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중일 한국 야구대표팀 감독은 201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앞두고 이승엽(삼성)이 '8회의 사나이'가 아니라 '1회의 사나이'가 돼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한국 취재진에 드러낸 적이 있다.
"8회가 아니라 초반에 쳤으면 좋겠다. 제발 애간장 태우지 말고…"라는 것이 류 감독의 말이었다.
이승엽은 류 감독의 말대로 '8회의 사나이'로 통한다. 유독 8회에 결정적인 한 방을 터트린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승엽은 일본과의 2000년 시드니올림픽 3·4위 결정전 때 0-0으로 팽팽하던 8회 2사 1,3루에서 좌중간 2루타를 날려 한국에 동메달을 안겼다.
2006년 제1회 WBC 1라운드 일본과의 경기, 2008년 베이징올림픽 준결승 일본과의 대결에서는 각각 8회에 결승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하지만 류 감독은 "이승엽이 삼성에서 한창 좋을 때에는 초반에 해결을 많이 해줘 손쉽게 경기했다"면서 이번 WBC에서도 일찌감치 제 몫을 해주길 기대했다.
이승엽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치른 6차례 연습경기에서 19타수 5안타 1타점에 그쳐 정상적인 타격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해결사 본능'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었다.
4일 타이완 타이중 인터컨티넨탈 구장에서 열린 WBC 1라운드 호주와 2차전은 이승엽이 류 감독의 마음을 잘 읽은 경기였다.
이승엽은 이날 1루수 3번타자로 선발 출전했다. 네덜란드와 1차전에서는 상대 선발이 왼손 투수라 벤치에서 대기하다가 7회 대타로 나와 파울플라이로 물러난 그였다.
하지만 이날 호주가 선발로 오른손 투수를 내세우자 선발 출격 명령을 받았다.
네덜란드에 0-5로 완패한 터라 한국으로서는 이번 호주전 승리로 분위기 반전이 절실했다. 만일 패하기라도 한다면 탈락이 확정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승엽은 기대에 부응했다. 5타수 3안타 1타점을 기록했다. 두 차례나 삼진으로 돌아선 것은 아쉽지만 경기 초반 그의 2루타 두 방으로 대표팀은 수월하게 경기를 끌고 갈 수 있었다.
선취점의 발판도 이승엽이 놓았다.
그는 1회초 1사 1루에서 중견수 쪽 2루타를 날려 2,3루 기회를 엮어줬다. 이승엽은 김현수(두산)의 좌전 적시타 때 앞선 주자 정근우( SK)에 이어 홈을 밟았다.
3-0으로 리드한 2회에는 2사 2루에서 우측 라인을 따라 흐르는 2루타로 타점을 올렸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면서 이승엽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조용히 뒤를 받치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자신에게만 관심이 집중되는 게 부담스럽다면서 후배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나눠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팀이 벼랑 끝에 몰리자 그는 직접 해결사로 나섰다. 그의 활약에 한국은 호주를 6-0으로 제압, 2라운드 진출의 희망을 이어갔다.
이승엽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아직 2라운드 진출을 확정짓지 못한 만큼 웃기에는 이르다"면서 "오늘 경기는 잊고 타이완 투수를 연구해 어떻게든 6점 이상의 차이로 이기겠다"고 무덤덤하게 소감을 밝혔다.
그는 "마지막 태극마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꼭 대표팀에 오고 싶었다"면서 "어떻게든 대표팀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각오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