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난 생존자’입니다…재난 이후 멈춰버린 시간

입력 2021.06.25 (07:00) 수정 2021.07.0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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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침수로 가족을 잃은 김영일 씨.지난해 7월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침수로 가족을 잃은 김영일 씨.

저는 재난방송 주관방송사인 KBS의 기상전문기자입니다. 해마다 장마와 태풍, 집중호우 등 재난들을 취재해왔지만, 특히 지난해에는 긴 장마와 연이은 태풍으로 피해가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호우와 태풍으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46명으로, 최근 10년간 평균보다 3배 이상 많았습니다. 또 2010년 이후 재해로 인한 인명 피해는 최근 3년 사이에 절반 이상 집중됐는데요.

일상이 된 재난 속에 누구나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기상전문기자가 만난 '재난 생존자'…재난 이후 삶은?

어느 가족은 세상 어느 곳보다 따스한 집에서 잠을 자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평소 이용하던 익숙한 지하차도와 하천변 산책길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아파트 현관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지난 여름 스튜디오에서 재난 뉴스를 전하면서 저는 수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벌써 1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재난으로 가족을 잃었거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재난 생존자'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직접 찾아가 이들을 만났습니다.

■ '호우경보'에도 '차량 통제' 없었던 초량 지하차도

지난해 7월 23일. 부산 지역은 오후 2시부터 호우주의보가 내려졌습니다. 오후 8시에는 호우주의보가 호우경보로 강화됐습니다. 시간당 87m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폭우가 퍼부었고, 도로 곳곳이 침수됐습니다.

하지만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는 진입이 통제되지 않았습니다. ' 침수위험 2등급'으로 지정돼있어 호우경보가 내려지면 바로 차량 통제가 이뤄져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날 밤 이 초량 제1지하차도에 엄마와 딸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들어섰습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딸을 부산역에서 마중해 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지난해 사고 직후의 모습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지난해 사고 직후의 모습
지하차도가 물에 잠기기 시작한 시각은 오후 9시 43분부터였습니다. 모녀가 탄 차는 하필 이때, 캄캄한 지하차도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 "부산 시내에서 물에 빠져죽었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저지대인데다가 배수펌프도 제 역할을 못 하면서 지하차도의 수위는 침수가 시작된지 불과 35분만에 2.5m까지 차올랐습니다. 성인의 키를 뛰어넘고 수영장보다도 깊었습니다.

거센 물살은 결국 엄마와 딸을 영영 갈라놓았습니다. 딸을 잃은 엄마는 지금까지 하루하루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누나 대신 인터뷰에 응한 외삼촌 김영일 씨는 차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 날의 영상이 담긴 블랙박스를
뉴스에 써 달라며 취재진에게 제공했습니다. 더이상 유가족과 재난생존자들이 고통당하지 않게, 제대로 바뀔 수 있도록 알려달라는 뜻에서입니다.

"부산 시내에서 그런 고통을 왜 당해야 합니까? 2014년 우장춘로 지하차도에서도 2명이 죽었는데 하루이틀된 도시도 아니고 그 정도 인프라도 안 됩니까? 저도 부산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지만 부산 시내에서 물에 빠져죽었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는 깊어지기만…

지난해 7월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침수로 가족을 잃은 조일환 씨.지난해 7월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침수로 가족을 잃은 조일환 씨.

같은 시각 지하차도에는 조일환 씨의 형도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한 번도 떨어져본 적 없는 형은 아버지 같고 친구 같던 존재였습니다. 그날 형은 딸을 만나러 집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여군 부사관으로 가서 첫 휴가를 나온 막내딸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하지만 형은 결국 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슬픔을 말로 표현한다는 게 이해가 되십니까. 무슨 단어를 써야지 슬픔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그런데 모친이나 형수, 조카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상처가 아문다는 게 1, 2년 지나서 아물어지면 다행이겠지만 더 깊어지는 거 같아요."



■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 걸까"

재난 생존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슬픔과 그리움만이 아니었습니다. 사고 다음날 진영 행안부 장관이 초량 지하차도를 찾았습니다. 사고의 재발 방지를 약속한 이 자리에 당시 변성완 부산시 권한대행과 최형욱 부산 동구청장 등이 모두 동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유가족을 찾지 않았고 이후에도 만남을 피했습니다. 어렵게 만난 자리에서도 내용을 보고 받았다거나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켜보자는 공식적인 답변만 되풀이됐습니다.

조일환 씨는 "믿었던 정부지만 일이 터지자 우리를 적으로 돌리고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그날 밤 사고는 인재임이 명백한데도 책임 져야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고 유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도 없었습니다.


■ 재난 이후 멈춰버린 '재난 생존자'들의 시간

결국 재난 생존자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뿐만 아니라 국가의 책임을 입증하기 위한 소송까지 힘겹게 이어가야 했습니다. 100년 빈도를 뛰어넘는 폭우 같은 천재지변의 경우 국가의 배상 책임이 면제됩니다.

그러나 기후위기로 극한 강수가 잦아지고 있는 지금, 날씨 탓만 할 수 있을까요. 모든 재난 생존자들이 법정에 설 때까지 국가가 방치해도 되는 걸까요.

조일환 씨는 " 유가족 입장에서 매일매일이 사고가 발생한 7월 23일 그날에 멈춰있다"며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유대인 화학자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유작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다. 트라우마를 회상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상처를 받은 사람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기억을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희생자는 고통 속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 상처는 치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오늘(25일) 9시 뉴스에 방송될 예정입니다. 또 이어지는 디지털 기사에서 '재난 생존자들의 시간'에 대해 깊이 있게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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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재난 생존자’입니다…재난 이후 멈춰버린 시간
    • 입력 2021-06-25 07:00:21
    • 수정2021-07-02 11:32:17
    취재K
지난해 7월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침수로 가족을 잃은 김영일 씨.
저는 재난방송 주관방송사인 KBS의 기상전문기자입니다. 해마다 장마와 태풍, 집중호우 등 재난들을 취재해왔지만, 특히 지난해에는 긴 장마와 연이은 태풍으로 피해가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호우와 태풍으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46명으로, 최근 10년간 평균보다 3배 이상 많았습니다. 또 2010년 이후 재해로 인한 인명 피해는 최근 3년 사이에 절반 이상 집중됐는데요.

일상이 된 재난 속에 누구나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기상전문기자가 만난 '재난 생존자'…재난 이후 삶은?

어느 가족은 세상 어느 곳보다 따스한 집에서 잠을 자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평소 이용하던 익숙한 지하차도와 하천변 산책길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아파트 현관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지난 여름 스튜디오에서 재난 뉴스를 전하면서 저는 수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벌써 1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재난으로 가족을 잃었거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재난 생존자'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직접 찾아가 이들을 만났습니다.

■ '호우경보'에도 '차량 통제' 없었던 초량 지하차도

지난해 7월 23일. 부산 지역은 오후 2시부터 호우주의보가 내려졌습니다. 오후 8시에는 호우주의보가 호우경보로 강화됐습니다. 시간당 87m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폭우가 퍼부었고, 도로 곳곳이 침수됐습니다.

하지만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는 진입이 통제되지 않았습니다. ' 침수위험 2등급'으로 지정돼있어 호우경보가 내려지면 바로 차량 통제가 이뤄져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날 밤 이 초량 제1지하차도에 엄마와 딸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들어섰습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딸을 부산역에서 마중해 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지난해 사고 직후의 모습지하차도가 물에 잠기기 시작한 시각은 오후 9시 43분부터였습니다. 모녀가 탄 차는 하필 이때, 캄캄한 지하차도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 "부산 시내에서 물에 빠져죽었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저지대인데다가 배수펌프도 제 역할을 못 하면서 지하차도의 수위는 침수가 시작된지 불과 35분만에 2.5m까지 차올랐습니다. 성인의 키를 뛰어넘고 수영장보다도 깊었습니다.

거센 물살은 결국 엄마와 딸을 영영 갈라놓았습니다. 딸을 잃은 엄마는 지금까지 하루하루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누나 대신 인터뷰에 응한 외삼촌 김영일 씨는 차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 날의 영상이 담긴 블랙박스를
뉴스에 써 달라며 취재진에게 제공했습니다. 더이상 유가족과 재난생존자들이 고통당하지 않게, 제대로 바뀔 수 있도록 알려달라는 뜻에서입니다.

"부산 시내에서 그런 고통을 왜 당해야 합니까? 2014년 우장춘로 지하차도에서도 2명이 죽었는데 하루이틀된 도시도 아니고 그 정도 인프라도 안 됩니까? 저도 부산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지만 부산 시내에서 물에 빠져죽었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는 깊어지기만…

지난해 7월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침수로 가족을 잃은 조일환 씨.
같은 시각 지하차도에는 조일환 씨의 형도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한 번도 떨어져본 적 없는 형은 아버지 같고 친구 같던 존재였습니다. 그날 형은 딸을 만나러 집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여군 부사관으로 가서 첫 휴가를 나온 막내딸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하지만 형은 결국 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슬픔을 말로 표현한다는 게 이해가 되십니까. 무슨 단어를 써야지 슬픔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그런데 모친이나 형수, 조카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상처가 아문다는 게 1, 2년 지나서 아물어지면 다행이겠지만 더 깊어지는 거 같아요."



■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 걸까"

재난 생존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슬픔과 그리움만이 아니었습니다. 사고 다음날 진영 행안부 장관이 초량 지하차도를 찾았습니다. 사고의 재발 방지를 약속한 이 자리에 당시 변성완 부산시 권한대행과 최형욱 부산 동구청장 등이 모두 동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유가족을 찾지 않았고 이후에도 만남을 피했습니다. 어렵게 만난 자리에서도 내용을 보고 받았다거나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켜보자는 공식적인 답변만 되풀이됐습니다.

조일환 씨는 "믿었던 정부지만 일이 터지자 우리를 적으로 돌리고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그날 밤 사고는 인재임이 명백한데도 책임 져야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고 유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도 없었습니다.


■ 재난 이후 멈춰버린 '재난 생존자'들의 시간

결국 재난 생존자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뿐만 아니라 국가의 책임을 입증하기 위한 소송까지 힘겹게 이어가야 했습니다. 100년 빈도를 뛰어넘는 폭우 같은 천재지변의 경우 국가의 배상 책임이 면제됩니다.

그러나 기후위기로 극한 강수가 잦아지고 있는 지금, 날씨 탓만 할 수 있을까요. 모든 재난 생존자들이 법정에 설 때까지 국가가 방치해도 되는 걸까요.

조일환 씨는 " 유가족 입장에서 매일매일이 사고가 발생한 7월 23일 그날에 멈춰있다"며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유대인 화학자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유작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다. 트라우마를 회상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상처를 받은 사람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기억을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희생자는 고통 속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 상처는 치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오늘(25일) 9시 뉴스에 방송될 예정입니다. 또 이어지는 디지털 기사에서 '재난 생존자들의 시간'에 대해 깊이 있게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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