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아시아예선 ‘어록 다시보기’

입력 2009.03.14 (08:31)

수정 2009.03.1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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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으로 이뤄진 강렬한 미니시리즈를 본 것 같다.
일본 도쿄돔에서 지난 5일부터 9일까지 열린 '야구난장'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아시아예선전을 두고 하는 얘기다.
도쿄돔에서 김인식 감독 등 코치진과 그리고 바쁜 연습 도중 잠시 숨을 고르던 선수들과 나눴던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니 이런 생각은 더 강해진다.
쉽지 않을 것 같았던 첫 타이완전의 통쾌한 승리. 그 통쾌함이 한순간 당혹감으로 뒤바뀐 일본전 콜드게임패.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선수 모두가 제 실력을 발휘하며 일본 열도를 '아~'라는 탄식으로 몰고 간 통쾌한 설욕전. 이제는 미국에서 본선을 준비 중인 대표팀과 당시 나눴던 '어록'을 통해 그 때의 감동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 "태균아, 머리 자르면 안타 못친다"
이번 대회를 통해 한국 국가대표 야구팀 4번 타자로 자리매김한 '홈런왕' 김태균(한화).
2일 일본 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스와 평가전에서 바깥쪽 꽉 찬 공을 밀어쳐 투런 홈런으로 연결하면서 단숨에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 기자들은 "대단한 힘이다. 일본에서 저런 타자를 보기 힘들다"라며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도 김태균 본인은 여전히 불안했다.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인 이승엽(요미우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겠느냐는 주위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태균은 스물일곱 동갑내기 정근우(SK)에게 "야, 홈런을 쳐도 왜 이리 불안하냐. 머리라도 좀 자를까"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당시 김태균의 머리는 조금 자란 상태였다)
정근우는 그러자 "야, 자르긴 왜 잘라. 머리 자르면 안타 못 친다. 나중에 안타 못 치면 그 때 잘라"라고 말했다. 이 사실은 더그아웃에서 김태균과 함께 있던 정근우가 기자들에게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그러자 김태균은 쑥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정)근우한테 말렸어요"
정말 머리를 자르지 않았던 때문일까. 김태균은 7일 일본전에서 에이스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를 상대로 대형 2점 홈런을 날렸고 9일 일본과 '리턴매치'에서는 결승타점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했다. 김태균의 머리카락은 아마 WBC 대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자랄 것 같다.
◇"야구 하루 이틀 하나요".. '도쿄돔 사나이' 이진영
이진영은 도쿄돔과 인연이 깊다. 야구선수로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계기가 바로 도쿄돔에서 치른 2006년 첫 WBC 대회였기 때문.
당시 일본에 0-2로 뒤지던 4회말 2사 만루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일본의 니시오카 쓰요시가 봉중근의 2구째를 밀어쳐 우익선상으로 총알처럼 빠지는 2루타성 타구를 날렸지만 이진영은 몸을 날리는 그림같은 수비로 이 타구를 잡아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은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본선에 진출해 세계 4강을 이뤄냈다.
이진영은 이때부터 '국민 우익수'로 불렸다. 그런 이진영이 6일 타이완과 첫 경기에서는 비거리 135m 장쾌한 대형 만루홈런으로 승리의 수훈갑이 됐다.
1일 나리타 공항에 입국하면서 "역시 일본에 오니까 관심을 가져주네요"라며 일본과 인연을 떠올렸던 이진영이 결국 도쿄돔에서 또 한 번 '사고'를 친 셈이다.
이진영은 다음날 "기분이 짜릿했을텐데 잠을 설치지 않았느냐"라고 기자들의 질문에 "에이, 야구 하루 이틀 하나요"라며 자신이 큰 경기에 강했다는 점을 에둘러 언급하는 '센스'를 보여 취재진의 웃음을 자아냈다.
◇"일본, 오늘 못 치네"..생각대로 안됐던 김광현
김광현은 프로 2년차인 지난 시즌 국내 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였다. 그 여세를 몰아 CF도 찍었다. 그 CF에 나오는 카피는 '생각대로 하면 되고...'였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일본을 상대로 2승을 거뒀던 김광현이었기에 비록 메이저리거가 대거 포함된 일본팀이었다고 하지만 선전이 기대됐다. 일본 언론도 대회 시작 전부터 '일본 킬러 김광현'이라며 이 젊은 투수에 대한 분석에 방송시간과 지면을 대거 할애했다.
김광현은 대회 직전 공식인터뷰에서 "몸 상태가 최고다. 무조건 이기는 피칭을 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런 김광현의 발언은 일본팀을 더욱 떨게 만들었을 터였다.
7일 일본전 당일 김광현은 경기 시작 30분 전 갑자기 혼자서 경기장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일본선수들의 타격 연습을 약 2, 3분간 지켜봤다. 김광현은 왜 경기장에 나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오늘 못치네..."라고 혼잣말을 하며 더그아웃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를 지켜본 기자들은 "오늘 광현이가 또 한 번 사고 치겠구나"라는 생각들을 했을 법하다. 김광현이 한 생각대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 딴판으로 나타났다. 김광현은 2회도 채 넘기지 못하고 무려 8점을 내준 채 마운드를 내려왔다. 화면을 통해 본 김광현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시련이 있는 법. 김광현에게는 이 시련이 '보약'이 되기를 바랐다.
◇김인식 "속 쓰려 밥맛도 안나더라"
김인식 감독은 스즈키 이치로를 일본팀 전력의 핵으로 봤다.
일본 대표팀이 일본 프로구단과 평가전을 본 뒤 이치로나 아오키 노리치카(야쿠르트)가 못하면 일본도 점수를 잘 내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치로가 예선 첫 경기인 5일 중국전에서 5타수 무안타에 그쳤을 때에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차라리 중국할 때 잘하고 우리랑 할 때 못 쳐야 하는데..."라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김 감독의 '불길한 예감'은 결국 현실이 됐다. 이치로는 한국 투수들을 농락하며 그라운드를 휘저었고 결국 한국은 이치로를 잡지 못해 졌다는 말이 나왔다. 김 감독은 경기 다음날 "왜 하필 우리하고 할 때 잘하는 지 모르겠다"라며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경기 패배 후 인터뷰에서 "1점차로 지건, 10점 차로 지건 진 건 똑같다. 신경쓰지 않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겠다"라며 애써 감정을 자제했지만 역시 그도 한일전 패배를 놓고 무덤덤할 수는 없었다.
김 감독은 다음 날 기자들이 잘 주무셨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자긴 잤지. 그런데 푹 잤냐고?"라고 반문하면서 "속이 쓰리지. 이젠 밥맛도 안난다".
◇이어폰 낀 봉중근..류현진 "긴장했네.."
9일 일본과의 '리턴매치' 선발을 앞둔 봉중근(LG)의 모습은 정말 엄숙, 그 자체였다.
경기 시작 전 이어폰을 양 귀에 꽂은 채 조용히 더그아웃에 혼자 앉아 일본팀의 타격 연습을 지켜봤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에 임하는 듯한 비장한 모습이었다.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일본 타자들을 주시했다.
그 순간 라커룸에서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던 '동생' 류현진이 분위기를 깼다. 류현진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기자들 들으라는 듯이 "선발투수 긴장했네, 긴장했어..."라고 농을 걸었다. 봉중근은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끝까지 '진중한' 표정으로 류현진을 앞을 지나더니 라커룸으로 들어가버렸다.
결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봉중근이었지만 '반드시 이기겠다'라는 결연한 의지가 배어 나온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추신수 "에이전트하고 많이 싸웠어요"
김인식 감독은 기자들을 볼 때마다 "상대 팀 분석해야지, (추)신수 신경써야지, 복잡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 대회에서는 추신수 출전 여부가 그만큼 큰 관심사였다.
2일 세이부와 평가전을 앞두고 갑자기 발생한 왼쪽 팔꿈치 통증은 대회 출전 여부를 둘러싼 논란으로 번졌다. 추신수는 우여곡절 끝에 지명타자로 출장 허가를 받아 6일 첫 경기 타이완전에서 3타수 1안타에 볼넷 1개라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을 올렸다.
7일 더그아웃에서 만난 추신수는 전날 경기 소감을 묻자 "메이저리그 데뷔전 때보다 더 긴장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의 문제로 팀이 어수선해진 만큼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추신수는 그러면서 "(건강 상태를 관찰하기 위해 미국에서 온) 트레이너하고 마찰도 있었다. 미국 에이전트하고 전화하면서 저는 뛰고 싶다고 계속 주장해 싸우기도 많이 했다"며 이번 일로 힘들었음을 내비쳤다.
추신수는 두 차례 평가전에 결장하며 무뎌진 실전 감각과 타격감 때문에 예선전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정교함과 힘을 겸비한 추신수가 타격감만 끌어올린다면 한국팀 타선의 무게감은 한층 더 커질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타격연습 때 빨랫줄 같은 홈런타구가 가장 많이 나온 타자는 추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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