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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⑨ 자본의 제국, 끝없는 소비로 쌓아올리는 바벨탑
입력 2016.06.27 (15:35) 수정 2016.07.01 (09:49)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끊임없이 부푸는 소비의 애드벌룬

시라기보다는 밀도 있는 에세이 같은 느낌입니다. 혹은 세상을 관조하는 선지자가 나지막이 읊조리는 예지적인 독백과도 같이 들립니다.

시인은 신자유주의 이후 지구 전체를 무대로 종횡무진하면서 아메바처럼 증식하는 자본의 위세를 소비라는 측면에서 시니컬하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미 IMF 관리 체제를 경험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을 휘젓고 다니는 투기 자본의 폐해를 경험한 한국으로서는 이 시인의 주장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환율, 주식, 채권 등 이른바 투기에 의한 금융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실물경제보다 훨씬 더 커진 금융시장은 그야말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입니다. 그 이면에는 힘없고 작은 나라의 멀쩡하던 외환시장이나 주식시장을 무차별 강타해 투기적 이익을 갈취하고 한 나라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헤지펀드의 횡포가 있고, 약소국들의 피눈물이 있습니다.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는 양극화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유엔기구에서 빈국 식량 원조 등을 담당했던 장 지글러는 이렇게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오늘날의 세계의 주된 갈등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만성적인 실업난과 빈곤, 사회의 계층화, 영양실조가 이제는 북반구도 위협하고 있다. 북반구와 남반구 사람들은 같은 적을 마주하고 있다. 민족을 초월하고 활동하는,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의 과두 지배가 바로 그것이다. 세계 225명 대재산가의 총자산은 1조 달러가 넘는다. 이것은 전 세계 가난한 자들의 47%, 약 25억 명의 연간 수입과 맞먹는다. 빌 게이츠의 자산은 가난한 미국인 1억 600만 명의 총자산과 맞먹는다. 세계 100대 글로법 기업들의 매출은 각각 기업들이 가난한 나라 120개국의 수출 총액보다 많다." (장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시인은 이렇게 글로벌 금융자본이 횡포를 부리는 세상을 영국의 소설가 루이스 캐럴이 지은 판타지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비유합니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토끼굴로 떨어진 앨리스가 겪는 판타지를 빗대어, 도무지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투기적 세상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우아하게 입고, 먹고 마시고 쓰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 몸의 피에 해당하는 돈이 혈관을 돌아 심장을 압박합니다. 그러나 소득을 넘는 과도한 소비는 필연적으로 부푼 풍선이 터지듯 파멸로 이어집니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 유통이라는 세 축으로 굴러갑니다. 적정한 수준의 소비는 생산으로 이어져 경제를 발전시킵니다. 문제는 과잉소비입니다.

과잉소비의 덫에 걸린 현대인

현대인은 누구나 '소비'라는 매혹적인 거미줄에 걸린 곤충들 같습니다. 하루 24시간 우리는 끊임없이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 더 유명한 것들을 사라고 유혹 받고 있습니다.

모바일과 텔레비전, 신문과 잡지, 전철과 버스 정류장, 거리 빌딩의 전광판, 심지어는 달리는 전철 바깥벽에 투사되는 홀로그램 광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구매의 집요한 유혹에 시달립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이런 소비 현상을 날카롭게 파헤친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들리야르는 더 이상 소비를 결핍의 충족, 그러니까 무언가 부족한 것이나 필요한 것을 사는 행위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욕망의 소비, 기호의 소비로 변질됐다고 말합니다. 좀 풀어서 얘기하자면, 어떤 제품의 소비를 통해 사람들은 김백겸 시인도 지적하듯이, 명품을 걸치고, 명품 오디오를 듣고 명품 매장을 드나드는 것으로 자신이 명품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지요.

우리도 수시로 이런 현상을 경험합니다. 길거리에 요란하게 출몰하는 폭주족도 할리데이빗슨이나 혼다 같은 브랜드 오토바이를 모는 그룹끼리 대열을 짓습니다. 나이키를 신지 않은 학생이 또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다거나, 명품 핸드백 하나 걸치지 않으면 모임에 나가기 꺼리는 주부를 보기도 합니다.

" 광고가 전하는 메시지대로 쉬고, 놀고, 행동하고, 소비하려는 대부분의 일반적 욕구들은 거짓된 욕구의 범주에 해당한다."

자본주의의 이런 악마적 속성을 예리하게 파헤쳤던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쿠제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힘들게 노동을 해서 하나에 수백만 원, 혹은 천만 원을 넘는 명품을 사고, 마치 광고에 나오는 모델처럼 고상한 존재가 되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그것도 잠시, 공허함이 밀려오면 또 다른 명품을 향해 달려가고, 그 명품을 손에 넣기 위해 죽어라 하고 일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어나지 못 합니다. 늘 호주머니가 가벼운 시인들은 특히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과 상점들의 화려한 조명에 당혹스럽습니다.



시인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파산과 중노동이라는 함정이 도사린 상점과 상품 그리고 욕망들에서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댄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팔리지 못하고 반품 처리되거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상품과 다름없는 폐기물로 전락한다고 개탄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욕망과 소비를 자양분으로 자본주의는 울창한 숲으로 번창해 가고, 자본주의가 번창할수록 개인의 삶은 쪼그라듭니다.



과소비와 충동구매를 부추기는 것은 편리한 결제수단입니다. 손 안의 작은 신용카드는 당장 돈이 없어도 구매를 가능하게 합니다. 요즘은 카드도 번거롭다고 휴대폰으로 결제가 됩니다. 호기있게 카드 영수증에 사인을 할 때는 정말이지 '고객은 왕'이라는 광고 문구처럼 왕이 된 듯 합니다.

그러나 몇주일이 지나고 날아든 카드 명세서에는 할 말을 잃습니다. 이번 달도 적자인생입니다. 하여 어떤 시인은 돈을 내라는 온갖 고지서를 보면서 새삼 자본주의의 본질을 절감합니다.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나?

그렇다면 이런 소비의 유혹을 끊어내는 방법은 없을까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자본의 포충망에 걸려든 소비 곤충이지만 정작 이 그물망을 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매우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착각 속에 살기 일쑨데, 좀처럼 이 합리로 보이는 불합리를 깨우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경험이 다 있지 않나요? 장롱을 열어보면 입지 않은 옷들, 언제 샀는지 모를 옷들이 즐비한데, 정작 입고 나갈 옷이 없다고 또 백화점이나 마트를 기웃거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과소비를 했나요? 아끼고 아껴서 아주 조금씩 산 것 같은데..... 텔레비전에서 연신 쏟아내는 케이블 광고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구매 버튼을 누르는 현상, 우스갯소리로 '지름신'이 강림하는 경험도 흔히 하게 됩니다.

보들리야르의 지적처럼 소비는 구체적인 결핍과 충족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과 이미지의 문제이다 보니,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는다면 소비를 줄이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담배를 끊기 어렵다고 합니다. 마약도 도박도 끊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무분별한 소비를 끊고, 적절한 소비, 건전한 소비를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도박을 끊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듯이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도 매우 단호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의 저자 닐 부어맨‘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의 저자 닐 부어맨


한때 명품 브랜드가 곧 존재의 증명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명품을 사는데 돈을 다 써버렸던 프랑스의 닐 부어맨이라는 청년은 어느 날 파리 한복판에서 루이비통과 같은 명품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신발을 예로 들자면 그는 어려서부터 아디다스만을 신었는데, 그는 신발 하나로 상대방을 규정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또 상대방이 어떤 청바지를 입었는지 어떤 티셔츠를 입었는지, 어떤 휴대전화를 쓰는지 등으로 상대방을 판단했다는 것이지요. 제품이 곧 소속감과 존재감을 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공허감과 상실감, 또 다시 반복되는 명품의 탐닉, 비어가는 통장, 황폐해지는 영혼으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내가 명품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이 내 소비심리를 이용해 배를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브랜드와 소비라는 마약을 벗어던지기 위해 불태워 없애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브랜드 제품을 소비하는 생활로 복귀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다. 당분간,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나는 이제 브랜드 제품에 의지하지 않고도 나의 두발로 꿋꿋이 설 수 있으며,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나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 들지도 않게 되었다. 비로소 나는 소비주의와 물질주의가 판치는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이다."
(닐 부어맨,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모두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대

이제 자본과 시장과 광고와 소비의 관계를 냉정하게 돌이켜보고, 차분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어렵지만 그 길만이 돈과 소비가 모든 가치를 집어삼킨 현대판 야만의 시대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좀 비싼 옷이 아니더라도, 명품 핸드백이 아니더라도, 에어가 든 고급 신발이 아니더라도, 번쩍거리는 시계를 차지 않아도,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스테이크를 썰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삶의 가치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인류 5,000년의 지혜가 오롯이 담긴 고전들이 있고,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있고, 언제라도 오를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 있습니다.

시인들도 끝없는 욕망과 소비로 인간의 영혼이 결박당한 시대에는 시를 쓰기 어렵다고 토로합니다.

정끝별 시인정끝별 시인


"야만적인 자본의 논리가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우리 시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다. 1퍼센트의 부자는 돈을 쓰는 재미에 빠져 서정시 따위에 무관심하고, 99퍼센트의 빈자들은 밥에 매달려 서정시를 외면하고 있다. 서정보다 자본이, 꽃보다 밥이, 노래보다는 목숨이 먼저인 시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다. " (정끝별 시인)

탐욕에서 벗어나, 맹목적인 소비와 끝 모를 욕망에서 벗어나 자본보다는 서정이, 밥보다는 꽃이,목숨보다는 노래가 먼저인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여 시인뿐만이 아니라 집 짓는 목수도, 거리의 노점상 아저씨도 우유를 배달하는 아주머니도, 자동차 정비를 하는 청년도 한 줄 서정시를 쓰는 세상을 꿈꿔 봅니다.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① 시 속의 경제, 경제 속의 시
② 한 방에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
③ 밥벌이, 그 숭고한 비루함
④ 연탄, 검은 눈물로 빚은 붉은 희망
⑤ 최악의 종이자 최상의 군주‘돈’
⑥ 짜장면, 검은 면발의 치명적인 유혹
⑦ 비정규직, 그들이 우주로 떠나기 전에
⑧ 라면, B급 먹거리를 향한 A급 사랑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⑨ 자본의 제국, 끝없는 소비로 쌓아올리는 바벨탑
    • 입력 2016-06-27 15:35:15
    • 수정2016-07-01 09:49:06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끊임없이 부푸는 소비의 애드벌룬

시라기보다는 밀도 있는 에세이 같은 느낌입니다. 혹은 세상을 관조하는 선지자가 나지막이 읊조리는 예지적인 독백과도 같이 들립니다.

시인은 신자유주의 이후 지구 전체를 무대로 종횡무진하면서 아메바처럼 증식하는 자본의 위세를 소비라는 측면에서 시니컬하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미 IMF 관리 체제를 경험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을 휘젓고 다니는 투기 자본의 폐해를 경험한 한국으로서는 이 시인의 주장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환율, 주식, 채권 등 이른바 투기에 의한 금융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실물경제보다 훨씬 더 커진 금융시장은 그야말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입니다. 그 이면에는 힘없고 작은 나라의 멀쩡하던 외환시장이나 주식시장을 무차별 강타해 투기적 이익을 갈취하고 한 나라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헤지펀드의 횡포가 있고, 약소국들의 피눈물이 있습니다.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는 양극화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유엔기구에서 빈국 식량 원조 등을 담당했던 장 지글러는 이렇게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오늘날의 세계의 주된 갈등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만성적인 실업난과 빈곤, 사회의 계층화, 영양실조가 이제는 북반구도 위협하고 있다. 북반구와 남반구 사람들은 같은 적을 마주하고 있다. 민족을 초월하고 활동하는,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의 과두 지배가 바로 그것이다. 세계 225명 대재산가의 총자산은 1조 달러가 넘는다. 이것은 전 세계 가난한 자들의 47%, 약 25억 명의 연간 수입과 맞먹는다. 빌 게이츠의 자산은 가난한 미국인 1억 600만 명의 총자산과 맞먹는다. 세계 100대 글로법 기업들의 매출은 각각 기업들이 가난한 나라 120개국의 수출 총액보다 많다." (장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시인은 이렇게 글로벌 금융자본이 횡포를 부리는 세상을 영국의 소설가 루이스 캐럴이 지은 판타지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비유합니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토끼굴로 떨어진 앨리스가 겪는 판타지를 빗대어, 도무지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투기적 세상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우아하게 입고, 먹고 마시고 쓰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 몸의 피에 해당하는 돈이 혈관을 돌아 심장을 압박합니다. 그러나 소득을 넘는 과도한 소비는 필연적으로 부푼 풍선이 터지듯 파멸로 이어집니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 유통이라는 세 축으로 굴러갑니다. 적정한 수준의 소비는 생산으로 이어져 경제를 발전시킵니다. 문제는 과잉소비입니다.

과잉소비의 덫에 걸린 현대인

현대인은 누구나 '소비'라는 매혹적인 거미줄에 걸린 곤충들 같습니다. 하루 24시간 우리는 끊임없이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 더 유명한 것들을 사라고 유혹 받고 있습니다.

모바일과 텔레비전, 신문과 잡지, 전철과 버스 정류장, 거리 빌딩의 전광판, 심지어는 달리는 전철 바깥벽에 투사되는 홀로그램 광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구매의 집요한 유혹에 시달립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이런 소비 현상을 날카롭게 파헤친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들리야르는 더 이상 소비를 결핍의 충족, 그러니까 무언가 부족한 것이나 필요한 것을 사는 행위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욕망의 소비, 기호의 소비로 변질됐다고 말합니다. 좀 풀어서 얘기하자면, 어떤 제품의 소비를 통해 사람들은 김백겸 시인도 지적하듯이, 명품을 걸치고, 명품 오디오를 듣고 명품 매장을 드나드는 것으로 자신이 명품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지요.

우리도 수시로 이런 현상을 경험합니다. 길거리에 요란하게 출몰하는 폭주족도 할리데이빗슨이나 혼다 같은 브랜드 오토바이를 모는 그룹끼리 대열을 짓습니다. 나이키를 신지 않은 학생이 또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다거나, 명품 핸드백 하나 걸치지 않으면 모임에 나가기 꺼리는 주부를 보기도 합니다.

" 광고가 전하는 메시지대로 쉬고, 놀고, 행동하고, 소비하려는 대부분의 일반적 욕구들은 거짓된 욕구의 범주에 해당한다."

자본주의의 이런 악마적 속성을 예리하게 파헤쳤던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쿠제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힘들게 노동을 해서 하나에 수백만 원, 혹은 천만 원을 넘는 명품을 사고, 마치 광고에 나오는 모델처럼 고상한 존재가 되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그것도 잠시, 공허함이 밀려오면 또 다른 명품을 향해 달려가고, 그 명품을 손에 넣기 위해 죽어라 하고 일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어나지 못 합니다. 늘 호주머니가 가벼운 시인들은 특히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과 상점들의 화려한 조명에 당혹스럽습니다.



시인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파산과 중노동이라는 함정이 도사린 상점과 상품 그리고 욕망들에서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댄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팔리지 못하고 반품 처리되거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상품과 다름없는 폐기물로 전락한다고 개탄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욕망과 소비를 자양분으로 자본주의는 울창한 숲으로 번창해 가고, 자본주의가 번창할수록 개인의 삶은 쪼그라듭니다.



과소비와 충동구매를 부추기는 것은 편리한 결제수단입니다. 손 안의 작은 신용카드는 당장 돈이 없어도 구매를 가능하게 합니다. 요즘은 카드도 번거롭다고 휴대폰으로 결제가 됩니다. 호기있게 카드 영수증에 사인을 할 때는 정말이지 '고객은 왕'이라는 광고 문구처럼 왕이 된 듯 합니다.

그러나 몇주일이 지나고 날아든 카드 명세서에는 할 말을 잃습니다. 이번 달도 적자인생입니다. 하여 어떤 시인은 돈을 내라는 온갖 고지서를 보면서 새삼 자본주의의 본질을 절감합니다.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나?

그렇다면 이런 소비의 유혹을 끊어내는 방법은 없을까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자본의 포충망에 걸려든 소비 곤충이지만 정작 이 그물망을 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매우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착각 속에 살기 일쑨데, 좀처럼 이 합리로 보이는 불합리를 깨우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경험이 다 있지 않나요? 장롱을 열어보면 입지 않은 옷들, 언제 샀는지 모를 옷들이 즐비한데, 정작 입고 나갈 옷이 없다고 또 백화점이나 마트를 기웃거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과소비를 했나요? 아끼고 아껴서 아주 조금씩 산 것 같은데..... 텔레비전에서 연신 쏟아내는 케이블 광고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구매 버튼을 누르는 현상, 우스갯소리로 '지름신'이 강림하는 경험도 흔히 하게 됩니다.

보들리야르의 지적처럼 소비는 구체적인 결핍과 충족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과 이미지의 문제이다 보니,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는다면 소비를 줄이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담배를 끊기 어렵다고 합니다. 마약도 도박도 끊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무분별한 소비를 끊고, 적절한 소비, 건전한 소비를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도박을 끊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듯이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도 매우 단호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의 저자 닐 부어맨‘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의 저자 닐 부어맨


한때 명품 브랜드가 곧 존재의 증명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명품을 사는데 돈을 다 써버렸던 프랑스의 닐 부어맨이라는 청년은 어느 날 파리 한복판에서 루이비통과 같은 명품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신발을 예로 들자면 그는 어려서부터 아디다스만을 신었는데, 그는 신발 하나로 상대방을 규정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또 상대방이 어떤 청바지를 입었는지 어떤 티셔츠를 입었는지, 어떤 휴대전화를 쓰는지 등으로 상대방을 판단했다는 것이지요. 제품이 곧 소속감과 존재감을 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공허감과 상실감, 또 다시 반복되는 명품의 탐닉, 비어가는 통장, 황폐해지는 영혼으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내가 명품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이 내 소비심리를 이용해 배를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브랜드와 소비라는 마약을 벗어던지기 위해 불태워 없애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브랜드 제품을 소비하는 생활로 복귀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다. 당분간,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나는 이제 브랜드 제품에 의지하지 않고도 나의 두발로 꿋꿋이 설 수 있으며,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나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 들지도 않게 되었다. 비로소 나는 소비주의와 물질주의가 판치는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이다."
(닐 부어맨,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모두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대

이제 자본과 시장과 광고와 소비의 관계를 냉정하게 돌이켜보고, 차분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어렵지만 그 길만이 돈과 소비가 모든 가치를 집어삼킨 현대판 야만의 시대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좀 비싼 옷이 아니더라도, 명품 핸드백이 아니더라도, 에어가 든 고급 신발이 아니더라도, 번쩍거리는 시계를 차지 않아도,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스테이크를 썰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삶의 가치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인류 5,000년의 지혜가 오롯이 담긴 고전들이 있고,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있고, 언제라도 오를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 있습니다.

시인들도 끝없는 욕망과 소비로 인간의 영혼이 결박당한 시대에는 시를 쓰기 어렵다고 토로합니다.

정끝별 시인정끝별 시인


"야만적인 자본의 논리가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우리 시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다. 1퍼센트의 부자는 돈을 쓰는 재미에 빠져 서정시 따위에 무관심하고, 99퍼센트의 빈자들은 밥에 매달려 서정시를 외면하고 있다. 서정보다 자본이, 꽃보다 밥이, 노래보다는 목숨이 먼저인 시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다. " (정끝별 시인)

탐욕에서 벗어나, 맹목적인 소비와 끝 모를 욕망에서 벗어나 자본보다는 서정이, 밥보다는 꽃이,목숨보다는 노래가 먼저인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여 시인뿐만이 아니라 집 짓는 목수도, 거리의 노점상 아저씨도 우유를 배달하는 아주머니도, 자동차 정비를 하는 청년도 한 줄 서정시를 쓰는 세상을 꿈꿔 봅니다.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① 시 속의 경제, 경제 속의 시
② 한 방에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
③ 밥벌이, 그 숭고한 비루함
④ 연탄, 검은 눈물로 빚은 붉은 희망
⑤ 최악의 종이자 최상의 군주‘돈’
⑥ 짜장면, 검은 면발의 치명적인 유혹
⑦ 비정규직, 그들이 우주로 떠나기 전에
⑧ 라면, B급 먹거리를 향한 A급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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