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격차]④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배달 라이더 쉼터

입력 2022.07.26 (08:01) 수정 2022.07.26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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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2018년 폭염은 법적인 '자연 재난'이 됐습니다. 그러나 "여름은 원래 더운 것"이라는 가벼운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폭염 피해가 '특정 계층'에 집중된다는 점이 크게 작용합니다. KBS는 폭염에 무방비로 노출된 당사자들을 차례로 점검하고 해법을 고민해봅니다.


지난 7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구로구 일대에서 배달라이더 김정훈 씨를 만났습니다. 김 씨는 이날도 점심 '피크타임'을 앞두고 배달 준비에 한창이었습니다.

이날 첫 배달은 '아이스 커피'. 여름철 가장 많은 주문이 몰리는 종목입니다.

첫 배달을 마치고 운 좋게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번째 '콜'을 받았습니다. 가게 에어컨 바람을 얻어 쐬기도 잠시, 곧바로 나온 중국 음식을 들고 다시 뜁니다.


김정훈/배달 라이더
"아무래도 면 요리는 빨리 갖다주려고 하고요. 여름에는 커피가 생각보다 빨리 녹는 것 같아요."

서둘러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가장 더운 점심 시간대가 '피크 타임'이기 때문입니다. '피크 타임'엔 라이더들이 받는 돈이 더 큽니다. 그러니 서둘러야 합니다.


■ "버스 뒤 정차하면 '사막'같아"

배달 중에 가장 피하고 싶은 장소가 어디냐 물었습니다. '버스 뒤'라고 합니다. 달릴 때는 바람이라도 맞을 수 있죠. 차와 차 사이, 그것도 오토바이보다 덩치가 몇 배나 큰 대형버스 뒤에서 맞는 뜨거운 열기는 견디기 힘듭니다.

"버스 뒤에 있을 때는, 열기가 사막에 안 가봤지만 사막에 있는 느낌인 것 같아요."

취재팀은 김씨가 배달 4건을 하는 동안 동행했습니다. 좀 습하긴 해도 평소 대비 시원한 날씨였는데도 온몸이 땀에 젖었습니다.

그사이 김 씨의 체온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열화상 카메라에 확연히 나타났습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 라이더들은 어디서 쉬나요?

배달 중에 쉴 곳은 있을까. 김 씨 같은 이동노동자들을 위한 쉼터가 있기는 합니다.

김 씨가 주로 일하는 서울 구로구 일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봤습니다. 오토바이로 30분 정도 달리면 서울 강서구 마곡 일대에 쉼터 하나가 나옵니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곳입니다.


멀지만 쉼터를 가봤습니다. 쉼터 안에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루에 보통 4~5명 정도 온다고 합니다. 임시 건물이긴 하지만, 멀쩡히 에어컨과 냉장고까지 갖춰놨는데도 라이더들이 안 옵니다.

"이 근처에 배달상점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없다 보니까 '콜'이 별로 뜨지 않고요. 여기 와서 바로 콜 받아서 나가기에는 어려우니까..."

쉼터 위치가 라이더들 사이에서 이른바 '기피 지역'이었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주요 상권과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김 씨가 마곡 쉼터까지 왔다 가는데 왕복 1시간이 걸렸습니다. 누군들 올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곳은 사정이 좀 나을까. 그나마 유동인구가 많은 마포구 합정역 인근 쉼터로 가봤습니다. 시설은 훨씬 더 좋았습니다. 넓직한 공간에다가 에어컨과 생수·안마의자까지 잘 갖춰놨는데도 역시나 배달노동자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잘 살펴보니 당장 오토바이를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고, 쉼터 자체도 건물 5층까지 올라가야 했습니다.



■ 문제는 '접근성'

가장 큰 문제는 '접근성'입니다. 배달 라이더 근무 패턴과 쉼터의 배치가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일종의 '미스매치'입니다.

직접 쉼터를 운영하는 시민단체의 말을 들어볼까요.

이성종/ 서울노동권익센터 쉼터운영위원장

"위치의 문제, '접근성'이 떨어지는 쉼터는 배달노동자가 와서 쉬기 어렵고요. 두 번째는 라이더들이 수익과 직결된 주문을 빨리·많이 처리하기 위해서 루틴대로 쉬고 모임을 해서 쉼터까지 접근을 못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쉼터 자체가 크게 부족하기도 합니다.

서울시로부터 민간이 위탁받아 운영하는 이동노동자 쉼터는 모두 5곳입니다. 그중 3곳은 각각 '셔틀버스' '미디어' '대리운전' 종사자들에게 특화된 곳입니다. 라이더만을 위한 쉼터는 2곳입니다.


여기에 구청이 직영으로 운영하는 3곳을 더한다고 해도 5곳뿐입니다. 서울시 내 자치구가 25곳인데 말이죠.

■ "자치구마다 쉼터 1곳이라도"

코로나19를 거치며 '배달 수요'가 급증했고 배달시장도 급성장을 거듭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대문 앞까지 배달해주는 '배달 라이더'들 덕분에 편하게 음식을 시켜먹는 것도 사실입니다.

라이더들은 거창한 건물과 시설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언제든 콜을 받고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상권과 가까운 곳, 오토바이를 쉽게 주차하고 출입할 수 있는 곳이면 됩니다. 아울러 이들에게 최소한의 물과 시원한 바람, 휴대폰 충전 정도만 제공해주어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성종/ 서울노동권익센터 쉼터운영위원장

"자기 주변에 인근 쉼터가 있다면 올 가능성 커지겠죠. 그래서 고민하는 게 가급적 많은 지역에 간이쉼터라도 설치해서 라이더들이 방문하도록 계획 중이지만, 그게 지방 정부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아직 부족한게 사실입니다."

라이더와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최소한 자치구 1곳에 1개 정도는 '간이 쉼터' 형태로라도 쉴 곳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배달라이더들의 휴식권에 대해 함께 고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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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염격차]④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배달 라이더 쉼터
    • 입력 2022-07-26 08:01:50
    • 수정2022-07-26 08:02:14
    취재K
<strong>2018년 폭염은 법적인 '자연 재난'이 됐습니다. 그러나 "여름은 원래 더운 것"이라는 가벼운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폭염 피해가 '특정 계층'에 집중된다는 점이 크게 작용합니다. KBS는 폭염에 무방비로 노출된 당사자들을 차례로 점검하고 해법을 고민해봅니다.</strong><br />

지난 7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구로구 일대에서 배달라이더 김정훈 씨를 만났습니다. 김 씨는 이날도 점심 '피크타임'을 앞두고 배달 준비에 한창이었습니다.

이날 첫 배달은 '아이스 커피'. 여름철 가장 많은 주문이 몰리는 종목입니다.

첫 배달을 마치고 운 좋게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번째 '콜'을 받았습니다. 가게 에어컨 바람을 얻어 쐬기도 잠시, 곧바로 나온 중국 음식을 들고 다시 뜁니다.


김정훈/배달 라이더
"아무래도 면 요리는 빨리 갖다주려고 하고요. 여름에는 커피가 생각보다 빨리 녹는 것 같아요."

서둘러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가장 더운 점심 시간대가 '피크 타임'이기 때문입니다. '피크 타임'엔 라이더들이 받는 돈이 더 큽니다. 그러니 서둘러야 합니다.


■ "버스 뒤 정차하면 '사막'같아"

배달 중에 가장 피하고 싶은 장소가 어디냐 물었습니다. '버스 뒤'라고 합니다. 달릴 때는 바람이라도 맞을 수 있죠. 차와 차 사이, 그것도 오토바이보다 덩치가 몇 배나 큰 대형버스 뒤에서 맞는 뜨거운 열기는 견디기 힘듭니다.

"버스 뒤에 있을 때는, 열기가 사막에 안 가봤지만 사막에 있는 느낌인 것 같아요."

취재팀은 김씨가 배달 4건을 하는 동안 동행했습니다. 좀 습하긴 해도 평소 대비 시원한 날씨였는데도 온몸이 땀에 젖었습니다.

그사이 김 씨의 체온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열화상 카메라에 확연히 나타났습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 라이더들은 어디서 쉬나요?

배달 중에 쉴 곳은 있을까. 김 씨 같은 이동노동자들을 위한 쉼터가 있기는 합니다.

김 씨가 주로 일하는 서울 구로구 일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봤습니다. 오토바이로 30분 정도 달리면 서울 강서구 마곡 일대에 쉼터 하나가 나옵니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곳입니다.


멀지만 쉼터를 가봤습니다. 쉼터 안에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루에 보통 4~5명 정도 온다고 합니다. 임시 건물이긴 하지만, 멀쩡히 에어컨과 냉장고까지 갖춰놨는데도 라이더들이 안 옵니다.

"이 근처에 배달상점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없다 보니까 '콜'이 별로 뜨지 않고요. 여기 와서 바로 콜 받아서 나가기에는 어려우니까..."

쉼터 위치가 라이더들 사이에서 이른바 '기피 지역'이었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주요 상권과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김 씨가 마곡 쉼터까지 왔다 가는데 왕복 1시간이 걸렸습니다. 누군들 올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곳은 사정이 좀 나을까. 그나마 유동인구가 많은 마포구 합정역 인근 쉼터로 가봤습니다. 시설은 훨씬 더 좋았습니다. 넓직한 공간에다가 에어컨과 생수·안마의자까지 잘 갖춰놨는데도 역시나 배달노동자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잘 살펴보니 당장 오토바이를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고, 쉼터 자체도 건물 5층까지 올라가야 했습니다.



■ 문제는 '접근성'

가장 큰 문제는 '접근성'입니다. 배달 라이더 근무 패턴과 쉼터의 배치가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일종의 '미스매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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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종/ 서울노동권익센터 쉼터운영위원장

"위치의 문제, '접근성'이 떨어지는 쉼터는 배달노동자가 와서 쉬기 어렵고요. 두 번째는 라이더들이 수익과 직결된 주문을 빨리·많이 처리하기 위해서 루틴대로 쉬고 모임을 해서 쉼터까지 접근을 못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쉼터 자체가 크게 부족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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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구청이 직영으로 운영하는 3곳을 더한다고 해도 5곳뿐입니다. 서울시 내 자치구가 25곳인데 말이죠.

■ "자치구마다 쉼터 1곳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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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들은 거창한 건물과 시설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언제든 콜을 받고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상권과 가까운 곳, 오토바이를 쉽게 주차하고 출입할 수 있는 곳이면 됩니다. 아울러 이들에게 최소한의 물과 시원한 바람, 휴대폰 충전 정도만 제공해주어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성종/ 서울노동권익센터 쉼터운영위원장

"자기 주변에 인근 쉼터가 있다면 올 가능성 커지겠죠. 그래서 고민하는 게 가급적 많은 지역에 간이쉼터라도 설치해서 라이더들이 방문하도록 계획 중이지만, 그게 지방 정부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아직 부족한게 사실입니다."

라이더와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최소한 자치구 1곳에 1개 정도는 '간이 쉼터' 형태로라도 쉴 곳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배달라이더들의 휴식권에 대해 함께 고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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