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두 개의 양심]① 뛰어난 정세분석가가 ‘깊은 생각없이’ 민감문건 작성?

입력 2019.04.04 (09:35) 수정 2019.06.04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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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첫 순서로, 그제(2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서 진행된 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1기·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에 대한 증인신문 내용을 살펴봅니다.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의 재판에서는 물론, '사법농단' 재판 전체를 통틀어 첫 번째로 법정에 출석한 증인입니다. 그는 과거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으로 일하면서, 임 전 차장의 지시를 받아 여러 건의 '재판 거래' 의심 문건을 작성한 인물입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지난해 말 대법원 법관징계위 결정으로 감봉 5개월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연관 기사] ‘사법농단’ 재판 첫 증인 판사 “전교조 문건 임종헌 지시로 작성”

1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 재판의 몇 가지 장면을 뽑아봤습니다.

정다주 부장판사가 지난해 8월 13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정다주 부장판사가 지난해 8월 13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1. 재판장의 당부, "'님'을 주의하라"

- 증인: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증인 정다주.
- 재판장: 네 증인석에 앉으세요. …(중략)… 재판장의 소송 지휘권에 근거하여, 증인신문에 앞서 증인을 포함한 소송관계인 모두에게 용어 사용에 관해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증인이 증언을 하면서 이 사건 관련자들을 지칭할 필요 있을 경우, 가급적 종전 직위 자체를 사용해 주길 바랍니다.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행정처장님, 기조실장님 등의 경칭을 사용하는 경우, 맥락에 따라서는 그것이 기존 관행에 따른 존경의 표시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해 고위 법관들을 언급할 때 "님"자를 붙이지 마라. 증인 정다주 부장판사에게 재판장이 건넨 당부입니다. 그런 경칭이 통상적인 존경의 표시를 넘어서는 것으로 오해돼, 증언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조치로 보입니다. 사건에 임하는 재판장의 깊은 고민과 긴장감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실제 정 부장판사는 후반부 증인신문 과정에서 "대법관님"이라는 단어를 쓰려다 곧바로 "대법관"으로 정정해 말하기도 했습니다. 습관처럼 붙이던 "님"자를 갑자기 입에서 떼어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2. 판사도 피하지 못한 '받아쓰기'

증인신문에서 정다주 부장판사는 자신이 임종헌 전 차장의 지시를 받아 작성한 '재판 거래' 의심 문건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검사: 증인, 이거(문건) 작성하면서 피고인이 불러준 전체적 얼개에 살을 더해 보고서로 작성했다고 했는데, 살을 더하여 보고서로 작성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 증인: 피고인이 그 당시에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구술하여 주었고, 그것을 주로 단어라든지 짧은 문구의 형태로 구술하여 준 것을 보고서에 적합한 문장의 형태로… 그리고 보고서로서의 전체적인 포맷을 갖추고 편집하고 하는 문서 작업을 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문제의 문건들을 완성한 건 맞지만, 뼈대가 되는 내용과 논리는 임 전 차장이 상세히 불러준 걸 받아쓰기한 데 불과하다는 진술입니다. "(문건의) 본뜻"이 뭔지 모르겠다, "(문건에) 제 생각 반영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자신의 수동적 위치를 강조했습니다.

임 전 차장의 지시를 "최대한 빠짐 없이" 받아적었다며, '받아쓰기' 공책으로 활용된 자신의 업무일지와 문제가 된 문건들을 비교해보면 될 거라고도 했습니다.

- 좌배석 판사: 업무일지는 (임 전 차장에게) 지시받을 때 동시에 썼나요, 아니면 그 후에 썼나요?
- 증인: 동시에 썼습니다.
- 좌배석 판사: 최대한 빠짐없이 쓰나요, 아니면 간략하게 취지만 쓰나요?
- 증인: 최대한 빠짐없이 하려 노력하지만 구술하는 내용이라 다 따라가진 못하고, 속도에 따라 단어의 형태나 메모의 형태로 남는 경우도 있고 다 옮겨적을 수 있는 경우도 있고 다를 듯합니다.

'받아쓰기'의 구체적인 예가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 검사: 증인은 어떤 경위로 '과거 왜곡의 광정(匡正)'이라는 제목을 기재했나요?
- 증인: 제목은 피고인이 제목을 그렇게 달아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검사: 증인은 왜 전교조 사건을 통진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선고 이전에 결정해야 극적인 효과가 날 거라고 결론냈나요?
- 증인: 그것도 피고인이 구술해 준 내용이었습니다.

정 부장판사는 이런 일련의 문건 작성 업무를 '납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 증인: 이 업무의 성격은 주어진 주제에 관해 제가 검토를 해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피고인에게 보고하는 성격의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게 아니고, 피고인이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구술해주면 그것을 제가 문서형태로 작성해서… 그 문건을 피고인에게 일종의 납품을 하는, 피고인에게 교부를 하는 업무였습니다.

정다주 부장판사(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가 임종헌 전 차장 지시로 작성한 전교조 관련 검토 문건. 증인신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문건이기도 하다.정다주 부장판사(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가 임종헌 전 차장 지시로 작성한 전교조 관련 검토 문건. 증인신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문건이기도 하다.

#3. 뛰어난 정세분석가, '생각 없이' 민감한 문건 작성?

정 부장판사가 맡았던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은 상당한 수준의 "정무적 감각"이 요구되는 자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 매우 적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걸로 보입니다.

- 변호인: 증인의 보고서 작성 능력, 정세분석 능력 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들어서 (정무적 보고서를) 많이 작성했다고 하던데.
- 증인: 제 스스로에 대해 제가 평가 내리기 어렵습니다.

이런 정 부장판사가 임 전 차장 지시로 민감한 문건들을 작성할 때는 "깊이 생각을 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문건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윗선에 보고될 수 있다거나, 재판에 부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 재판장: (보고서 작성) 당시 증인은 재판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 증인: 그 당시 그런 부분까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 검사: 전원합의체의 주재자이기도 한 대법원장이 상고심에 대해 청와대 측 요망사항이나 청와대 입장을 이용해 상고법원 추진에 도움될 수 있다는 내용을 보고 받았는데, 재판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이 보고서 작성하면서 양승태에게 보고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 증인: 기억 없지만, 그런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정무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본인이 "위험한 내용"이라고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진 않습니다. 정 부장판사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취지의증언을 반복하자, 재판장이 아래와 같이 직접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 변호인: 증인은 '과거 왜곡의 광정(匡正)' 또는 현안 말씀자료 작성 당시, 피고인이 외부에서 말할 기초 자료라 생각했지 그대로 읽거나 상대방에게 그대로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문구 작성을 할 때 깊이 생각하진 않았지요?
- 증인: 그렇습니다.
- 재판장: 증인. 문건의 문구, 문장을 만들 때 깊이 생각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까?
- 증인: 이 문건의 경우에는 어쨌거나 당시에 저는 피고인이 이 문건을 외부에 전달한다든지 그럴 거라 생각하진 않고 작성했습니다.

정다주 부장판사(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가 임종헌 전 차장 지시로 작성한 문건. “과거 왜곡의 광정”이라는 소제목이 눈에 띈다.정다주 부장판사(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가 임종헌 전 차장 지시로 작성한 문건. “과거 왜곡의 광정”이라는 소제목이 눈에 띈다.

#4. 차장님의 뒤늦은 사과…이어진 '폭풍' 질문

정다주 부장판사의 증언 내용을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그가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건 사실입니다. 상급자였던 임종헌 전 차장 입장에선 미안할 법도 하겠죠. 정 부장판사에 따르면, 임 전 차장은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조사가 있을 무렵 정 부장 판사에게 "미안하다"라고 하면서 "설마 심의관에게 화가 미치겠느냐, 윗분들이 풀어줘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걸 기대하기 힘든 상황인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의를 입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3월 11일 자신의 첫 재판에 출석하고자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수의를 입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3월 11일 자신의 첫 재판에 출석하고자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날 법정에서 다시 정 부장판사를 마주친 임 전 차장. 재판 내내 증인석 쪽으로 눈길을 주진 않았지만, 직접 증인신문에 나서면서 다시 미안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증인과 오랜 인연이 있는데 이런 자리에서 뵙게 돼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놓인 데 대해 상급자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소회를 말씀드리는 것이고….

몸을 낮췄던 임 전 차장, 곧 증인을 향해 미리 준비한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증인이 근무할 시기에 법원행정처 심의관 수는 몇 명이었죠?
- 증인: 어… 서른두 분 안팎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지금 정확한 숫자는 헛갈립니다.
- 피고인 임종헌: 법무부나 대검과 비교할 때, 그 절대적 숫자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죠?
- 증인: 그렇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그래서 거의 새벽에 퇴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죠?
- 증인: 그랬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그런 과정을 통해 오로지 사법부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2년을 버텨오신 것이죠?
- 증인: 어…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법원의 유일한 소통 창구의 존재감을, 청와대 내에 인식시킬 수 있고, 또 법원 입장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라고 생각하는데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증인: 지금 피고인이 표현한 모든 표현에 동의하긴 어렵고. 다만 대등한 기관 대 기관의 업무협조 창구, 소통의 창구로서는 사법부에서는 대법원에서는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청와대 법무비서관실이었던 것이고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조금만 봐도 질문의 방식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먼저 내비친 뒤, 증인에게 맞장구 쳐주기를 바라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공소사실과 무관한 질문을 한다는 검사의 항의에 재판부에 제지된 임 전 차장. "자꾸 감정이 격해지는 거 같아 그만 질문하도록 하겠다"며 일단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재판 말미 두 번째 반대신문에서 임 전 차장은 다시 질문을 시작했고, 또다시 검사의 항의를 받았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앞서 증인이 말한 것과 같이, 결국 이 문건 작성의 최종적 목적은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의도보다는 지금 사법부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환경 하에서 …(중략)… 사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모색하는 거라 생각하는데, 증인은…
- 검사: [항의하며] 이건 (정상적 신문이 아니라) 의견을 묻는 건데!
- 피고인 임종헌: 이게 왜…

앞서 이날 증인신문에 들어가기 전, 임 전 차장은 "재판장님의 적극적 소송지휘권 행사를 부탁드리는 취지에서 간단하게 1분 정도만 말씀드리겠다"면서 형사소송규칙 74조 2항을 언급했습니다. 이 규칙이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신문" "전의 신문과 중복되는 신문" "의견을 묻거나 의논에 해당하는 신문" "증인이 직접 경험하지 아니한 사항에 해당하는 신문"을 금지하고 있다는 걸 짚은 겁니다. 하지만 정작 임 전 차장 본인이 이 규칙을 엄격하게 지켰는지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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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① 뛰어난 정세분석가가 ‘깊은 생각없이’ 민감문건 작성?
    • 입력 2019-04-04 09:35:17
    • 수정2019-06-04 07:10:44
    취재K
●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첫 순서로, 그제(2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서 진행된 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1기·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에 대한 증인신문 내용을 살펴봅니다.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의 재판에서는 물론, '사법농단' 재판 전체를 통틀어 첫 번째로 법정에 출석한 증인입니다. 그는 과거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으로 일하면서, 임 전 차장의 지시를 받아 여러 건의 '재판 거래' 의심 문건을 작성한 인물입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지난해 말 대법원 법관징계위 결정으로 감봉 5개월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연관 기사] ‘사법농단’ 재판 첫 증인 판사 “전교조 문건 임종헌 지시로 작성”

1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 재판의 몇 가지 장면을 뽑아봤습니다.

정다주 부장판사가 지난해 8월 13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1. 재판장의 당부, "'님'을 주의하라"

- 증인: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증인 정다주.
- 재판장: 네 증인석에 앉으세요. …(중략)… 재판장의 소송 지휘권에 근거하여, 증인신문에 앞서 증인을 포함한 소송관계인 모두에게 용어 사용에 관해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증인이 증언을 하면서 이 사건 관련자들을 지칭할 필요 있을 경우, 가급적 종전 직위 자체를 사용해 주길 바랍니다.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행정처장님, 기조실장님 등의 경칭을 사용하는 경우, 맥락에 따라서는 그것이 기존 관행에 따른 존경의 표시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해 고위 법관들을 언급할 때 "님"자를 붙이지 마라. 증인 정다주 부장판사에게 재판장이 건넨 당부입니다. 그런 경칭이 통상적인 존경의 표시를 넘어서는 것으로 오해돼, 증언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조치로 보입니다. 사건에 임하는 재판장의 깊은 고민과 긴장감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실제 정 부장판사는 후반부 증인신문 과정에서 "대법관님"이라는 단어를 쓰려다 곧바로 "대법관"으로 정정해 말하기도 했습니다. 습관처럼 붙이던 "님"자를 갑자기 입에서 떼어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2. 판사도 피하지 못한 '받아쓰기'

증인신문에서 정다주 부장판사는 자신이 임종헌 전 차장의 지시를 받아 작성한 '재판 거래' 의심 문건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검사: 증인, 이거(문건) 작성하면서 피고인이 불러준 전체적 얼개에 살을 더해 보고서로 작성했다고 했는데, 살을 더하여 보고서로 작성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 증인: 피고인이 그 당시에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구술하여 주었고, 그것을 주로 단어라든지 짧은 문구의 형태로 구술하여 준 것을 보고서에 적합한 문장의 형태로… 그리고 보고서로서의 전체적인 포맷을 갖추고 편집하고 하는 문서 작업을 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문제의 문건들을 완성한 건 맞지만, 뼈대가 되는 내용과 논리는 임 전 차장이 상세히 불러준 걸 받아쓰기한 데 불과하다는 진술입니다. "(문건의) 본뜻"이 뭔지 모르겠다, "(문건에) 제 생각 반영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자신의 수동적 위치를 강조했습니다.

임 전 차장의 지시를 "최대한 빠짐 없이" 받아적었다며, '받아쓰기' 공책으로 활용된 자신의 업무일지와 문제가 된 문건들을 비교해보면 될 거라고도 했습니다.

- 좌배석 판사: 업무일지는 (임 전 차장에게) 지시받을 때 동시에 썼나요, 아니면 그 후에 썼나요?
- 증인: 동시에 썼습니다.
- 좌배석 판사: 최대한 빠짐없이 쓰나요, 아니면 간략하게 취지만 쓰나요?
- 증인: 최대한 빠짐없이 하려 노력하지만 구술하는 내용이라 다 따라가진 못하고, 속도에 따라 단어의 형태나 메모의 형태로 남는 경우도 있고 다 옮겨적을 수 있는 경우도 있고 다를 듯합니다.

'받아쓰기'의 구체적인 예가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 검사: 증인은 어떤 경위로 '과거 왜곡의 광정(匡正)'이라는 제목을 기재했나요?
- 증인: 제목은 피고인이 제목을 그렇게 달아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검사: 증인은 왜 전교조 사건을 통진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선고 이전에 결정해야 극적인 효과가 날 거라고 결론냈나요?
- 증인: 그것도 피고인이 구술해 준 내용이었습니다.

정 부장판사는 이런 일련의 문건 작성 업무를 '납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 증인: 이 업무의 성격은 주어진 주제에 관해 제가 검토를 해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피고인에게 보고하는 성격의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게 아니고, 피고인이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구술해주면 그것을 제가 문서형태로 작성해서… 그 문건을 피고인에게 일종의 납품을 하는, 피고인에게 교부를 하는 업무였습니다.

정다주 부장판사(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가 임종헌 전 차장 지시로 작성한 전교조 관련 검토 문건. 증인신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문건이기도 하다.
#3. 뛰어난 정세분석가, '생각 없이' 민감한 문건 작성?

정 부장판사가 맡았던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은 상당한 수준의 "정무적 감각"이 요구되는 자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 매우 적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걸로 보입니다.

- 변호인: 증인의 보고서 작성 능력, 정세분석 능력 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들어서 (정무적 보고서를) 많이 작성했다고 하던데.
- 증인: 제 스스로에 대해 제가 평가 내리기 어렵습니다.

이런 정 부장판사가 임 전 차장 지시로 민감한 문건들을 작성할 때는 "깊이 생각을 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문건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윗선에 보고될 수 있다거나, 재판에 부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 재판장: (보고서 작성) 당시 증인은 재판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 증인: 그 당시 그런 부분까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 검사: 전원합의체의 주재자이기도 한 대법원장이 상고심에 대해 청와대 측 요망사항이나 청와대 입장을 이용해 상고법원 추진에 도움될 수 있다는 내용을 보고 받았는데, 재판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이 보고서 작성하면서 양승태에게 보고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 증인: 기억 없지만, 그런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정무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본인이 "위험한 내용"이라고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진 않습니다. 정 부장판사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취지의증언을 반복하자, 재판장이 아래와 같이 직접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 변호인: 증인은 '과거 왜곡의 광정(匡正)' 또는 현안 말씀자료 작성 당시, 피고인이 외부에서 말할 기초 자료라 생각했지 그대로 읽거나 상대방에게 그대로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문구 작성을 할 때 깊이 생각하진 않았지요?
- 증인: 그렇습니다.
- 재판장: 증인. 문건의 문구, 문장을 만들 때 깊이 생각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까?
- 증인: 이 문건의 경우에는 어쨌거나 당시에 저는 피고인이 이 문건을 외부에 전달한다든지 그럴 거라 생각하진 않고 작성했습니다.

정다주 부장판사(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가 임종헌 전 차장 지시로 작성한 문건. “과거 왜곡의 광정”이라는 소제목이 눈에 띈다.
#4. 차장님의 뒤늦은 사과…이어진 '폭풍' 질문

정다주 부장판사의 증언 내용을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그가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건 사실입니다. 상급자였던 임종헌 전 차장 입장에선 미안할 법도 하겠죠. 정 부장판사에 따르면, 임 전 차장은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조사가 있을 무렵 정 부장 판사에게 "미안하다"라고 하면서 "설마 심의관에게 화가 미치겠느냐, 윗분들이 풀어줘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걸 기대하기 힘든 상황인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의를 입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3월 11일 자신의 첫 재판에 출석하고자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날 법정에서 다시 정 부장판사를 마주친 임 전 차장. 재판 내내 증인석 쪽으로 눈길을 주진 않았지만, 직접 증인신문에 나서면서 다시 미안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증인과 오랜 인연이 있는데 이런 자리에서 뵙게 돼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놓인 데 대해 상급자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소회를 말씀드리는 것이고….

몸을 낮췄던 임 전 차장, 곧 증인을 향해 미리 준비한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증인이 근무할 시기에 법원행정처 심의관 수는 몇 명이었죠?
- 증인: 어… 서른두 분 안팎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지금 정확한 숫자는 헛갈립니다.
- 피고인 임종헌: 법무부나 대검과 비교할 때, 그 절대적 숫자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죠?
- 증인: 그렇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그래서 거의 새벽에 퇴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죠?
- 증인: 그랬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그런 과정을 통해 오로지 사법부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2년을 버텨오신 것이죠?
- 증인: 어…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법원의 유일한 소통 창구의 존재감을, 청와대 내에 인식시킬 수 있고, 또 법원 입장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라고 생각하는데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증인: 지금 피고인이 표현한 모든 표현에 동의하긴 어렵고. 다만 대등한 기관 대 기관의 업무협조 창구, 소통의 창구로서는 사법부에서는 대법원에서는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청와대 법무비서관실이었던 것이고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조금만 봐도 질문의 방식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먼저 내비친 뒤, 증인에게 맞장구 쳐주기를 바라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공소사실과 무관한 질문을 한다는 검사의 항의에 재판부에 제지된 임 전 차장. "자꾸 감정이 격해지는 거 같아 그만 질문하도록 하겠다"며 일단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재판 말미 두 번째 반대신문에서 임 전 차장은 다시 질문을 시작했고, 또다시 검사의 항의를 받았습니다.

- 피고인 임종헌: 앞서 증인이 말한 것과 같이, 결국 이 문건 작성의 최종적 목적은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의도보다는 지금 사법부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환경 하에서 …(중략)… 사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모색하는 거라 생각하는데, 증인은…
- 검사: [항의하며] 이건 (정상적 신문이 아니라) 의견을 묻는 건데!
- 피고인 임종헌: 이게 왜…

앞서 이날 증인신문에 들어가기 전, 임 전 차장은 "재판장님의 적극적 소송지휘권 행사를 부탁드리는 취지에서 간단하게 1분 정도만 말씀드리겠다"면서 형사소송규칙 74조 2항을 언급했습니다. 이 규칙이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신문" "전의 신문과 중복되는 신문" "의견을 묻거나 의논에 해당하는 신문" "증인이 직접 경험하지 아니한 사항에 해당하는 신문"을 금지하고 있다는 걸 짚은 겁니다. 하지만 정작 임 전 차장 본인이 이 규칙을 엄격하게 지켰는지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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