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두 개의 양심]㉝ ‘국정원 대선 개입’ 1심 재판장…질문 세례에 “전혀 아냐” 연발
입력 2021.02.01 (10:50)
수정 2021.02.0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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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진 겁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따라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합니다.
서른 세 번째 순서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에 2020년 11월 27일 증인으로 출석한 이범균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1기)의 증언을 살펴봅니다.
이 부장판사는 2013~2014년에 진행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 사건 1심 재판장이었습니다. 2006~2007년 대법원에서 일할 땐 양승태 당시 대법관의 전속 재판연구관을 맡기도 했습니다.
‘사법농단’ 사건 수사팀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 등을 위해, 당시 청와대가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원 전 원장 재판 상황을 꾸준히 파악하면서 일부 재판 과정에 개입하려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부장판사의 경우, 1심 재판 도중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사건 진행 상황을 공유했다고 검찰은 의심합니다. 또 항소심 판결 선고 직후엔 이 부장판사가 1심과 항소심 판결을 비교 분석한 문건을 임 전 차장에게 전달했고, 결국 이 문건이 대법원 재판연구관실에까지 전달됐다고 검찰은 주장합니다.
검찰은 이같은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이 부장판사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피고인들의 변호인은 반대했지만 결국 재판부가 두 차례 소환을 시도한 끝에 증인신문이 성사됐습니다.
※ 증인신문 전까지 벌어진 검사와 증인, 변호인의 공방은 다음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연관 기사] 현직 고법부장판사, ‘사법농단’ 재판 증인 소환에 불응…정당한 사유 있나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13071
#1. 신속·정확함의 비결은?
이 부장판사에 대한 검찰의 의심을 불러온 건, 법원행정처에서 발견된 원 전 원장 1심 관련 내부 문건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행정처 사법지원실 심의관으로 일했던 박성준 판사가 2013년 10월 작성한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공소장 변경 관련 보고' 문건입니다.
2013년 10월 18일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박성준 심의관이 작성한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공소장 변경 관련 보고” 문건. 증인신문 과정에서 실물화상기를 통해 법정에 공개된 것을 기자가 일부 받아적은 내용이다.
원 전 원장 사건 1심 재판이 8차례 열린 뒤인 2013년 10월 18일, 수사팀은 공소사실을 추가하는 취지의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를 법원에 냈습니다.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이 윗선 보고 누락·항명 논란으로 수사에서 배제된 바로 다음날의 일로, 정치권에서도 큰 파장을 낳았던 사건이었습니다.
수사팀은 10월 18일 새벽 법원 당직실에 신청서를 우선 접수한 다음, 같은 날 오전 9시 35분 주심 판사의 이메일로 신청서 파일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는데요. 이렇게 재판부에 접수된 신청서의 내용을, 당일 저녁 법원행정처가 바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사실이 위 문건으로 드러난 겁니다.
검찰의 의심은 당시 재판장이었던 이 부장판사에게로 향했습니다.
- 검사 :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은 검찰의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가 접수된 당일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공소장 변경 관련 보고’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했습니다. 이 사실 알고 계십니까?
- 증인: 전혀 알지 못합니다.
- 검사: 이 문건에는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를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공소장 변경의 취지와 추가된 범죄사실 내용까지 정확히 기재돼 있습니다. 증인 재판부의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를 법원행정처에 전달했거나, 공소장 변경 취지·추가된 범죄사실을 알려주었던 건 아닌가요?
- 증인: 전혀 아닙니다. 어떤 경위로 저런 문건이 작성됐는지 지금도 알지 못하고, 당시에도 저런 문건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
- 검사: 신청서는 10월 22일 9회 공판기일에 법정에서 진술됐습니다. 그럼 그 이전까진 외부에서 변경된 공소사실의 내용을 알 수 없고, 재판부 승인 없이는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가 외부로 유출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 증인: 정식으로는 그렇습니다.
국정원 댓글공작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았던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은 수사 과정에서 상부에 보고를 누락했다는 이유 등으로 정직 1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2013년 12월 징계위에 출석한 뒤 귀가하는모습.
이 부장판사는 당시 수사팀이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며 보낸 이메일을,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포워딩하도록 주심 판사에게 지시한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검찰도 확인했듯이 포워딩한 이메일엔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 파일이 첨부되지 않았고, 다만 수사팀이 이메일에서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등 부적절해 보이는 메시지를 보내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법원행정처에 상황을 공유했던 것뿐이라고 증언했습니다.
- 증인: 공소장 별지의 양이 방대해서 저희가 파일로 받을 필요가 있어서 주심 판사의 이메일 주소를 검사에게 주었는데, 거기에 검사들이 (검찰 상부에 보고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등) 수사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듯한 내용이 들어 있었고. 그것을 공판기록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검사가 판사의 개인 이메일로 그러한 내용을 보내는 건 매우 부적절하다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법정에서 “이러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나중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검사와의 간담회나 이런 기회에 이러지 말아달라고 법원 측 요구사항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되어서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검사는 검찰 내부 동향을 보고하는 차원에서 임종헌 실장에게 검사의 메일을 공유한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이 부장판사는 “전혀 아닙니다”라고 답했습니다.
#2. 전혀 그런 적 없다
법원행정처에서 생산된 원 전 원장 재판 관련 문건 중에는, 매 재판 진행 상황과 공소장 변경 과정, 사건의 주요 쟁점과 특이사항까지 정리된 문건도 있었습니다.
이는 2018년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법원 내부는 물론 일반에 공개한 문건이기도 한데, 증인은 검사의 신문 과정에서 “(문건을) 오늘 처음 본다”고 말했습니다.
2014년 1월 22일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박성준 심의관이 작성한 ‘국정원 대선개입의혹 사건[서울중앙지법 2013고합577] 공판진행상황’ 문건의 일부. 기획조정실 요청에 따라 작성돼 임종헌 당시 기조실장에게 보고됐다.
- 검사: 이 문건에는 재판부가 재판 진행 상황 등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정리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증인이 특이사항을 법원행정처에 보고하거나 알려준 사실이 있습니까?
- 증인: 전혀 그런 적 없다고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이걸 누가, 언제 작성한 문건입니까?
- 검사: 법원행정처에서 작성된 문건입니다.
- 증인: 언제 작성된 문건입니까? 아예 공판요지가 있는 걸로 봐서 조서를 보고 나중에 사후적으로 작성한 거 아닌가 싶은데, 저는 모르겠습니다. 작성한 분에게 여쭤보십시오.
검사는 아랑곳않고 또 다른 재판 관련 문건을 증인에게 제시했습니다. 이 역시 대법원 특별조사단이 2018년 공개한 문건이지만, 이 부장판사는 처음 보는 문건이라고 했습니다.
2014년 9월 11일로 예정된 원세훈 사건 1심 선고기일을 앞두고, 사법지원실 박성준 심의관이 8월 23일 작성한 ‘원세훈[전 국정원장] 사건 개요’ 문건. 이 역시 기획조정실 요청에 따라 작성돼 임종헌 당시 기조실장에게 보고됐다.
- 검사: 이 문건엔 재판의 주요 쟁점과 향후 전망 등이 정리돼 있는데, 증인은 선고 전에 임종헌에게 주요 쟁점이나 그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한 사실이 있나요?
- 증인: [언성 높이며] 전혀 그런 적 없습니다. 어떤 근거로 그런 질문하시는지나 좀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문제의 문건들을 작성한 박성준 판사는 검찰 조사에서, 당시 시민단체(참여연대)나 언론사(시사IN)가 홈페이지에 상세히 연재한 원세훈 사건 1심 재판 진행상황을 참고해 문건을 작성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시사주간지 시사IN에서 운영했던 원세훈 재판 연재 사이트
#3. 어떤 만남, 어떤 관계?
검사는 계속 의심을 거두지 않으면서, 임종헌 당시 기조실장과 이 부장판사 사이의 만남에 대해서도 세부적으로 추궁했습니다.
- 검사: 증인은 전 국정원장 사건 진행 과정에서 재판부 야근 후 삼풍백화점 입구 경사길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는 임종헌 실장과 마주쳐 함께 술을 마셨다고 (대법원 특별조사단 조사에서) 진술했는데. 그 술집은 현재 ‘버지니아’ 상호의 술집 맞은 편에 있는 곳인가요?
- 증인: 아닙니다. 무슨... 계란말이... 삼겹살... 주황색 간판있는 집. 요새도 있는 것을 봤습니다.
- 검사: 그럼 삼풍백화점 입구 경사길에 있는 술집은 맞습니까?
- 증인: 네, 맞습니다. 퇴근하다가도 봤습니다. 삼겹살, 계란말이... 밖에 천막 치고 만드는 공간도 있고 그렇습니다.
- 검사: 임종헌 주거지에 비추어 보면, 임종헌 실장이 퇴근길에 그곳을 지나가진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미리 약속하고 임종헌과 만났던 거 아닙니까?
- 증인: 전혀 아닙니다. 삼풍아파트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2018년 7월 자택 압수수색 당시 검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모습.
검사는 나중엔 이 부장판사에게 임종헌 당시 기조실장과 사이가 어땠는지를 묻기도 했는데, 이 부장판사는 이런 걸 대체 왜 묻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 검사: 증인은 임종헌 실장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나요?
- 증인: 어느 정도 친분이라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검사: 재판부 업무적 이외에 사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지.
- 증인: 몇 번 있었을 거 같습니다.
- 검사: 서로 연락을... 증인께서도 먼저 하고 그런 사이였나요?
- 증인: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고 이런저런 자리에서, 사적인 자리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
- 검사: […] 증인과 이보형 판사(원세훈 사건 주심 판사)는 전 국정원장 재판을 하는 동안 최소한 1번 이상 임종헌 실장을 만난 걸로 보이는데, 재판 관련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가요?
- 증인: 없습니다.
결국 증인이 임종헌 당시 기조실장과 원세훈 전 원장 사건 1심 진행 상황을 공유했다는 의심은, 이날 증인신문에서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못했습니다.
#4. 쓴 사람 따로, 보낸 사람 따로
이 부장판사의 재판부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 징역형의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한 지 약 5개월 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파기하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한 뒤 원 전 원장을 법정 구속했습니다.
이같은 판결이 있은 지 하루 뒤, 이 부장판사는 형사수석 부장판사에게 원 전 원장 사건 1심과 항소심 판결을 비교·분석한 문건을 메일로 보고했습니다.
검찰 조사 결과 해당 문건은 이 부장판사가 소속됐던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 부장에게서 임종헌 법원행정처 기조실장, 그리고 곧 해당 사건 상고심이 접수될 대법원 재판연구관실의 수석·선임재판연구관에게까지 전달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검사가 이 부장판사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부장판사는 문제의 분석 문건을 본인이 아닌 배석 판사(원세훈 전 원장 사건 1심 주심)가 작성했고, 이를 아무런 수정 없이 형사수석 부장에게 공유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 검사: 증인이 증인 불출석 사유서에 첨부해 제출한 진술서에 의하면, 이 분석 문건은 이보형 판사가 항소심 판결 선고 다음날인 2015년 2월 10일 출근하자마자 법원 사이트에서 항소심 판결문을 내려받아 1심 판결이 어떤 점에서 달라졌는지 분석하고 작성했다는 건데. 사실인가요?
- 증인: 네, 맞습니다.
- 검사: 증인이 항소심 판결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분석해보라고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이보형 판사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스스로 분석해 정리한 겁니까?
- 증인: 네, 그렇습니다.
검사의 주신문 이후 이어진 재판부의 질문에서 이 부장판사의 부연 설명을 좀더 들을 수 있었습니다.
- 좌배석 판사(주심): 증인이 이보형 판사하고 같이 근무한 기간이 어느 정도 되십니까?
- 증인: 2년입니다.
- 좌배석 판사: 2년 간의 업무 경험으로 봤을 때, 이보형 판사의 그런 식의 문건 작성·업무 처리 내용이 통상적인 거였습니까?
- 증인: 그렇습니다. 자기가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서 쓴 판결인데 결론이 바뀌었으면, 그거에 대해서 왜 바뀌었는지 찾아보고, 뭐가 달라졌는지 확인하고 하는... 통상 일을 그렇게 처 리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특별히 제가 이미 인사발령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책상에 앉아서 일을 열심히 하던 그런 시기가 아니어서. 인사 다니고, 회식하고... 그래서 아마 저한테도 참고하시라고 그렇게 만들어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사가 제기한 여러 의혹을 “전혀 아니다”라며 단호히 부인한 이 부장판사.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이 “공소사실과 (증인은)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이라 따로 반대신문을 안하겠다”고 밝히면서, 이날 증인신문은 1시간 10분 만에 끝났습니다.
증언을 마친 이 부장판사는 피고인석에 앉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법정을 떠났습니다. 그는 법관 정기인사를 앞두고 사직서를 제출해, 2021년 2월 9일자로 법관직에서 물러날 예정입니다.
[연관 기사] 현직 고법부장판사, ‘사법농단’ 재판 증인 소환에 불응…정당한 사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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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사와 두 개의 양심]㉝ ‘국정원 대선 개입’ 1심 재판장…질문 세례에 “전혀 아냐” 연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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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2-01 10:50:13
- 수정2021-02-01 11:06:58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진 겁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따라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합니다.
서른 세 번째 순서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에 2020년 11월 27일 증인으로 출석한 이범균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1기)의 증언을 살펴봅니다.
이 부장판사는 2013~2014년에 진행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 사건 1심 재판장이었습니다. 2006~2007년 대법원에서 일할 땐 양승태 당시 대법관의 전속 재판연구관을 맡기도 했습니다.
‘사법농단’ 사건 수사팀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 등을 위해, 당시 청와대가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원 전 원장 재판 상황을 꾸준히 파악하면서 일부 재판 과정에 개입하려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부장판사의 경우, 1심 재판 도중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사건 진행 상황을 공유했다고 검찰은 의심합니다. 또 항소심 판결 선고 직후엔 이 부장판사가 1심과 항소심 판결을 비교 분석한 문건을 임 전 차장에게 전달했고, 결국 이 문건이 대법원 재판연구관실에까지 전달됐다고 검찰은 주장합니다.
검찰은 이같은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이 부장판사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피고인들의 변호인은 반대했지만 결국 재판부가 두 차례 소환을 시도한 끝에 증인신문이 성사됐습니다.
※ 증인신문 전까지 벌어진 검사와 증인, 변호인의 공방은 다음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연관 기사] 현직 고법부장판사, ‘사법농단’ 재판 증인 소환에 불응…정당한 사유 있나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13071
#1. 신속·정확함의 비결은?
이 부장판사에 대한 검찰의 의심을 불러온 건, 법원행정처에서 발견된 원 전 원장 1심 관련 내부 문건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행정처 사법지원실 심의관으로 일했던 박성준 판사가 2013년 10월 작성한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공소장 변경 관련 보고' 문건입니다.
원 전 원장 사건 1심 재판이 8차례 열린 뒤인 2013년 10월 18일, 수사팀은 공소사실을 추가하는 취지의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를 법원에 냈습니다.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이 윗선 보고 누락·항명 논란으로 수사에서 배제된 바로 다음날의 일로, 정치권에서도 큰 파장을 낳았던 사건이었습니다.
수사팀은 10월 18일 새벽 법원 당직실에 신청서를 우선 접수한 다음, 같은 날 오전 9시 35분 주심 판사의 이메일로 신청서 파일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는데요. 이렇게 재판부에 접수된 신청서의 내용을, 당일 저녁 법원행정처가 바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사실이 위 문건으로 드러난 겁니다.
검찰의 의심은 당시 재판장이었던 이 부장판사에게로 향했습니다.
- 검사 :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은 검찰의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가 접수된 당일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공소장 변경 관련 보고’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했습니다. 이 사실 알고 계십니까?
- 증인: 전혀 알지 못합니다.
- 검사: 이 문건에는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를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공소장 변경의 취지와 추가된 범죄사실 내용까지 정확히 기재돼 있습니다. 증인 재판부의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를 법원행정처에 전달했거나, 공소장 변경 취지·추가된 범죄사실을 알려주었던 건 아닌가요?
- 증인: 전혀 아닙니다. 어떤 경위로 저런 문건이 작성됐는지 지금도 알지 못하고, 당시에도 저런 문건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
- 검사: 신청서는 10월 22일 9회 공판기일에 법정에서 진술됐습니다. 그럼 그 이전까진 외부에서 변경된 공소사실의 내용을 알 수 없고, 재판부 승인 없이는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가 외부로 유출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 증인: 정식으로는 그렇습니다.
이 부장판사는 당시 수사팀이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며 보낸 이메일을,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포워딩하도록 주심 판사에게 지시한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검찰도 확인했듯이 포워딩한 이메일엔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 파일이 첨부되지 않았고, 다만 수사팀이 이메일에서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등 부적절해 보이는 메시지를 보내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법원행정처에 상황을 공유했던 것뿐이라고 증언했습니다.
- 증인: 공소장 별지의 양이 방대해서 저희가 파일로 받을 필요가 있어서 주심 판사의 이메일 주소를 검사에게 주었는데, 거기에 검사들이 (검찰 상부에 보고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등) 수사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듯한 내용이 들어 있었고. 그것을 공판기록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검사가 판사의 개인 이메일로 그러한 내용을 보내는 건 매우 부적절하다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법정에서 “이러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나중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검사와의 간담회나 이런 기회에 이러지 말아달라고 법원 측 요구사항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되어서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검사는 검찰 내부 동향을 보고하는 차원에서 임종헌 실장에게 검사의 메일을 공유한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이 부장판사는 “전혀 아닙니다”라고 답했습니다.
#2. 전혀 그런 적 없다
법원행정처에서 생산된 원 전 원장 재판 관련 문건 중에는, 매 재판 진행 상황과 공소장 변경 과정, 사건의 주요 쟁점과 특이사항까지 정리된 문건도 있었습니다.
이는 2018년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법원 내부는 물론 일반에 공개한 문건이기도 한데, 증인은 검사의 신문 과정에서 “(문건을) 오늘 처음 본다”고 말했습니다.
- 검사: 이 문건에는 재판부가 재판 진행 상황 등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정리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증인이 특이사항을 법원행정처에 보고하거나 알려준 사실이 있습니까?
- 증인: 전혀 그런 적 없다고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이걸 누가, 언제 작성한 문건입니까?
- 검사: 법원행정처에서 작성된 문건입니다.
- 증인: 언제 작성된 문건입니까? 아예 공판요지가 있는 걸로 봐서 조서를 보고 나중에 사후적으로 작성한 거 아닌가 싶은데, 저는 모르겠습니다. 작성한 분에게 여쭤보십시오.
검사는 아랑곳않고 또 다른 재판 관련 문건을 증인에게 제시했습니다. 이 역시 대법원 특별조사단이 2018년 공개한 문건이지만, 이 부장판사는 처음 보는 문건이라고 했습니다.
- 검사: 이 문건엔 재판의 주요 쟁점과 향후 전망 등이 정리돼 있는데, 증인은 선고 전에 임종헌에게 주요 쟁점이나 그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한 사실이 있나요?
- 증인: [언성 높이며] 전혀 그런 적 없습니다. 어떤 근거로 그런 질문하시는지나 좀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문제의 문건들을 작성한 박성준 판사는 검찰 조사에서, 당시 시민단체(참여연대)나 언론사(시사IN)가 홈페이지에 상세히 연재한 원세훈 사건 1심 재판 진행상황을 참고해 문건을 작성했다고 진술했습니다.
#3. 어떤 만남, 어떤 관계?
검사는 계속 의심을 거두지 않으면서, 임종헌 당시 기조실장과 이 부장판사 사이의 만남에 대해서도 세부적으로 추궁했습니다.
- 검사: 증인은 전 국정원장 사건 진행 과정에서 재판부 야근 후 삼풍백화점 입구 경사길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는 임종헌 실장과 마주쳐 함께 술을 마셨다고 (대법원 특별조사단 조사에서) 진술했는데. 그 술집은 현재 ‘버지니아’ 상호의 술집 맞은 편에 있는 곳인가요?
- 증인: 아닙니다. 무슨... 계란말이... 삼겹살... 주황색 간판있는 집. 요새도 있는 것을 봤습니다.
- 검사: 그럼 삼풍백화점 입구 경사길에 있는 술집은 맞습니까?
- 증인: 네, 맞습니다. 퇴근하다가도 봤습니다. 삼겹살, 계란말이... 밖에 천막 치고 만드는 공간도 있고 그렇습니다.
- 검사: 임종헌 주거지에 비추어 보면, 임종헌 실장이 퇴근길에 그곳을 지나가진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미리 약속하고 임종헌과 만났던 거 아닙니까?
- 증인: 전혀 아닙니다. 삼풍아파트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검사는 나중엔 이 부장판사에게 임종헌 당시 기조실장과 사이가 어땠는지를 묻기도 했는데, 이 부장판사는 이런 걸 대체 왜 묻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 검사: 증인은 임종헌 실장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나요?
- 증인: 어느 정도 친분이라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검사: 재판부 업무적 이외에 사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지.
- 증인: 몇 번 있었을 거 같습니다.
- 검사: 서로 연락을... 증인께서도 먼저 하고 그런 사이였나요?
- 증인: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고 이런저런 자리에서, 사적인 자리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
- 검사: […] 증인과 이보형 판사(원세훈 사건 주심 판사)는 전 국정원장 재판을 하는 동안 최소한 1번 이상 임종헌 실장을 만난 걸로 보이는데, 재판 관련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가요?
- 증인: 없습니다.
결국 증인이 임종헌 당시 기조실장과 원세훈 전 원장 사건 1심 진행 상황을 공유했다는 의심은, 이날 증인신문에서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못했습니다.
#4. 쓴 사람 따로, 보낸 사람 따로
이 부장판사의 재판부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 징역형의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한 지 약 5개월 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파기하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한 뒤 원 전 원장을 법정 구속했습니다.
이같은 판결이 있은 지 하루 뒤, 이 부장판사는 형사수석 부장판사에게 원 전 원장 사건 1심과 항소심 판결을 비교·분석한 문건을 메일로 보고했습니다.
검찰 조사 결과 해당 문건은 이 부장판사가 소속됐던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 부장에게서 임종헌 법원행정처 기조실장, 그리고 곧 해당 사건 상고심이 접수될 대법원 재판연구관실의 수석·선임재판연구관에게까지 전달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검사가 이 부장판사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부장판사는 문제의 분석 문건을 본인이 아닌 배석 판사(원세훈 전 원장 사건 1심 주심)가 작성했고, 이를 아무런 수정 없이 형사수석 부장에게 공유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 검사: 증인이 증인 불출석 사유서에 첨부해 제출한 진술서에 의하면, 이 분석 문건은 이보형 판사가 항소심 판결 선고 다음날인 2015년 2월 10일 출근하자마자 법원 사이트에서 항소심 판결문을 내려받아 1심 판결이 어떤 점에서 달라졌는지 분석하고 작성했다는 건데. 사실인가요?
- 증인: 네, 맞습니다.
- 검사: 증인이 항소심 판결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분석해보라고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이보형 판사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스스로 분석해 정리한 겁니까?
- 증인: 네, 그렇습니다.
검사의 주신문 이후 이어진 재판부의 질문에서 이 부장판사의 부연 설명을 좀더 들을 수 있었습니다.
- 좌배석 판사(주심): 증인이 이보형 판사하고 같이 근무한 기간이 어느 정도 되십니까?
- 증인: 2년입니다.
- 좌배석 판사: 2년 간의 업무 경험으로 봤을 때, 이보형 판사의 그런 식의 문건 작성·업무 처리 내용이 통상적인 거였습니까?
- 증인: 그렇습니다. 자기가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서 쓴 판결인데 결론이 바뀌었으면, 그거에 대해서 왜 바뀌었는지 찾아보고, 뭐가 달라졌는지 확인하고 하는... 통상 일을 그렇게 처 리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특별히 제가 이미 인사발령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책상에 앉아서 일을 열심히 하던 그런 시기가 아니어서. 인사 다니고, 회식하고... 그래서 아마 저한테도 참고하시라고 그렇게 만들어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사가 제기한 여러 의혹을 “전혀 아니다”라며 단호히 부인한 이 부장판사.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이 “공소사실과 (증인은)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이라 따로 반대신문을 안하겠다”고 밝히면서, 이날 증인신문은 1시간 10분 만에 끝났습니다.
증언을 마친 이 부장판사는 피고인석에 앉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법정을 떠났습니다. 그는 법관 정기인사를 앞두고 사직서를 제출해, 2021년 2월 9일자로 법관직에서 물러날 예정입니다.
[연관 기사] 현직 고법부장판사, ‘사법농단’ 재판 증인 소환에 불응…정당한 사유 있나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013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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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린 기자 di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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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와 두 개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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