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호, 아르헨에 완패 ‘16강 적신호’

입력 2010.06.17 (22:27)

수정 2010.06.17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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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말라 태극전사여! 16강을 향한 희망은 남아있다'

붉은 전사들이 불굴의 투혼으로 5천만명 국민의 성원에 화답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한국 축구가 검은 대륙의 최남단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심장인 요하네스버그에서 월드컵 출전 사상 첫 원정 16강 목표를 향한 간절한 몸부림에도 두 차례나 월드컵을 제패했던 아르헨티나의 높은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을 비롯한 전국을 붉은 물결로 채운 157만여명의 거리 응원 인파와 그라운드에서 쓰러질지언정 포기할 수 없었던 태극전사들은 90분의 사투가 끝나자 아쉬움의 탄식을 쏟아냈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은 17일(한국시간) 요하네스버그의 사커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B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박주영의 자책골에 이어 곤살로 이과인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1-4로 무릎을 꿇었다.

이청용의 만회골로 가까스로 영패를 모면한 완패였다.

한국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에서 3점차 이상차로 패한 것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에서 네덜란드에 0-5로 참패한 이후 12년 만이다.

조별리그 개막전에서 유럽의 복병 그리스를 2-0으로 완파하고 기분 좋게 출발했던 한국은 우승 후보로 꼽히는 아르헨티나에 덜미를 잡히면서 1승1패를 기록했다.

한국은 23일 오전 3시30분 더반의 모저스 마비다 스타디움에서 나이지리아와 조별리그 3차전을 치른다.

2연승을 달린 아르헨티나에 B조 선두 자리를 내준 한국은 나이지리아와 최종전에서 승리한다면 조 2위 자리를 꿰차 16강에 오를 가능성은 살아 있다.

한국은 이날 패배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1-3 패배를 안겼던 아르헨티나에 또 한 번 덜미를 잡혔다. 남미팀과 역대 상대 전적에서도 1무3패로 크게 뒤져 있다.

허정무 감독은 박주영을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세우고 염기훈과 이청용을 좌우 날개로 펴는 4-2-3-1 전형을 구사했다.

`캡틴' 박지성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배치해 박주영의 뒤를 받치는 한편 직접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노리게 했다.

중앙 미드필더는 김정우와 기성용이 호흡을 맞추고 포백 수비라인은 왼쪽부터 이영표-이정수-조용형-오범석이 늘어섰다. 골대는 그리스와 경기에 이어 정성룡이 지켰다.

그리스와 1차전 때의 4-4-2 포메이션에서 수비에 중점을 둔 4-2-3-1로 바꿨고 오른쪽 풀백으로 차두리 대신 발이 빠른 오범석이 전진 배치한 게 달라진 점이었다.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이 지휘하는 아르헨티나는 이과인과 카를로스 테베스를 투톱에 배치하고 바로 밑에 리오넬 메시를 세우는 4-3-1-2 카드로 한국에 맞섰다.

이과인을 원톱으로 출격시켰던 기존 시스템보다 공격적인 형태로 득점을 노리겠다는 마라도나 감독의 승부수였다.

8만4천490명을 수용하는 사커시티 스타디움은 아르헨티나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 함성으로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 연호가 묻혔고 아르헨티나가 메시와 테베스, 이과인의 3각편대를 앞세워 경기 초반부터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 메시가 경기를 조율하는 한편 날카로운 왼발 슈팅으로 한국의 골문을 위협했고 저돌적인 테베스도 수비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화려한 개인기와 짧은 패스로 한국 수비진을 뒤흔든 아르헨티나가 볼 점유율을 높여가며 득점 기회를 엿봤다.

한국은 전반 10분 메시를 수비하던 염기훈이 메시와 엉키면서 첫 옐로카드를 받는 등 몸을 던진 태클로 공세를 막아냈지만 전반 17분 뼈아픈 자책골로 선제골을 헌납했다.

한국은 앙헬 디마리아를 수비하던 오범석의 파울로 왼쪽 페널티지역에서 프리킥을 내줬고 `왼발 마술사' 메시가 키커로 나섰다.

메시는 공격수들의 머리를 겨냥해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고 골지역 정면에서 살짝 휘어진 공은 박주영의 오른쪽 정강이를 맞고 굴절됐다. 골키퍼 정성룡이 왼발을 뻗어봤지만 공은 오른쪽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르헨티나의 공세에 기를 펴지 못하던 한국은 1분 뒤 기성용이 오른발 중거리 슈팅을 날렸지만 크로스바를 살짝 넘어갔다.

0-1로 끌려가던 한국은 전반 33분 또 한 번 아르헨티나에 골문을 내줬다.

아르헨티나는 로드리게스가 왼쪽에서 크로스를 올려주자 니콜라스 부르디소가 백헤딩을 했고 오른쪽 골지역에서 도사리던 이과인이 헤딩으로 우겨넣어 2-0을 만들었다.

2점차로 뒤져 실의에 빠졌던 태극전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강한 투지와 끈기로 추가골을 만들었다. 해결사는 월드컵 무대에 데뷔한 22세의 미드필더 이청용이었다.

이청용은 전반 추가 시간에 후방에서 길게 올라온 공을 박주영이 헤딩으로 떨어뜨려 주자 문전으로 돌진했다. 수비수 마르틴 데미첼리스가 걷어내려고 주춤하는 사이 이를 놓치지 않고 공을 빼앗은 뒤 오른발 아웃사이드 슈팅을 날렸다. 골키퍼 세르히모 로메로는 이청용의 감각적인 슈팅에 몸의 중심을 잃었고 공은 왼쪽 골망을 세차게 흔들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볼턴 원더러스에서 첫 시즌 5골 8도움의 불꽃 활약으로 한국인 프리미어리그의 새로운 역사를 썼던 이청용이 최고의 무대에서 뽑은 마수걸이 골이었다.

허정무 감독은 후반 들어 기성용을 빼고 김남일을 투입해 김정우와 더블 볼란테로 세워 수비를 강화하면서도 염기훈을 박주영의 투톱 파트너로 내세워 추격골을 노렸다.

그러나 후반 12분 염기훈이 동점골 찬스를 놓친 게 뼈아팠다. 역습 상황에서 중앙을 단독 드리블로 돌파한 이청용이 오른쪽으로 공을 살짝 빼줬지만 염기훈이 왼발로 강하게 찬 게 옆 그물을 때리고 말았다. 2-2를 만들 절호의 기회를 못 살린 게 아쉬웠다.

실점 위기를 넘긴 아르헨티나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이과인과 메시가 헐거운 한국의 수비진을 농락했다.

메시는 후반 31분 왼쪽 페널티지역을 돌파하고 나서 왼발 슈팅을 날렸으나 공이 골키퍼에 막히자 재차 찬 공을 찼다. 공은 왼쪽 골대를 맞고 튀어나왔고 이과인이 달려들며 빈 골문에 차 넣었다. 이과인이 마무리했지만 메시가 사실상 만든 골이었다.

이과인은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다가 골을 주워 넣었지만 부심의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이과인은 이어 4분 뒤 테베스 교체 선수로 투입된 세르히오 아궤로가 메시의 패스를 받아 공을 띄워 주자 헤딩슛을 꽂아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이과인이 이날 경기 최우수선수로 선정됐지만 메시도 세 차례 득점에 이바지하며 최고의 선수라는 명성을 입증했다.

한국은 1-4로 크게 뒤진 후반 37분 박주영을 빼고 이동국을 투입해 막판 공세에 나섰지만 한 번 기세가 오른 아르헨티나의 벽을 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태극전사들은 붉은악마 응원단의 박수를 받으며 허탈한 표정으로 그라운드에서 내려왔다. 선수로 뛰었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마라도나에 거친 태클을 구사했음에도 1-3으로 패했던 허정무 감독은 마라도나와 사령탑 대결에서도 3점차 패배를 당해 설욕하지 못했다.

허정무 감독은 "오늘 선수들이 열심히 싸웠지만 경기 흐름을 타지 못한 게 패인이다. 염기훈이 찬스에서 넣어주었으면 결정적인 분위기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었는데 기회를 날렸다. 16강 진출을 결정하는 나이지리아와 3차전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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