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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생존자]④ 자연재난 트라우마 ‘전쟁 공포’와 유사…고령층 특히 ‘위험’
입력 2021.07.01 (14:06) 수정 2021.07.02 (11:33) 취재K

올여름 장마가 이번 주말 시작해 초반부터 많은 비를 몰고 올 것으로 보입니다. 매년 여름 찾아오는 장마와 집중호우, 여기에 태풍은 가을까지 맹렬한 비바람을 몰고 오는데요. 우리나라 자연재해의 90% 이상은 태풍이나 홍수 같은 풍수해로 최근 피해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겪는 재난, 시간이 지나면 그 고통도 잊혀질 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 재난 생존자들의 목소리…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만…"

"비가 오면 물난리의 기억이 생생하게 나요. 가슴이 쿵덕거리고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손자도 비만 오면 겁이 나는지 학교에 가지도 못 해요. "
- 침수피해 70대 노부부

"지금도 비만 오면 배수로에 나가서 물이 잘 흘러가는지 살피게 돼요. 보상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 문제가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이웃도 못 믿겠어요."
- 홍수피해 50대 남성

"침수 피해를 입어도 보상은 거의 못 받았어요. 혼자 살고 있는데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나가지도 못하고 자식들과 연락을 못 한지 오래됐어요."
- 침수 피해 60대 여성

최근 수해를 입은 지역에서 심리 상담을 하면서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서적 패턴은 '무기력감'과 '희망 없음' '포기'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집중호우로 막대한 피해를 당한 주민들은 재난 이후에도 두려움과 고독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또 보상과 복구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갈등은 상처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 자연재난 트라우마, '전쟁 공포'와 유사?


매년 자연재난이 되풀이되고 생존자들은 고통에 시달리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이들의 심리적 후유증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연구들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나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태안 기름유출사고, 연평도 포격과 같은 인적 재난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재난 생존자들이 심리적 외상을 이겨내고 일상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연구와 치료가 시급한데요. 재연재난을 겪은 생존자들의 트라우마가 '전쟁'의 공포와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 강원도 수해 생존자 '무력감'과 '공포감', 연평도 주민과 비슷

지난 2006년 7월 중순 태풍 '에위니아'가 몰고 온 집중호우로 강원도 인제와 평창 등지에 폭우가 퍼부었습니다.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만 44명이었고 3,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2년 뒤 한림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피해 주민 148명을 대상으로 면담을 진행했습니다.

2013년 출판된 논문을 보면 '외상 경험자', 즉 '무력감'과 '극심한 공포감' 중 적어도 한 개에 '예'라고 대답한 주민들이 전체의 92.6%에 달했습니다. 연평도 포격 피해(2010년) 생존자들의 '외상 경험자' 비율(전체의 93.6%)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집중호우를 경험한 주민들 대다수가 '전쟁에 준하는' 재난을 겪은 연평도 주민들 못지 않게 극심한 공포와 무력감을 호소했다고 연구진은 설명합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피해를 당한 주택들2010년 연평도 포격 피해를 당한 주택들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수해를 입은 주민들이 느끼는 '사회적 지지 부족'입니다. 강원도 피해 주민들 가운데 사회적 지지가 부족하다고 답한 경우는 연평도보다 2배 이상 많았습니다. 수해 생존자들을 바라보고 보듬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되돌아보게 하는 부분입니다.

■ '재난 대비'와 '대피 어려움'…고령층 재난 트라우마 '위험'

여러 연구에서 자연재난을 겪은 뒤 트라우마에 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월수입과 사회·경제적 지위, 배우자와 동거 여부 등이 꼽혔습니다. 특히 농·어촌은 70대 이상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문제인데요.


고령층은 재난 대비와 대피가 어렵고 피해 이후 심리적 외상을 더 많이 경험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대피 경고 이후에도 집을 잘 떠나지 않고 복구 과정에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농업과 어업 등을 생계로 하고 있어 직업을 바꾸는 것이 힘들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좌절감 등 심리적 충격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실제 면담 결과에서도 알코올 남용과 충동적인 행동을 보이고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대책은?…"재난 초기부터 심리 상담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전문가들은 고령층을 포함한 재난 생존자들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돕기 위해서는 재난 발생 초기에 적극적으로 심리 상담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후 심리가 안정될 때까지 후유증을 예방하는 치료를 장기간 이어가야 하는데 아직 홍보도, 예산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자연재난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자신이 무능하다거나 불운하다는 생각, 타인에 대한 불신과 안전에 대한 부정적 신념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합니다. 재난의 기억은 시간이 지난다고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난이 일상이 된 지금, 유가족을 포함한 재난 생존자들의 불안과 우울, 그리고 트라우마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보상과 함께 사회적 지지와 치유의 과정이 함께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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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난생존자]④ 자연재난 트라우마 ‘전쟁 공포’와 유사…고령층 특히 ‘위험’
    • 입력 2021-07-01 14:06:55
    • 수정2021-07-02 11:33:20
    취재K

올여름 장마가 이번 주말 시작해 초반부터 많은 비를 몰고 올 것으로 보입니다. 매년 여름 찾아오는 장마와 집중호우, 여기에 태풍은 가을까지 맹렬한 비바람을 몰고 오는데요. 우리나라 자연재해의 90% 이상은 태풍이나 홍수 같은 풍수해로 최근 피해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겪는 재난, 시간이 지나면 그 고통도 잊혀질 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 재난 생존자들의 목소리…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만…"

"비가 오면 물난리의 기억이 생생하게 나요. 가슴이 쿵덕거리고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손자도 비만 오면 겁이 나는지 학교에 가지도 못 해요. "
- 침수피해 70대 노부부

"지금도 비만 오면 배수로에 나가서 물이 잘 흘러가는지 살피게 돼요. 보상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 문제가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이웃도 못 믿겠어요."
- 홍수피해 50대 남성

"침수 피해를 입어도 보상은 거의 못 받았어요. 혼자 살고 있는데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나가지도 못하고 자식들과 연락을 못 한지 오래됐어요."
- 침수 피해 60대 여성

최근 수해를 입은 지역에서 심리 상담을 하면서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서적 패턴은 '무기력감'과 '희망 없음' '포기'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집중호우로 막대한 피해를 당한 주민들은 재난 이후에도 두려움과 고독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또 보상과 복구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갈등은 상처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 자연재난 트라우마, '전쟁 공포'와 유사?


매년 자연재난이 되풀이되고 생존자들은 고통에 시달리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이들의 심리적 후유증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연구들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나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태안 기름유출사고, 연평도 포격과 같은 인적 재난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재난 생존자들이 심리적 외상을 이겨내고 일상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연구와 치료가 시급한데요. 재연재난을 겪은 생존자들의 트라우마가 '전쟁'의 공포와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 강원도 수해 생존자 '무력감'과 '공포감', 연평도 주민과 비슷

지난 2006년 7월 중순 태풍 '에위니아'가 몰고 온 집중호우로 강원도 인제와 평창 등지에 폭우가 퍼부었습니다.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만 44명이었고 3,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2년 뒤 한림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피해 주민 148명을 대상으로 면담을 진행했습니다.

2013년 출판된 논문을 보면 '외상 경험자', 즉 '무력감'과 '극심한 공포감' 중 적어도 한 개에 '예'라고 대답한 주민들이 전체의 92.6%에 달했습니다. 연평도 포격 피해(2010년) 생존자들의 '외상 경험자' 비율(전체의 93.6%)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집중호우를 경험한 주민들 대다수가 '전쟁에 준하는' 재난을 겪은 연평도 주민들 못지 않게 극심한 공포와 무력감을 호소했다고 연구진은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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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 대비'와 '대피 어려움'…고령층 재난 트라우마 '위험'

여러 연구에서 자연재난을 겪은 뒤 트라우마에 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월수입과 사회·경제적 지위, 배우자와 동거 여부 등이 꼽혔습니다. 특히 농·어촌은 70대 이상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문제인데요.


고령층은 재난 대비와 대피가 어렵고 피해 이후 심리적 외상을 더 많이 경험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대피 경고 이후에도 집을 잘 떠나지 않고 복구 과정에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농업과 어업 등을 생계로 하고 있어 직업을 바꾸는 것이 힘들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좌절감 등 심리적 충격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실제 면담 결과에서도 알코올 남용과 충동적인 행동을 보이고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대책은?…"재난 초기부터 심리 상담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전문가들은 고령층을 포함한 재난 생존자들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돕기 위해서는 재난 발생 초기에 적극적으로 심리 상담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후 심리가 안정될 때까지 후유증을 예방하는 치료를 장기간 이어가야 하는데 아직 홍보도, 예산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자연재난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자신이 무능하다거나 불운하다는 생각, 타인에 대한 불신과 안전에 대한 부정적 신념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합니다. 재난의 기억은 시간이 지난다고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난이 일상이 된 지금, 유가족을 포함한 재난 생존자들의 불안과 우울, 그리고 트라우마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보상과 함께 사회적 지지와 치유의 과정이 함께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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