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두 개의 양심]③ “돌아보니 내 진술 잘못”…‘공범 지목’ 판사의 반성법

입력 2019.04.24 (09:30) 수정 2019.06.04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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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재판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세 번째 순서로, 어제(23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서 진행된 이민걸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사법연수원 17기, 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기획조정실장, 현재 정직 상태)에 대한 증인신문을 살펴봅니다.

2015년 8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이민걸 부장판사. 그는 상관이었던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 공범으로 적시됐고, 지난달 초 '재판 개입' 등의 혐의(직권남용)로 재판에 넘겨져 피고인이 됐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사건의 피고인이 다른 피고인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건 이 부장판사가 처음입니다.

2시간 반 정도 이어진 증인신문에서 이 부장판사가 이야기한 '반성'에 대해 돌아보려 합니다.

지난해 9월 12일 검찰 조사를 위해 서울 중앙지검에 출두한 이민걸 부장판사.지난해 9월 12일 검찰 조사를 위해 서울 중앙지검에 출두한 이민걸 부장판사.

#1. 잘못, 오만, 송구…쏟아진 반성의 말들

이민걸 부장판사는 지금까지 증인으로 출석한 그 어떤 판사보다도 '반성한다'는 취지의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의 첫 반성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12월 청와대 비서실장 공관에서 열렸던 은밀한 회의를 논하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여기서 윤병세 외교부장관을 만나,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외교부 측 의견을 전달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지연 방안이나 전원합의체 회부 문제도 함께 논의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 검사: 증인은 … 비서실장 공관 회의 개최 및 법원행정처장의 참석 사실을 언론 통해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표현했는데 맞습니까?
- 증인: 예.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 검사: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증인: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굉장히 부적절하고 잘못됐다고 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 게 왔을 때, 저는 거절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말 필요하면 공식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든지 해야지 그렇게... 만난 경위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면담 자체가 저는 굉장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행정처장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는 증인. 행정처 조직이 오만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 증인: … 이 사건 전체적으로는 한 마디로 행정처가 너무 오만하게 타성에 젖어서... 일을 열심히 한다는 명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서, 그런 면에서 좀 잘못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들고.

- 증인: … 저는 이 사태를 겪으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행정처가 너무 좀 오만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을 좀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저도 개인적으로 상당히 반성을 하고 있는데 …


물론 본인에 대한 반성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임 전 차장과 함께 외교부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대한 외교부 의견서를 논의한 건 잘못이었단 겁니다.

- 검사: 원고나 피고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해관계 있는 국가기관이 의견서를 제출하는데, 행정처가 그 의견서 초안을 검토해준다거나 수정해준다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뭡니까?
- 증인: 아, 그거는 뭐 제가 보면 당연한 얘기인 거 같습니다. 저도 판사로서 근 30년 가까이 일했고요, 공개적으로 법정에서 재판하는 과정에서 의견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재판 외로 비공개적으로 이것을 만나서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 (의견서는) 그냥 제출하면 되는 것이지 그 과정에서 행정처가 외교부하고 만나서 그런 얘기를 나눴다는 거 자체가 저는 개인적으로 돌이켜봤을 때 좀 잘못됐다 생각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변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도 그 부분에 대해선 잘못됐다고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책임의 경중은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은 외교부 의견서를 고쳐준 것도 아니고 주도자가 아닌 편승자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잘못했다는 얘기를 마지막까지 이어갔습니다.

- 재판장: (마지막으로) 그 외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까?
- 증인: 네 간단히 말씀드리면, 여러 가지로 사법행정에서 중추적 역할 하고 있었던 저로서는 여러 가지로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 저 개인적으로는 의견서를 고쳐주거나 그러지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의견서 제출 과정에 제가 뭐 기존에 있던 데 편승했던 건데 개입이 돼서, 외교부하고 비공식적으로라도 의견 나눴다는 거 자체는 굉장히 저로서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


#2. 반성의 반전…"기억 되돌아보니 잘못 진술"

반성에 반성을 거듭한 증인. 하지만 이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재판에서 또 다른 차원의 반성을 꺼내 들었습니다. 과거 검찰 조사에서 자신이 진술한 내용도 다시 돌아봤다, 반성했다는 건데요. 그 반성의 결과라며 법정에서 자신의 주요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임 전 차장의 혐의가 적힌 공소장 내용 일부를 먼저 보시지요.

"피고인은 2016. 9. 29.경 조태열 차관 등과의 면담을 앞두고 이민걸 기획조정실장과 함께 대법원장실로 찾아가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외교부에서 의견서를 낼 단계가 된 것 같다.'라고 말한 후 양승태 대법원장으로부터 '대법원장 임기 내에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겠지만 강제징용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겠다'라는 취지의 말을 듣고, 진행 중인 개별 사건의 구체적 심리 계획으로서 공무상비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이를 조태열 차관 등 외교부 관계자에게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임종헌 공소장 중)

여기서 핵심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겠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부분일 텐데요. 검찰이 이런 공소 사실을 기재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민걸 부장판사의 진술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임종헌 차장님은 외교부에서 이제는 확정적으로 의견서 제출한다는 사실 알았는지, 그때 대법원장님께 '외교부에서 의견서를 낼 단계가 된 거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양승태 대법원장님께서 전원합의체 회부를 검토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하셨고, 또 본인의 임기 중에는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 부장판사는 증인신문 과정에서 검찰에서 이런 진술을 한 사실을 인정했지만, 법정에서 돌연 말을 바꿨습니다.

- 검사: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께서 전원합의체 회부를 검토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임기 중에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맞습니까?
- 증인: 제가 그 부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그 양 대법원장님이 전원합의체 검토를 정확하게, 검토하겠다 추진하겠다 이런 얘기는 안하셨고요, 전원합의체 얘기를 했을 수도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이 사건 의견서 오면 뭐 검토할 것도 있고 신중을 기해야 하는데 과연 임기 중에 제대로 끝날 수 있을까 이런 데 방점을 두셨기 때문에. …

검사가 진술이 번복된 지점을 추궁하자, 이 부장판사는 당황한 듯 상대의 말을 끊어버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양측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자 재판장이 개입했고, 이 부장판사는 "오랜 기간 다시 (기억을) 환기해본 것"이라며 기존 진술을 다시 부정했습니다.

- 검사: … 유독 전원합의체 회부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진술을 안하시는데..
- 증인: [말 끊으며] 아 정확하게 진술 안하는 게 아니라
- 검사: 방금 증언하시기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전원합의체 얘기를 했을 수는 있다고 얘기하셨는데 그게 맞다는 말입니까 아니라는 말입니까?
- 증인: 아니 저는
- 재판장: 증인, 잠깐만요. 그 당시 대화의 방점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그와 같은 대화가 있었는지, 그 여부를 지금 검사가 묻는 것이기 때문에 증인이 그 당시에 들었던 검사가 묻는 그 대화 부분이 증인이 들었는지 그같은 대화가 오갔는지를, 그에 대한 답변을 하면 될 듯합니다.
- 증인: … 제가 이 시기가 지나고 오랜 기간 저도 환기를 다 해봤는데, 제 생각에는 양 대법원장님이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이렇게 얘긴 안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이 부장판사는 이어 임 전 차장이 조태열 당시 외교부 2차관을 만난 자리에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전원합의체 회부를 언급했다는 진술도 번복했습니다. 이유는 역시, 돌아와서 곰곰이 따져보니 기억이 다르다는 거였습니다.

- 검사: 증인은 검찰 조사 시 "임종헌 차장님이 (2016. 9. 29. 외교부 관계자들을 만나)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이 전원합의체에 회부되도록 해보겠다'고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미 위 사건이 재상고된 이후 시기적으로 상당 기간이 흘렀기도 하여 소부에서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임종헌 차장님이 이와 같이 말씀하실 때 특별히 이상하다 생각하진 않았었습니다"라고 진술하였는데 맞습니까?
- 증인: 예, 진술은 그렇게 돼 있는데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사건은 제가 돌아와서 생각해봤습니다. 이때는 그날 그 자리는 임종헌 차장이 이미 오래 전에 외교부와 협의한 대로 의견서 제출을 독촉하는 자리였습니다. … 제가 기억하기로는 전원합의체 회부하겠다, 추진하겠다 이렇게 임종헌 차장이 얘기한 걸로 전혀 저는 이해하지 않았고요, 전원합의체 가게 되면 이런 절차 거치지 않겠느냐 정도로 임종헌 차장님이 얘기하셨던 거 같고 …

검찰에서의 진술 내용을 되돌아보면 머릿속 기억이 달라지는, 이 특별한 반성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증인신문 마지막 순서에 재판장이 진술이 바뀐 이유를 묻자, 이 부장판사는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경황이 없었다"면서 자신의 당시 진술이 검찰에서 잘못 받아들여진 부분이 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이 부장판사는 또 "전원합의체 회부라는 것은 대법관들이 알아서 논의해서 결정할 문제이지, 임종헌 차장이나 행정처에서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대법원 재판에 대해 전원합의체 회부하겠다, 회부 추진하겠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검찰 공소장에 적시된 임 전 차장과 양 전 대법원장의 발언은 아예 불가능한 얘기라고 '원천봉쇄'하기도 했습니다.

#3. 그밖에...

○ 이날 재판에서는 박찬익 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 심의관이 임종헌 전 차장의 지시를 받아 2013년 9월 30일 작성한 "강제동원자 판결 관련 - 외교부와의 관계"라는 대외비 보고서가 공개됐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 "3. 외교부를 배려하여 절차적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방안"이라는 제목 하에 "▣사법부는 재판의 독립이 절대적 가치임(행정기관과의 차이점)"이라는 항목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면 참 아이러니한 대목입니다.

○ 증인으로 소환된 이민걸 부장판사는 재판 시작 8분 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홀로 법정에 들어와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재판 시작을 기다렸는데요. 법정에 들어오기까지 취재진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정직 상태일지라도 소지 중인 법원 출입증을 이용해, 일반인이 이용하지 않는 다른 출입구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증인신문을 마치고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이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과 법원행정처에서 4년 넘게 함께 일한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는 임 전 차장이 피고인석을 향해 걸어올 때 가만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에 잠시 손을 잠시 얹기도 했는데요. 임 전 차장은 이 부장판사에게 줄곧 눈길을 주지 않다가 재판 후반부에 "이런 자리에서 뵙게 돼 여러 가지로 마음이 안 좋은데 사실대로 이야기해주시면 됩니다"라며 직접 간단한 신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 이 부장판사는 행정처 기조실장 시절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대한 외교부 의견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외교부 고위공무원들을 만났는데요. 이때 접촉한 조태열 당시 외교부 2차관과 이기철 당시 외교부 재외동포영사대사는 모두 이 부장판사의 고등학교(서울 중앙고), 대학교(서울대 법학과) 선배였습니다. 이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이 자신에게 "조태열 차관하고 약속이 돼 있다. 고등학교 선배 아니냐"고 먼저 학연을 언급하며 약속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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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③ “돌아보니 내 진술 잘못”…‘공범 지목’ 판사의 반성법
    • 입력 2019-04-24 09:30:32
    • 수정2019-06-04 07:10:43
    취재K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재판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세 번째 순서로, 어제(23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서 진행된 이민걸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사법연수원 17기, 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기획조정실장, 현재 정직 상태)에 대한 증인신문을 살펴봅니다.

2015년 8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이민걸 부장판사. 그는 상관이었던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 공범으로 적시됐고, 지난달 초 '재판 개입' 등의 혐의(직권남용)로 재판에 넘겨져 피고인이 됐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사건의 피고인이 다른 피고인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건 이 부장판사가 처음입니다.

2시간 반 정도 이어진 증인신문에서 이 부장판사가 이야기한 '반성'에 대해 돌아보려 합니다.

지난해 9월 12일 검찰 조사를 위해 서울 중앙지검에 출두한 이민걸 부장판사.
#1. 잘못, 오만, 송구…쏟아진 반성의 말들

이민걸 부장판사는 지금까지 증인으로 출석한 그 어떤 판사보다도 '반성한다'는 취지의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의 첫 반성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12월 청와대 비서실장 공관에서 열렸던 은밀한 회의를 논하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여기서 윤병세 외교부장관을 만나,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외교부 측 의견을 전달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지연 방안이나 전원합의체 회부 문제도 함께 논의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 검사: 증인은 … 비서실장 공관 회의 개최 및 법원행정처장의 참석 사실을 언론 통해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표현했는데 맞습니까?
- 증인: 예.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 검사: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증인: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굉장히 부적절하고 잘못됐다고 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 게 왔을 때, 저는 거절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말 필요하면 공식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든지 해야지 그렇게... 만난 경위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면담 자체가 저는 굉장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행정처장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는 증인. 행정처 조직이 오만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 증인: … 이 사건 전체적으로는 한 마디로 행정처가 너무 오만하게 타성에 젖어서... 일을 열심히 한다는 명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서, 그런 면에서 좀 잘못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들고.

- 증인: … 저는 이 사태를 겪으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행정처가 너무 좀 오만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을 좀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저도 개인적으로 상당히 반성을 하고 있는데 …


물론 본인에 대한 반성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임 전 차장과 함께 외교부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대한 외교부 의견서를 논의한 건 잘못이었단 겁니다.

- 검사: 원고나 피고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해관계 있는 국가기관이 의견서를 제출하는데, 행정처가 그 의견서 초안을 검토해준다거나 수정해준다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뭡니까?
- 증인: 아, 그거는 뭐 제가 보면 당연한 얘기인 거 같습니다. 저도 판사로서 근 30년 가까이 일했고요, 공개적으로 법정에서 재판하는 과정에서 의견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재판 외로 비공개적으로 이것을 만나서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 (의견서는) 그냥 제출하면 되는 것이지 그 과정에서 행정처가 외교부하고 만나서 그런 얘기를 나눴다는 거 자체가 저는 개인적으로 돌이켜봤을 때 좀 잘못됐다 생각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변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도 그 부분에 대해선 잘못됐다고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책임의 경중은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은 외교부 의견서를 고쳐준 것도 아니고 주도자가 아닌 편승자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잘못했다는 얘기를 마지막까지 이어갔습니다.

- 재판장: (마지막으로) 그 외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까?
- 증인: 네 간단히 말씀드리면, 여러 가지로 사법행정에서 중추적 역할 하고 있었던 저로서는 여러 가지로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 저 개인적으로는 의견서를 고쳐주거나 그러지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의견서 제출 과정에 제가 뭐 기존에 있던 데 편승했던 건데 개입이 돼서, 외교부하고 비공식적으로라도 의견 나눴다는 거 자체는 굉장히 저로서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


#2. 반성의 반전…"기억 되돌아보니 잘못 진술"

반성에 반성을 거듭한 증인. 하지만 이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재판에서 또 다른 차원의 반성을 꺼내 들었습니다. 과거 검찰 조사에서 자신이 진술한 내용도 다시 돌아봤다, 반성했다는 건데요. 그 반성의 결과라며 법정에서 자신의 주요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임 전 차장의 혐의가 적힌 공소장 내용 일부를 먼저 보시지요.

"피고인은 2016. 9. 29.경 조태열 차관 등과의 면담을 앞두고 이민걸 기획조정실장과 함께 대법원장실로 찾아가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외교부에서 의견서를 낼 단계가 된 것 같다.'라고 말한 후 양승태 대법원장으로부터 '대법원장 임기 내에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겠지만 강제징용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겠다'라는 취지의 말을 듣고, 진행 중인 개별 사건의 구체적 심리 계획으로서 공무상비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이를 조태열 차관 등 외교부 관계자에게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임종헌 공소장 중)

여기서 핵심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겠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부분일 텐데요. 검찰이 이런 공소 사실을 기재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민걸 부장판사의 진술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임종헌 차장님은 외교부에서 이제는 확정적으로 의견서 제출한다는 사실 알았는지, 그때 대법원장님께 '외교부에서 의견서를 낼 단계가 된 거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양승태 대법원장님께서 전원합의체 회부를 검토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하셨고, 또 본인의 임기 중에는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 부장판사는 증인신문 과정에서 검찰에서 이런 진술을 한 사실을 인정했지만, 법정에서 돌연 말을 바꿨습니다.

- 검사: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께서 전원합의체 회부를 검토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임기 중에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맞습니까?
- 증인: 제가 그 부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그 양 대법원장님이 전원합의체 검토를 정확하게, 검토하겠다 추진하겠다 이런 얘기는 안하셨고요, 전원합의체 얘기를 했을 수도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이 사건 의견서 오면 뭐 검토할 것도 있고 신중을 기해야 하는데 과연 임기 중에 제대로 끝날 수 있을까 이런 데 방점을 두셨기 때문에. …

검사가 진술이 번복된 지점을 추궁하자, 이 부장판사는 당황한 듯 상대의 말을 끊어버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양측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자 재판장이 개입했고, 이 부장판사는 "오랜 기간 다시 (기억을) 환기해본 것"이라며 기존 진술을 다시 부정했습니다.

- 검사: … 유독 전원합의체 회부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진술을 안하시는데..
- 증인: [말 끊으며] 아 정확하게 진술 안하는 게 아니라
- 검사: 방금 증언하시기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전원합의체 얘기를 했을 수는 있다고 얘기하셨는데 그게 맞다는 말입니까 아니라는 말입니까?
- 증인: 아니 저는
- 재판장: 증인, 잠깐만요. 그 당시 대화의 방점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그와 같은 대화가 있었는지, 그 여부를 지금 검사가 묻는 것이기 때문에 증인이 그 당시에 들었던 검사가 묻는 그 대화 부분이 증인이 들었는지 그같은 대화가 오갔는지를, 그에 대한 답변을 하면 될 듯합니다.
- 증인: … 제가 이 시기가 지나고 오랜 기간 저도 환기를 다 해봤는데, 제 생각에는 양 대법원장님이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이렇게 얘긴 안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이 부장판사는 이어 임 전 차장이 조태열 당시 외교부 2차관을 만난 자리에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전원합의체 회부를 언급했다는 진술도 번복했습니다. 이유는 역시, 돌아와서 곰곰이 따져보니 기억이 다르다는 거였습니다.

- 검사: 증인은 검찰 조사 시 "임종헌 차장님이 (2016. 9. 29. 외교부 관계자들을 만나)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이 전원합의체에 회부되도록 해보겠다'고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미 위 사건이 재상고된 이후 시기적으로 상당 기간이 흘렀기도 하여 소부에서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임종헌 차장님이 이와 같이 말씀하실 때 특별히 이상하다 생각하진 않았었습니다"라고 진술하였는데 맞습니까?
- 증인: 예, 진술은 그렇게 돼 있는데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사건은 제가 돌아와서 생각해봤습니다. 이때는 그날 그 자리는 임종헌 차장이 이미 오래 전에 외교부와 협의한 대로 의견서 제출을 독촉하는 자리였습니다. … 제가 기억하기로는 전원합의체 회부하겠다, 추진하겠다 이렇게 임종헌 차장이 얘기한 걸로 전혀 저는 이해하지 않았고요, 전원합의체 가게 되면 이런 절차 거치지 않겠느냐 정도로 임종헌 차장님이 얘기하셨던 거 같고 …

검찰에서의 진술 내용을 되돌아보면 머릿속 기억이 달라지는, 이 특별한 반성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증인신문 마지막 순서에 재판장이 진술이 바뀐 이유를 묻자, 이 부장판사는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경황이 없었다"면서 자신의 당시 진술이 검찰에서 잘못 받아들여진 부분이 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이 부장판사는 또 "전원합의체 회부라는 것은 대법관들이 알아서 논의해서 결정할 문제이지, 임종헌 차장이나 행정처에서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대법원 재판에 대해 전원합의체 회부하겠다, 회부 추진하겠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검찰 공소장에 적시된 임 전 차장과 양 전 대법원장의 발언은 아예 불가능한 얘기라고 '원천봉쇄'하기도 했습니다.

#3. 그밖에...

○ 이날 재판에서는 박찬익 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 심의관이 임종헌 전 차장의 지시를 받아 2013년 9월 30일 작성한 "강제동원자 판결 관련 - 외교부와의 관계"라는 대외비 보고서가 공개됐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 "3. 외교부를 배려하여 절차적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방안"이라는 제목 하에 "▣사법부는 재판의 독립이 절대적 가치임(행정기관과의 차이점)"이라는 항목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면 참 아이러니한 대목입니다.

○ 증인으로 소환된 이민걸 부장판사는 재판 시작 8분 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홀로 법정에 들어와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재판 시작을 기다렸는데요. 법정에 들어오기까지 취재진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정직 상태일지라도 소지 중인 법원 출입증을 이용해, 일반인이 이용하지 않는 다른 출입구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증인신문을 마치고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이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과 법원행정처에서 4년 넘게 함께 일한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는 임 전 차장이 피고인석을 향해 걸어올 때 가만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에 잠시 손을 잠시 얹기도 했는데요. 임 전 차장은 이 부장판사에게 줄곧 눈길을 주지 않다가 재판 후반부에 "이런 자리에서 뵙게 돼 여러 가지로 마음이 안 좋은데 사실대로 이야기해주시면 됩니다"라며 직접 간단한 신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 이 부장판사는 행정처 기조실장 시절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대한 외교부 의견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외교부 고위공무원들을 만났는데요. 이때 접촉한 조태열 당시 외교부 2차관과 이기철 당시 외교부 재외동포영사대사는 모두 이 부장판사의 고등학교(서울 중앙고), 대학교(서울대 법학과) 선배였습니다. 이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이 자신에게 "조태열 차관하고 약속이 돼 있다. 고등학교 선배 아니냐"고 먼저 학연을 언급하며 약속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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