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와 재건의 현장, 체첸을 가다

입력 2008.04.2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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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러시아의 오늘을 집중 조명하는 '줌인 러시아', 오늘은 러시아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체첸 문제를 살펴봅니다. 최근 코소보와 티베트 등 지구촌 곳곳에서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 운동이 이어지면서 러시아도 자치공화국인 체첸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요.

러시아와 10년에 걸친 전쟁으로 극심한 후유증을 앓아온 체첸은 이제는 투쟁보다는 경제 재건에 힘을 쏟으면서 놀라운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아직도 외국 언론의 취재가 극도로 제한되고 있는 체첸 현지를 김태욱 순회 특파원이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지난 1994년, 옛 소련 붕괴를 틈타 체첸이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는 전면전으로 응수합니다. 쉽게 끝날 것 같던 러시아와 체첸 간의 전쟁은 무려 10년 넘게 계속됐습니다. 체첸의 끈질긴 저항은 반군 지도자 샤밀 바샤예프가 제거된 지난 2006년이 돼서야 수그러들었습니다. 그 사이 110만 명이던 체첸의 인구는 80만 명으로 줄었고, 수도 그로즈니는 지상의 건물 90%가 파괴될 정도로 초토화됐습니다.

총격전과 테러행위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한 지 불과 2년... 그로즈니 시내로 향하는 도로는 어느새 깨끗이 정비된 모습입니다. 한때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이곳 체첸 수도 그로즈니는 이제 놀랄만한 속도로 빠르게 재건돼 가고 있습니다. 철저히 파괴됐던 거리에는 새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고 불안하기만 했던 치안상황도 뚜렷한 개선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흉측하게 부서졌던 건물들은 하나 둘 말끔한 모습으로 복구돼 가고 있습니다. 불과 1-2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라고는 믿기 힘들 정돕니다. 도시 전체가 건설 공사장이나 마찬가집니다. 흙먼지가 날리는 도심도 새로운 음식점과 상가들이 생겨나면서 활력을 되찾고 있습니다.

<인터뷰> 오마르 알리(공사 관계자) : "우리의 노력만으로 복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도시의 주요 시설들은 올해 복구가 마무리될 겁니다."

상인들이 돌아온 시장은 밀려드는 손님들로 북적댑니다. 전쟁에 나섰던 사람들도, 전쟁을 피해 달아났던 사람들도 이제 고향으로 돌아와 차츰 정상적인 일상의 삶을 되찾고 있습니다.

<녹취> 시장 상인 : "굉장히 달고 맛있어요. 우리 집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에요."

이곳에서 취재진은 그동안 실존 여부가 불확실했던 체첸의 고려인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녹취> 김 이레나(체첸 고려인) : "(저희들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말) 알아들어요. 말도 잘하오. 내 아버지 성이 '김', 어머니도 '김'... 그러니까 본이 다르지."

시장에서 김치를 파는 김 씨 할머니는 전쟁 중에도 체첸을 떠나지 않고 남은 고려인이 다섯 가족이 있다고 전합니다. 주변의 상인들은 지난 십여 년간 거의 찾아오지 않던 외국인의 방문이 싫지 않은 표정입니다.

<인터뷰> 아유프(시민) : "앞으로는 사정이 더 좋아질 테니까 두려워 말고 우리나라에 오세요. 체첸인은 손님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수업도 재개됐습니다. 아직 교과서는 없지만 지난 10년간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 교사와 학생 모두 열심입니다. 이렇게 체첸은 조금씩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뷰> 아흐마트 게하예프(체첸 건설부 장관) : "2년 안에 체첸을 복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우리는 해냈습니다. 이제 국민들은 나라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 반군 테러로 폭사한 아흐메디 카디로프 전 대통령... 그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그의 아들 31살의 람잔 카디로프가 이런 변화를 이끌고 있는 주인공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명한 인물로 독립 세력인 반군에 맞서 친러시아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인터뷰> 람잔 카디로프(31/체첸 대통령) : "우리는 모두 러시아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강하고 위대한 러시아의 일부이길 원합니다."

이런 람잔 세력에게 러시아는 거액을 쏟아 붓고 있고 람잔 카디로프는 재건사업을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체첸사태가 완전히 종식됐다고 말하기는 아직 일러 보입니다. 지금도 러시아 정부군과 체첸 반군 사이의 소규모 교전과 충돌은 곳곳에서 간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체첸 민족 간의 지배와 저항, 억압과 테러행위라는 악순환은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20일 그로즈니 교외에서 러시아군과 반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총격전으로 러시아군 5명과 반군 3명, 지나가던 행인도 1명이 숨졌습니다. 체첸에서 이런 소규모 교전은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흔한 일입니다.

시민들은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 끌려가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마흐마도프 씨는 지금도 끔찍한 공포에 시달립니다.

<인터뷰> 마흐마도프 람자(시민) : "러시아 군인들이 탱크 앞에 나를 세워두고 내 주위로 총을 쏴댔어요. 그리고는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나마 집마저 잃은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건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터뷰> 살라흐(시민) : "모든 게 너무 어려운 상황입니다. 살 만한 곳이 없습니다. 집이 생긴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겠죠."

실종된 남편과 아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여성도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종자의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여서 그들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보입니다.

<인터뷰> 피에르 반 말레(국제적십자사 체첸지부 대표) : "사람들의 상황은 분명히 개선되고 있지만 실종자의 가족들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70%에 이르는 실업률은 체첸인의 삶을 극복할 수 없는 빈곤의 늪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인터뷰> 마가마도프 알둘(체첸 경제통상부 장관) : "현재 정부가 논의하고 있는 최대 국정과제는 향후 4년간 9만5천 명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10살이면 총과 칼을 다룬다는 용맹한 이슬람 전사의 민족 체첸, 원유와 천연가스 송유관이 연결되는 지리적 요충지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러시아... 수세기에 걸친 이들의 침략과 저항의 피맺힌 역사는 이제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재건의 활기와 정치적 안정이 얼마나 지속될 지는 미지숩니다. 두 민족 간의 응어리진 갈등이 언제 폭발할지 모를 뇌관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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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괴와 재건의 현장, 체첸을 가다
    • 입력 2008-04-27 07:59:27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러시아의 오늘을 집중 조명하는 '줌인 러시아', 오늘은 러시아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체첸 문제를 살펴봅니다. 최근 코소보와 티베트 등 지구촌 곳곳에서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 운동이 이어지면서 러시아도 자치공화국인 체첸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요. 러시아와 10년에 걸친 전쟁으로 극심한 후유증을 앓아온 체첸은 이제는 투쟁보다는 경제 재건에 힘을 쏟으면서 놀라운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아직도 외국 언론의 취재가 극도로 제한되고 있는 체첸 현지를 김태욱 순회 특파원이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지난 1994년, 옛 소련 붕괴를 틈타 체첸이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는 전면전으로 응수합니다. 쉽게 끝날 것 같던 러시아와 체첸 간의 전쟁은 무려 10년 넘게 계속됐습니다. 체첸의 끈질긴 저항은 반군 지도자 샤밀 바샤예프가 제거된 지난 2006년이 돼서야 수그러들었습니다. 그 사이 110만 명이던 체첸의 인구는 80만 명으로 줄었고, 수도 그로즈니는 지상의 건물 90%가 파괴될 정도로 초토화됐습니다. 총격전과 테러행위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한 지 불과 2년... 그로즈니 시내로 향하는 도로는 어느새 깨끗이 정비된 모습입니다. 한때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이곳 체첸 수도 그로즈니는 이제 놀랄만한 속도로 빠르게 재건돼 가고 있습니다. 철저히 파괴됐던 거리에는 새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고 불안하기만 했던 치안상황도 뚜렷한 개선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흉측하게 부서졌던 건물들은 하나 둘 말끔한 모습으로 복구돼 가고 있습니다. 불과 1-2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라고는 믿기 힘들 정돕니다. 도시 전체가 건설 공사장이나 마찬가집니다. 흙먼지가 날리는 도심도 새로운 음식점과 상가들이 생겨나면서 활력을 되찾고 있습니다. <인터뷰> 오마르 알리(공사 관계자) : "우리의 노력만으로 복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도시의 주요 시설들은 올해 복구가 마무리될 겁니다." 상인들이 돌아온 시장은 밀려드는 손님들로 북적댑니다. 전쟁에 나섰던 사람들도, 전쟁을 피해 달아났던 사람들도 이제 고향으로 돌아와 차츰 정상적인 일상의 삶을 되찾고 있습니다. <녹취> 시장 상인 : "굉장히 달고 맛있어요. 우리 집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에요." 이곳에서 취재진은 그동안 실존 여부가 불확실했던 체첸의 고려인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녹취> 김 이레나(체첸 고려인) : "(저희들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말) 알아들어요. 말도 잘하오. 내 아버지 성이 '김', 어머니도 '김'... 그러니까 본이 다르지." 시장에서 김치를 파는 김 씨 할머니는 전쟁 중에도 체첸을 떠나지 않고 남은 고려인이 다섯 가족이 있다고 전합니다. 주변의 상인들은 지난 십여 년간 거의 찾아오지 않던 외국인의 방문이 싫지 않은 표정입니다. <인터뷰> 아유프(시민) : "앞으로는 사정이 더 좋아질 테니까 두려워 말고 우리나라에 오세요. 체첸인은 손님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수업도 재개됐습니다. 아직 교과서는 없지만 지난 10년간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 교사와 학생 모두 열심입니다. 이렇게 체첸은 조금씩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뷰> 아흐마트 게하예프(체첸 건설부 장관) : "2년 안에 체첸을 복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우리는 해냈습니다. 이제 국민들은 나라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 반군 테러로 폭사한 아흐메디 카디로프 전 대통령... 그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그의 아들 31살의 람잔 카디로프가 이런 변화를 이끌고 있는 주인공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명한 인물로 독립 세력인 반군에 맞서 친러시아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인터뷰> 람잔 카디로프(31/체첸 대통령) : "우리는 모두 러시아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강하고 위대한 러시아의 일부이길 원합니다." 이런 람잔 세력에게 러시아는 거액을 쏟아 붓고 있고 람잔 카디로프는 재건사업을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체첸사태가 완전히 종식됐다고 말하기는 아직 일러 보입니다. 지금도 러시아 정부군과 체첸 반군 사이의 소규모 교전과 충돌은 곳곳에서 간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체첸 민족 간의 지배와 저항, 억압과 테러행위라는 악순환은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20일 그로즈니 교외에서 러시아군과 반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총격전으로 러시아군 5명과 반군 3명, 지나가던 행인도 1명이 숨졌습니다. 체첸에서 이런 소규모 교전은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흔한 일입니다. 시민들은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 끌려가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마흐마도프 씨는 지금도 끔찍한 공포에 시달립니다. <인터뷰> 마흐마도프 람자(시민) : "러시아 군인들이 탱크 앞에 나를 세워두고 내 주위로 총을 쏴댔어요. 그리고는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나마 집마저 잃은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건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터뷰> 살라흐(시민) : "모든 게 너무 어려운 상황입니다. 살 만한 곳이 없습니다. 집이 생긴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겠죠." 실종된 남편과 아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여성도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종자의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여서 그들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보입니다. <인터뷰> 피에르 반 말레(국제적십자사 체첸지부 대표) : "사람들의 상황은 분명히 개선되고 있지만 실종자의 가족들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70%에 이르는 실업률은 체첸인의 삶을 극복할 수 없는 빈곤의 늪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인터뷰> 마가마도프 알둘(체첸 경제통상부 장관) : "현재 정부가 논의하고 있는 최대 국정과제는 향후 4년간 9만5천 명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10살이면 총과 칼을 다룬다는 용맹한 이슬람 전사의 민족 체첸, 원유와 천연가스 송유관이 연결되는 지리적 요충지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러시아... 수세기에 걸친 이들의 침략과 저항의 피맺힌 역사는 이제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재건의 활기와 정치적 안정이 얼마나 지속될 지는 미지숩니다. 두 민족 간의 응어리진 갈등이 언제 폭발할지 모를 뇌관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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