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70년기획]⑪ “400리 고향길, 걸어가서라도 동생들 만날 겁니다”

입력 2021.02.11 (08:05) 수정 2021.02.11 (08:4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날 줄 알았지만,
여전히 재회하지 못한 이산가족이 5만 명이 넘습니다.
만날 수 있다는 기대도, 시간도 하루하루 희미해져 가는데요.
설을 맞아 그분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크리스마스 다음 날 월남…"먼저 내려가라"던 어머니의 마지막 손짓

이성수 할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남도 중화군입니다. 1950년 17세에 고향을 떠나 벌써 70여 년이 흘렀지만, 고향은 여전히 중화군 신음리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위성 지도를 들여다보며 달라진 고향 속에서 옛 모습을 찾습니다.

“예전엔 여기에 샘물이 있었는데, 개천이 좁아졌더라고. 전기도 안 들어왔던 시골에 집도 드문드문 있었는데, 집도 많이 지어졌어.”


크리스마스 다음 날 피란 행렬에 함께 내려왔던 가족들. 어린 동생들이 제대로 걷지 못해 자꾸 뒤처지자, 금세 따라간다며 큰아들 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눈물 훔치며 손짓했던 게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며칠 뒤면 보겠거니 하며 지냈던 지난 70년.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다시 그 순간이 반복된다면 절대로 어머니, 동생들 손을 놓지 않겠다고 매일 매일 되새긴다는 이성수 할아버지. 곁에서 맏아들, 맏형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다는 말로 지난 시간 책임을 다하지 못한 한을 대신합니다.

■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동생들 만나러 가야지, 걸어서 가야지"

할아버지는 몇 해 전 강아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분명 다섯 마리였던 강아지가 네 마리 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 어느 동생 하나가 죽었나 보다.’ 꿈속에서조차 그런 생각을 하며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곤 한참을 잠 못 이루고 배회하며 마음을 달랬더랬는데요.

할아버지 고향까지는 400리 길. 지금이라도 휴전선이 열린다면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걸어서 동생들을 만나러 가겠다, 가서 장자로서 역할을 다하겠다는 게 할아버지의 변치 않는 신념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이산70년기획]⑪ “400리 고향길, 걸어가서라도 동생들 만날 겁니다”
    • 입력 2021-02-11 08:05:06
    • 수정2021-02-11 08:43:59
    취재K
편집자 주 :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날 줄 알았지만,
여전히 재회하지 못한 이산가족이 5만 명이 넘습니다.
만날 수 있다는 기대도, 시간도 하루하루 희미해져 가는데요.
설을 맞아 그분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크리스마스 다음 날 월남…"먼저 내려가라"던 어머니의 마지막 손짓

이성수 할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남도 중화군입니다. 1950년 17세에 고향을 떠나 벌써 70여 년이 흘렀지만, 고향은 여전히 중화군 신음리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위성 지도를 들여다보며 달라진 고향 속에서 옛 모습을 찾습니다.

“예전엔 여기에 샘물이 있었는데, 개천이 좁아졌더라고. 전기도 안 들어왔던 시골에 집도 드문드문 있었는데, 집도 많이 지어졌어.”


크리스마스 다음 날 피란 행렬에 함께 내려왔던 가족들. 어린 동생들이 제대로 걷지 못해 자꾸 뒤처지자, 금세 따라간다며 큰아들 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눈물 훔치며 손짓했던 게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며칠 뒤면 보겠거니 하며 지냈던 지난 70년.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다시 그 순간이 반복된다면 절대로 어머니, 동생들 손을 놓지 않겠다고 매일 매일 되새긴다는 이성수 할아버지. 곁에서 맏아들, 맏형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다는 말로 지난 시간 책임을 다하지 못한 한을 대신합니다.

■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동생들 만나러 가야지, 걸어서 가야지"

할아버지는 몇 해 전 강아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분명 다섯 마리였던 강아지가 네 마리 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 어느 동생 하나가 죽었나 보다.’ 꿈속에서조차 그런 생각을 하며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곤 한참을 잠 못 이루고 배회하며 마음을 달랬더랬는데요.

할아버지 고향까지는 400리 길. 지금이라도 휴전선이 열린다면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걸어서 동생들을 만나러 가겠다, 가서 장자로서 역할을 다하겠다는 게 할아버지의 변치 않는 신념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시리즈

이산70년 기획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