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잊지 않겠습니다” 수채화에 담긴 소녀들 누굴까

입력 2017.06.29 (09:59) 수정 2017.06.2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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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은 대나무숲 바로 앞에 소녀상이 있어요. 사각사각 댓바람 소리를 들으며 소녀상이 앉아있어요.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에요."

"남해 숙이공원에 있는 소녀상은 이름이 숙이 할머니래요. 1938년 남해에서 나물을 캐다가 붙잡혀 가신 숙이 할머니 이름을 딴 거래요. 그래서 남해 소녀상에는 소쿠리랑 호미가 있어요. 소녀상 만든 거 보시고 숙이 할머니가 많이 우셨대요."

"부산 초읍에 있는 소녀상 옆에는 ‘우리 할머니다’ 라고 새겨져 있어요. 뭔가 되게 뭉클한 느낌이에요. 할아버지들이 술 드시고 오셔서 우리 할매라고 정말 그러시더라고요."

중키에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다.

한달 열흘 째 노숙을 하며 전국에 있는 위안부 기림비, 평화의 소녀상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는 소녀상 지킴이 대학생 김세진 씨.

경상도를 돌고, 배를 타고 제주에 갔다가 다시 뭍으로... 전라도를 돌아 충청도로 올라온 세진 씨의 화구함에는 돌돌 말린 마분지가 가득하다. 40여 일 간 그린 소녀상 그림이 서른 점 가까이 된다. 시외버스와 배를 타고 다니면서도 참 부지런히 다닌 셈이다.

한 장 한 장 수채화 그림을 넘겨가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세진 씨에게는 어느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소녀상이 없다.

두 팔 벌려 환히 맞아주는 통영의 돌로 만든 소녀상도 좋았고, 포항은 어린이집 옆에 있어서 아이들이 소녀상 앞에서 해맑게 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단다. 4.3 항쟁의 기운이 서려있는 붉은 동백꽃이 함께 있는 제주의 소녀상도 참 좋았단다. 아, 충남 논산의 소녀상은 밤에도 환하게 조명을 밝혀놓아서 사람들이 찾기에도 좋았는데, 그 앞에서 노숙하는 세진 씨는 밤새 온갖 벌레들의 향연이 되어서 좀 괴로웠다고.

상명대 만화학과에 재학 중이니 원래 그림이 업이긴 했다지만, 전국에 있는 소녀상을 모두 그려야겠다고 생각 한 건 갑작스러웠다.

"광화문에서 소녀상 지킴이 농성했잖아요. 그거 하는데 누가 지도를 보내주더라고요. 전국에 있는 소녀상이 모두 나와 있는 지도인데, 보자마자 번뜩 했어요. 아, 내가 할 일이 이거구나.”

세진 씨가 인생의 순례길에 오르게 한 지도는 바로 KBS 데이터저널리즘팀이 제작한 우리동네 소녀상 지도. 우리 동네 가까이 어디에 소녀상이 있는지, 사람이 많은 곳인지 등 소녀상의 위치와 사진을 꼼꼼히 기재해놓은 인터랙티브 지도다.

처음엔 50개 정도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60곳이 넘는다며- 현재 우리나라 소녀상 67곳 – 좀 더 부지런히 다니고 있다는 세진 씨.

처음으로 전국 순례를 떠나 소녀상 그림을 시작한 곳은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논란의 중심에 섰던 부산 영사관 앞 소녀상이었다.

"10차선 도로 앞에 있어요, 소녀상이. 왜 지킴이가 없는지 알겠더라고요. 밤새 소녀상 앞에서 자는데, 거대한 트럭과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차들 소리, 전조등이 무섭더라고요. 경찰은 되게 따뜻했어요. 서울 광화문이랑 분위기가 완전 다르더라고요. 신경도 많이 써주시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기온은 31도, 태양이 내리꽂는다. 커다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채색작업을 시작한다. 붉은 연필로 스케치를 하는 데 두 시간 가량, 수채화구로 채색하는 데는 세 시간 가량이 걸린다. 앞으로 남은 여정은 천안, 경기도, 서울까지 30여 곳. 절반 정도 온 셈이다.

"시내버스 요금 4,500원, 고속버스가 일이만원, 밥값하고, 더우니까 물을 많이 마셔서... 하루 5, 6만원 정도 들 걸로 예상하고 공사현장에서 석달 간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뭐 집에 손벌릴 형편은 어차피 안되고요...(웃음)"

취재 말미 몇 가지 인적 사항을 물었다.

"몇 살이에요?"
"저요... 서른이에요."
앳되어 보이는데, 나이는 제법 있다.
"부모님은 ..."
말을 다 떼지 않았는데도 대답이 나온다.
"어머니는 저 하고 싶은 거 끝까지 해보라고 하셨고요. 아버지는...." 말을 흐린다.

소녀상 그림을 다 끝내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기부하고, 웹툰 <송곳>을 그린 최규석 작가처럼 인권에 대한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도 언젠가는 세진 씨를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아니 실은 이미 이해하고 계실 것 같다.

유난히 무덥더니 밤에는 빗방울이 떨어지던 그날 밤. 세진 씨는 인근 커피숍에서 잠을 자며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카페 사장님이 커다란 짐보따리를 들고 온 세진 씨에게 이것저것 한참 묻더니 저녁도 사주시고, 열쇠를 주며 그날 밤 자고 가라고 하셨단다. 만나보니 웬걸 여사장님이시다. 처음 보는 청년인데 선뜻 잠자리를 내어주신 이유는 여쭸더니...

"내가 못하는 일을 대신 해준다는 느낌...내 마음 속에는 있는데...항상 있기는 있는데... 못하잖아요. 그걸 나 대신 해주니까요."

청주에서 뿐 아니었다. 해남에서도, 남해에서도, 순천에서도... 소녀상을 그리며 노숙하는 김세진 씨에게 시민들은 잠자리를 제공하거나, 식사를 사다 놓거나, 비닐봉다리에 이것저것 챙겨서 놓아주거나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놓지 않았다. 아마 그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30일(금요일) 미국 조지아주 브룩헤이븐시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열린다. 미국에 세워지는 세번째 소녀상이다. 원래는 조지아주 애틀랜타 국립민권인권센터에 설치하려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브룩헤이븐시로 옮겨지게 됐다. 방해공작의 주범인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주재 일본 총영사인 다카시 총영사는 지금도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망언을 서슴치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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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잊지 않겠습니다” 수채화에 담긴 소녀들 누굴까
    • 입력 2017-06-29 09:59:56
    • 수정2017-06-29 10:57:51
    사회
"담양은 대나무숲 바로 앞에 소녀상이 있어요. 사각사각 댓바람 소리를 들으며 소녀상이 앉아있어요.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에요."

"남해 숙이공원에 있는 소녀상은 이름이 숙이 할머니래요. 1938년 남해에서 나물을 캐다가 붙잡혀 가신 숙이 할머니 이름을 딴 거래요. 그래서 남해 소녀상에는 소쿠리랑 호미가 있어요. 소녀상 만든 거 보시고 숙이 할머니가 많이 우셨대요."

"부산 초읍에 있는 소녀상 옆에는 ‘우리 할머니다’ 라고 새겨져 있어요. 뭔가 되게 뭉클한 느낌이에요. 할아버지들이 술 드시고 오셔서 우리 할매라고 정말 그러시더라고요."

중키에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다.

한달 열흘 째 노숙을 하며 전국에 있는 위안부 기림비, 평화의 소녀상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는 소녀상 지킴이 대학생 김세진 씨.

경상도를 돌고, 배를 타고 제주에 갔다가 다시 뭍으로... 전라도를 돌아 충청도로 올라온 세진 씨의 화구함에는 돌돌 말린 마분지가 가득하다. 40여 일 간 그린 소녀상 그림이 서른 점 가까이 된다. 시외버스와 배를 타고 다니면서도 참 부지런히 다닌 셈이다.

한 장 한 장 수채화 그림을 넘겨가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세진 씨에게는 어느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소녀상이 없다.

두 팔 벌려 환히 맞아주는 통영의 돌로 만든 소녀상도 좋았고, 포항은 어린이집 옆에 있어서 아이들이 소녀상 앞에서 해맑게 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단다. 4.3 항쟁의 기운이 서려있는 붉은 동백꽃이 함께 있는 제주의 소녀상도 참 좋았단다. 아, 충남 논산의 소녀상은 밤에도 환하게 조명을 밝혀놓아서 사람들이 찾기에도 좋았는데, 그 앞에서 노숙하는 세진 씨는 밤새 온갖 벌레들의 향연이 되어서 좀 괴로웠다고.

상명대 만화학과에 재학 중이니 원래 그림이 업이긴 했다지만, 전국에 있는 소녀상을 모두 그려야겠다고 생각 한 건 갑작스러웠다.

"광화문에서 소녀상 지킴이 농성했잖아요. 그거 하는데 누가 지도를 보내주더라고요. 전국에 있는 소녀상이 모두 나와 있는 지도인데, 보자마자 번뜩 했어요. 아, 내가 할 일이 이거구나.”

세진 씨가 인생의 순례길에 오르게 한 지도는 바로 KBS 데이터저널리즘팀이 제작한 우리동네 소녀상 지도. 우리 동네 가까이 어디에 소녀상이 있는지, 사람이 많은 곳인지 등 소녀상의 위치와 사진을 꼼꼼히 기재해놓은 인터랙티브 지도다.

처음엔 50개 정도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60곳이 넘는다며- 현재 우리나라 소녀상 67곳 – 좀 더 부지런히 다니고 있다는 세진 씨.

처음으로 전국 순례를 떠나 소녀상 그림을 시작한 곳은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논란의 중심에 섰던 부산 영사관 앞 소녀상이었다.

"10차선 도로 앞에 있어요, 소녀상이. 왜 지킴이가 없는지 알겠더라고요. 밤새 소녀상 앞에서 자는데, 거대한 트럭과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차들 소리, 전조등이 무섭더라고요. 경찰은 되게 따뜻했어요. 서울 광화문이랑 분위기가 완전 다르더라고요. 신경도 많이 써주시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기온은 31도, 태양이 내리꽂는다. 커다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채색작업을 시작한다. 붉은 연필로 스케치를 하는 데 두 시간 가량, 수채화구로 채색하는 데는 세 시간 가량이 걸린다. 앞으로 남은 여정은 천안, 경기도, 서울까지 30여 곳. 절반 정도 온 셈이다.

"시내버스 요금 4,500원, 고속버스가 일이만원, 밥값하고, 더우니까 물을 많이 마셔서... 하루 5, 6만원 정도 들 걸로 예상하고 공사현장에서 석달 간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뭐 집에 손벌릴 형편은 어차피 안되고요...(웃음)"

취재 말미 몇 가지 인적 사항을 물었다.

"몇 살이에요?"
"저요... 서른이에요."
앳되어 보이는데, 나이는 제법 있다.
"부모님은 ..."
말을 다 떼지 않았는데도 대답이 나온다.
"어머니는 저 하고 싶은 거 끝까지 해보라고 하셨고요. 아버지는...." 말을 흐린다.

소녀상 그림을 다 끝내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기부하고, 웹툰 <송곳>을 그린 최규석 작가처럼 인권에 대한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도 언젠가는 세진 씨를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아니 실은 이미 이해하고 계실 것 같다.

유난히 무덥더니 밤에는 빗방울이 떨어지던 그날 밤. 세진 씨는 인근 커피숍에서 잠을 자며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카페 사장님이 커다란 짐보따리를 들고 온 세진 씨에게 이것저것 한참 묻더니 저녁도 사주시고, 열쇠를 주며 그날 밤 자고 가라고 하셨단다. 만나보니 웬걸 여사장님이시다. 처음 보는 청년인데 선뜻 잠자리를 내어주신 이유는 여쭸더니...

"내가 못하는 일을 대신 해준다는 느낌...내 마음 속에는 있는데...항상 있기는 있는데... 못하잖아요. 그걸 나 대신 해주니까요."

청주에서 뿐 아니었다. 해남에서도, 남해에서도, 순천에서도... 소녀상을 그리며 노숙하는 김세진 씨에게 시민들은 잠자리를 제공하거나, 식사를 사다 놓거나, 비닐봉다리에 이것저것 챙겨서 놓아주거나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놓지 않았다. 아마 그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30일(금요일) 미국 조지아주 브룩헤이븐시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열린다. 미국에 세워지는 세번째 소녀상이다. 원래는 조지아주 애틀랜타 국립민권인권센터에 설치하려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브룩헤이븐시로 옮겨지게 됐다. 방해공작의 주범인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주재 일본 총영사인 다카시 총영사는 지금도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망언을 서슴치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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