할 수 없어 4~5일 경과하면 울릉도로 귀항한다" (「明治 35년 鬱陵島狀況, 부산영사관보고서, 일본외교사료관 소장」내용으로 「허영란, 독도 영유권 문제의 성격과 주요 쟁점」에서 재인용)

즉 이 기록을 보면 일본이 내세우는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부의 독도 어로 행위가 독자성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물이 없고 사람이 살기 어려운 독도의 환경, 그렇기 때문에 독도 출어가 울릉도를 근거지로 이뤄졌음을 이 문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울릉도를 근거지로 이뤄진 독도 출어는, 일본인 나카이 요사부로만 했을까요. 조선 어부들은 안 했을까요. 일본의 독도 선점 주장은 그래서 터무니없습니다.

③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독도에 대한 관심은 없었던 일본이 독도에 주목한 것은 러일전쟁이 계기가 됐습니다. 군사적 활용 목적이 컸죠.

독도에 주목한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각의)에서 량코도를 죽도라 명명하며 시마네현(島根縣)에 소속시키자는 내무성의 건의를 승인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도(隱岐島)에서 서북리로 85리 떨어져 있는 이 무인도는 타국이 점령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고.......일본인 나카이 요사부로가 이 섬에 이주해 어업에 종사한 사실은 관계 서류에 의해 명백하므로 국제법상 점령의 사실이 있다고 인정하고 일본 소속으로 정한다"

1946년 1월29일자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 677호. 독도를 ‘TAKE’로 표시하고 한국 관할로 표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외교부)1946년 1월29일자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 677호. 독도를 ‘TAKE’로 표시하고 한국 관할로 표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외교부)

④ 일본 각의 결정은 무효

2019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바로 이 고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각의 결정은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게 많은 학자의 지적입니다.

우선 독도라 무주지라는 기본 전제부터 틀렸습니다. 앞 편에서 설명해 드렸듯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조선의 땅이라는 인식이 양국 간에 있었습니다.

조선 어부 안용복이 "너희들이 송도(지금의 독도)라 부른 것은 우리나라의 우산도"라고 외친 이후 일본의 많은 고문서와 지도들이 송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1868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뒤 일본의 태정관은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확인했고, 이를 훈령 문서로도 작성했습니다. 독도는 무주지가 아닌 울릉도 부속도서라는 점은 더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게다가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의 관할 범위를 명시하는데, 시리즈 2편에서 언급했듯이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로 정했습니다. 방언 연구를 기초로 대한제국 칙령 41호에 '석도'를 독도를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근거 자료들이 향토 사가들에 의해 축적된 상태입니다.

('석도=독도'라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자 최근에 일본은 대한제국 칙령이 독도를 관할구역으로 규정했다 하더라도 이 사실만으로 국제법상 한국의 영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즉 칙령을 공포했어도 칙령 전후에 한국정부나 한국인이 그 섬을 점유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영토로 볼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한국 외교부가 만든 독도 관련 자료한국 외교부가 만든 독도 관련 자료

1905년 일본 각의 결정은 형식 면에서도 황당합니다. 분쟁의 소지가 큰 섬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중요한 결정을 지방의 고시(告示)로 처리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관보에도 게재하지 않았고, 현지 중앙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국제법적으로도 영토 문제를, 인접한 이해 당사국인 대한제국에 정식으로 통보도 해주지 않은 것은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행위였습니다.

독도에 설치된 접안시설(왼쪽)과 주민숙소 (사진 출처 : 연합뉴스)독도에 설치된 접안시설(왼쪽)과 주민숙소 (사진 출처 : 연합뉴스)

⑤카이로선언과 포츠담 선언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일본 시마네현의 고시가 있었던 1년 뒤인 1906년 3월에서야 대한제국은 일본이 독도를 영토 선언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에 놀란 울도군수 심흥택은 이 사실을 중앙 정부에 보고했고, 정부는 항의 문서까지 작성했지만 이미 외교권을 빼앗긴 탓에 발송하지 못합니다.

외교권까지 빼앗은 나라의 팔을 비틀어 일본은 독도를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 나온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 대해 '폭력 및 탐욕에 의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독도도 다시 한국에 되돌려줘야 했고, 이런 원칙은 1946년 1월 29일 자 연합국 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에도 명기됩니다. 여기에는 '울릉도, Liancourt Rocks(Take Island), 제주도'를 분명히 적시해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2일 자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1033호에서는 일본의 선박과 승무원의 Liancourt Rocks 12해리 이내 접근을 금지했습니다.

물론 1951년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아쉬운 건 사실입니다.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① 우산도는 단순한 허상일까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② 어부 안용복, 뭘 남겼나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③ 울도군수 심흥택의 다급한 보고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④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면 진다는데…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⑤ 이승만, 김대중, 이명박의 독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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