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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⑧ 라면, B급 먹거리 향한 A급 사랑
입력 2016.06.23 (15:50) 수정 2016.07.01 (09:50)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혹시 라면의 쫄깃쫄깃한 면발과 구수한 국물 같은 즐거운 상상을 하셨다면 좀 떨떠름하시지 않나요?

맛있는 라면을 가지고 뭐 이렇게 현대 정보사회에 대한 삐딱한 사유를 하고, 정치적 음모까지 떠올리는지 어떻게 보면 시인은 참 골치 아픈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면!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국수를 증기로 익히고 기름에 튀겨서 말린 즉석식품. 가루수프를 따로 넣는다"고 돼 있습니다.

이 단순한 식품 하나가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배고픈 시절 얇은 호주머니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었던 라면이 이제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즐겨 먹는 간식이 되었습니다.고기와 생선 신선한 야채와 과일, 양질의 먹거리가 넘쳐나도 일주일 한 번 정도는 꼭 먹고 싶은 국민 메뉴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라면을 즐겨먹는 나라입니다.



물론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주를 이루는 인스턴트 라면뿐 아니라 가게에서 직접 만드는 생라면이 많은 탓이기도 하지만, 인스턴트 라면만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최곱니다. 지난해 무려 37억 개가 팔렸습니다. 국민 한 사람당 76개를 먹은 꼴입니다. 그러니까 온 국민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먹는다는 얘깁니다

무엇보다 라면은 조리하기 간편하고 값도 싸면서 맛도 좋고 영양가도 제법 있어 한 끼 식사로 거뜬합니다. 중국에서 탄생해 일본의 변형을 거쳐 라면이 한반도에 상륙한 것은 지난 1963년, 한 라면회사는 일본의 기술을 전수받아 10원짜리 꼬불꼬불한 국수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렸을지요? 출시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이 별 볼 일 없는 B급 먹거리는 뱃속도 허전하고 지갑도 허전한 서민들의 A급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1975년 코미디언 구봉서, 곽규석이 광고 모델로 나왔던 추억의 라면 광고. “형님 먼저 드시오” “아우 먼저 들게나” 하며 둘은 서로에게 라면 그릇을 내민다. 1975년 코미디언 구봉서, 곽규석이 광고 모델로 나왔던 추억의 라면 광고. “형님 먼저 드시오” “아우 먼저 들게나” 하며 둘은 서로에게 라면 그릇을 내민다.


1972년에는 용기에 담긴 더욱 편리한 라면이 나왔고 80년대부터는 중국과 러시아 동남아 등지에 수출하면서 효자 수출품으로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까운 중국 동남아 뿐 아니라, 미국과 호주 등에서도 우리 라면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해마다 큰 폭으로 수출이 늘고 있습니다.

지난해 라면의 수출 액수는 9,500만달러, 지난 5년 동안 연평균 50%씩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거대한 중국 시장을 겨냥한 수출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올 들어 중국에만 넉 달 동안 1,400만 달러어치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한해 450억 개 가량의 라면을 먹어치우는 중국에서 우리 라면의 시장 점유율은 1%도 되지 않으니 그야말로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은 블루오션입니다.

이런 기특한 라면에 대해 신혜정 시인은 좀 냉소적입니다. 속도와 효율을 신봉하는 현대 자본주의와 정치 현상의 병폐와 음험함을 꼬집는 상징물로 라면을 풀어 나갑니다. 모든 것을 빨리빨리 처리할 것을 요구하는 세태, 효율만을 강조하는 풍조, 특히 하룻밤에도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너무 가벼운 연애 풍속도를 인스턴트 라면에 빗댑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은 어디로 가고 무차별 농축되는 것들에 분노합니다. 우정, 사랑, 배려, 명상..... 이런 시간의 발효를 필요로 하는 것은 점점 사라지고, 마치 라면 수프 속에 온갖 야채와 고기가 분말의 형태로, 혹은 엑기스의 형태로 뭉뚱그려져 있듯이 압축, 생략, 혼합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농축이 안되면 천대받는 시대'라고.

바쁜 현대 사회.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바쁜 현대 사회.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급기야 시인은 우리의 삶 전체를 흔들어 놓은 정치적 현상이나 이슈마저도 그 본질이나 인과관계, 혹은 구조를 차분히 살펴볼 틈 없이, 마치 라면이 퉁퉁 불기 전에 후루룩 입속에 쓸어 넣는 것처럼, 매스 미디어와 인터넷 등을 통해서 활자화돼 팔려나가는 현상을 비판합니다.

시인의 통찰력에 공감이 갑니다. 사실 요즘 시대는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순식간에 압축, 약분, 생략되기 일쑵니다. 그러다가 라면을 끓이는 양은 냄비처럼 부글부글거리고, 또 얼마 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뇌리에서 잊혀집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 영원히 간직해야 할 것들은 깡그리 잊혀지고, 그저 라면을 쌌던 비닐봉지처럼 별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만 좀비처럼 살아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가치전도의 현상도 일어납니다.

라면을 맘껏 먹을 수 있는 세상은 즐겁지만, 세상이 라면같이 되는 것은 우울합니다.다시 먹고 살만해지면서 친환경 먹거리라거나 슬로푸드 등이 각광을 받으니, 그 대척점에 있는 라면이 가장 좋지 않는 식품의 하나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1982년 야학 근로 청소년들에게 무료 급식 라면을 손수 끓여주고 있는 자원 봉사대원 할머니. 그 시절에도 라면이 고달픈 밤을 달래줬다. 1982년 야학 근로 청소년들에게 무료 급식 라면을 손수 끓여주고 있는 자원 봉사대원 할머니. 그 시절에도 라면이 고달픈 밤을 달래줬다.


그러나 배고팠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다 놓으신 라면 박스에서 슬그머니 하나를 꺼내 끓이지도 않고 스프를 섞어 아삭아삭 먹던 겨울 밤이 아직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파른 산길에 몸은 지치고 다리도 아플 때, 버너와 코펠에 라면을 끓이노라면 그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에 피곤은 날아가고, 그 쫄깃한 맛에 허기를 날려버리는 저로서는 라면이 맞고 있는 뭇매가 여간 안쓰럽지 않습니다.

아직도 천원짜리 한장으로 한끼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라면밖에 없으니, 서민들의 A급 사랑을 받고 있는 라면이 무슨 죄가 있는지요?

라면은 특히 곤궁한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어서 그런지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 꼬불꼬불하고 노릇노릇하고 길고 긴 가락이 자칫하면 산산이 흩어질 위기에 놓인 남루한 지붕 밑 가족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단단히 묶어주는 노릇 같은 것을 하는 것이지요.

일본의 라면집 다이쇼켄 (大勝軒). ‘마음’이라는 재료를 쓰는 것이 50년째 사랑받는 비결이다. 일본의 라면집 다이쇼켄 (大勝軒). ‘마음’이라는 재료를 쓰는 것이 50년째 사랑받는 비결이다.


라면 왕국 일본 도쿄의 이케부쿠로에 있는 라면집 다이쇼켄 (大勝軒)을 창업한 야마기시 가쓰오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라면은 면을 통해 사람을 연결하는 마음의 맛이다" 마음의 맛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머뭅니다. 그에게 50년 인기 비결을 물었더니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닭 뼈, 돼지뼈, 야채, 해산물, 간장, 물 그리고 배합 농도와 시간이지요. 모두 공개하고 있으니 비결이랄 것도 없지만, 굳이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우리 레시피에는 '마음'이라는 재료가 들어가지요"

'마음이라는 재료!' 이보다 더한 재료가 있을까요?

그런가 하면 꼬불꼬불한 라면의 면발을 보면서 굴곡이 숱한 인생을 떠올리는 시인도 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생라면을 보고 '생은 라면'이라는 기발한 연상을 했군요. 하긴 너무 꼬여도 고통스러운 생이지만, 전혀 꼬이지 않은 가래떡 같은 인생도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여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만일 생이 주어진 기차표를 타고 예정된 역으로 가는 것이라면 나는 도중에 뛰어내리겠다"고 했나 봅니다.

어떤 시인은 라면이야말로 시인을 존재하게 하는 고마운 벗이라며 이 B급 먹거리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늘 호주머니에서 동전만 짤랑거리기 일쑤인 시인들로서는 라면이 한 끼 식사도 되고, 소주 두병은 거뜬한 안주도 되니 얼마나 든든한 벗일지요?



골방에 들어앉아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 원고지 구덩이를 들여다보다가 연신 줄담배로 제 살을 연소시키는 시인들에게 라면은 구세주 같은 것이라니, 이쯤 되면 '라면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라면에 바치는 헌사'가 제목이 되어야 할 듯합니다. 허기진 세월도 스프로 넣고 고뇌와 희망도 고명으로 얹는다니 그 라면 맛 참 오묘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시간, 저도 뱃속이 출출해지면서 라면 생각이 절로 납니다. 오늘은 제 앞에 끓여져 나오는 라면을 그냥 후루룩 먹지 말고 '위대하다는' 찬사를 한마디 던지고 젓가락을 들어야겠습니다.

브라보! 라면~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① 시 속의 경제, 경제 속의 시
② 한 방에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
③ 밥벌이, 그 숭고한 비루함
④ 연탄, 검은 눈물로 빚은 붉은 희망
⑤ 최악의 종이자 최상의 군주‘돈’
⑥ 짜장면, 검은 면발의 치명적인 유혹
⑦ 비정규직, 그들이 우주로 떠나기 전에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⑧ 라면, B급 먹거리 향한 A급 사랑
    • 입력 2016-06-23 15:50:09
    • 수정2016-07-01 09:50:05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혹시 라면의 쫄깃쫄깃한 면발과 구수한 국물 같은 즐거운 상상을 하셨다면 좀 떨떠름하시지 않나요?

맛있는 라면을 가지고 뭐 이렇게 현대 정보사회에 대한 삐딱한 사유를 하고, 정치적 음모까지 떠올리는지 어떻게 보면 시인은 참 골치 아픈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면!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국수를 증기로 익히고 기름에 튀겨서 말린 즉석식품. 가루수프를 따로 넣는다"고 돼 있습니다.

이 단순한 식품 하나가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배고픈 시절 얇은 호주머니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었던 라면이 이제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즐겨 먹는 간식이 되었습니다.고기와 생선 신선한 야채와 과일, 양질의 먹거리가 넘쳐나도 일주일 한 번 정도는 꼭 먹고 싶은 국민 메뉴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라면을 즐겨먹는 나라입니다.



물론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주를 이루는 인스턴트 라면뿐 아니라 가게에서 직접 만드는 생라면이 많은 탓이기도 하지만, 인스턴트 라면만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최곱니다. 지난해 무려 37억 개가 팔렸습니다. 국민 한 사람당 76개를 먹은 꼴입니다. 그러니까 온 국민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먹는다는 얘깁니다

무엇보다 라면은 조리하기 간편하고 값도 싸면서 맛도 좋고 영양가도 제법 있어 한 끼 식사로 거뜬합니다. 중국에서 탄생해 일본의 변형을 거쳐 라면이 한반도에 상륙한 것은 지난 1963년, 한 라면회사는 일본의 기술을 전수받아 10원짜리 꼬불꼬불한 국수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렸을지요? 출시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이 별 볼 일 없는 B급 먹거리는 뱃속도 허전하고 지갑도 허전한 서민들의 A급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1975년 코미디언 구봉서, 곽규석이 광고 모델로 나왔던 추억의 라면 광고. “형님 먼저 드시오” “아우 먼저 들게나” 하며 둘은 서로에게 라면 그릇을 내민다. 1975년 코미디언 구봉서, 곽규석이 광고 모델로 나왔던 추억의 라면 광고. “형님 먼저 드시오” “아우 먼저 들게나” 하며 둘은 서로에게 라면 그릇을 내민다.


1972년에는 용기에 담긴 더욱 편리한 라면이 나왔고 80년대부터는 중국과 러시아 동남아 등지에 수출하면서 효자 수출품으로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까운 중국 동남아 뿐 아니라, 미국과 호주 등에서도 우리 라면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해마다 큰 폭으로 수출이 늘고 있습니다.

지난해 라면의 수출 액수는 9,500만달러, 지난 5년 동안 연평균 50%씩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거대한 중국 시장을 겨냥한 수출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올 들어 중국에만 넉 달 동안 1,400만 달러어치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한해 450억 개 가량의 라면을 먹어치우는 중국에서 우리 라면의 시장 점유율은 1%도 되지 않으니 그야말로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은 블루오션입니다.

이런 기특한 라면에 대해 신혜정 시인은 좀 냉소적입니다. 속도와 효율을 신봉하는 현대 자본주의와 정치 현상의 병폐와 음험함을 꼬집는 상징물로 라면을 풀어 나갑니다. 모든 것을 빨리빨리 처리할 것을 요구하는 세태, 효율만을 강조하는 풍조, 특히 하룻밤에도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너무 가벼운 연애 풍속도를 인스턴트 라면에 빗댑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은 어디로 가고 무차별 농축되는 것들에 분노합니다. 우정, 사랑, 배려, 명상..... 이런 시간의 발효를 필요로 하는 것은 점점 사라지고, 마치 라면 수프 속에 온갖 야채와 고기가 분말의 형태로, 혹은 엑기스의 형태로 뭉뚱그려져 있듯이 압축, 생략, 혼합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농축이 안되면 천대받는 시대'라고.

바쁜 현대 사회.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바쁜 현대 사회.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급기야 시인은 우리의 삶 전체를 흔들어 놓은 정치적 현상이나 이슈마저도 그 본질이나 인과관계, 혹은 구조를 차분히 살펴볼 틈 없이, 마치 라면이 퉁퉁 불기 전에 후루룩 입속에 쓸어 넣는 것처럼, 매스 미디어와 인터넷 등을 통해서 활자화돼 팔려나가는 현상을 비판합니다.

시인의 통찰력에 공감이 갑니다. 사실 요즘 시대는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순식간에 압축, 약분, 생략되기 일쑵니다. 그러다가 라면을 끓이는 양은 냄비처럼 부글부글거리고, 또 얼마 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뇌리에서 잊혀집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 영원히 간직해야 할 것들은 깡그리 잊혀지고, 그저 라면을 쌌던 비닐봉지처럼 별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만 좀비처럼 살아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가치전도의 현상도 일어납니다.

라면을 맘껏 먹을 수 있는 세상은 즐겁지만, 세상이 라면같이 되는 것은 우울합니다.다시 먹고 살만해지면서 친환경 먹거리라거나 슬로푸드 등이 각광을 받으니, 그 대척점에 있는 라면이 가장 좋지 않는 식품의 하나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1982년 야학 근로 청소년들에게 무료 급식 라면을 손수 끓여주고 있는 자원 봉사대원 할머니. 그 시절에도 라면이 고달픈 밤을 달래줬다. 1982년 야학 근로 청소년들에게 무료 급식 라면을 손수 끓여주고 있는 자원 봉사대원 할머니. 그 시절에도 라면이 고달픈 밤을 달래줬다.


그러나 배고팠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다 놓으신 라면 박스에서 슬그머니 하나를 꺼내 끓이지도 않고 스프를 섞어 아삭아삭 먹던 겨울 밤이 아직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파른 산길에 몸은 지치고 다리도 아플 때, 버너와 코펠에 라면을 끓이노라면 그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에 피곤은 날아가고, 그 쫄깃한 맛에 허기를 날려버리는 저로서는 라면이 맞고 있는 뭇매가 여간 안쓰럽지 않습니다.

아직도 천원짜리 한장으로 한끼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라면밖에 없으니, 서민들의 A급 사랑을 받고 있는 라면이 무슨 죄가 있는지요?

라면은 특히 곤궁한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어서 그런지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 꼬불꼬불하고 노릇노릇하고 길고 긴 가락이 자칫하면 산산이 흩어질 위기에 놓인 남루한 지붕 밑 가족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단단히 묶어주는 노릇 같은 것을 하는 것이지요.

일본의 라면집 다이쇼켄 (大勝軒). ‘마음’이라는 재료를 쓰는 것이 50년째 사랑받는 비결이다. 일본의 라면집 다이쇼켄 (大勝軒). ‘마음’이라는 재료를 쓰는 것이 50년째 사랑받는 비결이다.


라면 왕국 일본 도쿄의 이케부쿠로에 있는 라면집 다이쇼켄 (大勝軒)을 창업한 야마기시 가쓰오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라면은 면을 통해 사람을 연결하는 마음의 맛이다" 마음의 맛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머뭅니다. 그에게 50년 인기 비결을 물었더니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닭 뼈, 돼지뼈, 야채, 해산물, 간장, 물 그리고 배합 농도와 시간이지요. 모두 공개하고 있으니 비결이랄 것도 없지만, 굳이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우리 레시피에는 '마음'이라는 재료가 들어가지요"

'마음이라는 재료!' 이보다 더한 재료가 있을까요?

그런가 하면 꼬불꼬불한 라면의 면발을 보면서 굴곡이 숱한 인생을 떠올리는 시인도 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생라면을 보고 '생은 라면'이라는 기발한 연상을 했군요. 하긴 너무 꼬여도 고통스러운 생이지만, 전혀 꼬이지 않은 가래떡 같은 인생도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여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만일 생이 주어진 기차표를 타고 예정된 역으로 가는 것이라면 나는 도중에 뛰어내리겠다"고 했나 봅니다.

어떤 시인은 라면이야말로 시인을 존재하게 하는 고마운 벗이라며 이 B급 먹거리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늘 호주머니에서 동전만 짤랑거리기 일쑤인 시인들로서는 라면이 한 끼 식사도 되고, 소주 두병은 거뜬한 안주도 되니 얼마나 든든한 벗일지요?



골방에 들어앉아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 원고지 구덩이를 들여다보다가 연신 줄담배로 제 살을 연소시키는 시인들에게 라면은 구세주 같은 것이라니, 이쯤 되면 '라면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라면에 바치는 헌사'가 제목이 되어야 할 듯합니다. 허기진 세월도 스프로 넣고 고뇌와 희망도 고명으로 얹는다니 그 라면 맛 참 오묘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시간, 저도 뱃속이 출출해지면서 라면 생각이 절로 납니다. 오늘은 제 앞에 끓여져 나오는 라면을 그냥 후루룩 먹지 말고 '위대하다는' 찬사를 한마디 던지고 젓가락을 들어야겠습니다.

브라보! 라면~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① 시 속의 경제, 경제 속의 시
② 한 방에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
③ 밥벌이, 그 숭고한 비루함
④ 연탄, 검은 눈물로 빚은 붉은 희망
⑤ 최악의 종이자 최상의 군주‘돈’
⑥ 짜장면, 검은 면발의 치명적인 유혹
⑦ 비정규직, 그들이 우주로 떠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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