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두 개의 양심]㉑ “감 없는 판사” 시선 부담…나도 모르게 도둑맞은 소신?

입력 2020.02.24 (07:00) 수정 2020.02.24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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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스물 한 번째 순서로, 2019년 12월 19일 '사법농단' 사건 공범으로 기소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염 모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0기)의 증언을 지난 기사에 이어서 계속 살펴봅니다.

#1. 재판을 블라인드하다

증인은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취소하고 단순위헌 취지로 다시 결정하라는 이규진 전 상임위원의 말에 대해 "내 재판 결론 바꿔달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프레셔(pressure·압박)는 전혀 안 가졌다"고 여러 차례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증인도 특정 단계에 이르러서는 마음에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재판부의 결정문을 법원 내부 전산망에서 검색되지 않도록 감추는, 이른바 '블라인드' 조치가 문제였습니다.

재판부가 '결정 번복'을 하기로 정해진 이후, 이 전 상임위원은 증인에게 또 전화를 걸어 '블라인드' 조치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이 사건은 보안을 유지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재판부에서 한 기존의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아무도 봐서는 안 됩니다. 사건 검색에서도 단순히 '결정'으로만 입력하고, 코트넷이나 판결문 검색 시스템에서 한정위헌 취지 위헌제청결정문과 직권 취소 결정문을 보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직권 취소를 한 궁극적 목적이 법원행정처와 신청 대리인, 재판부 외에는 아무도 알면 안되는 거라서, 이런 후속 조치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이규진, 증인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

이러한 조치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이었던 문성호 판사가 이 전 상임위원의 지시를 받고 쓴 보고서에서 검토된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2015년 4월 문성호 당시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이 쓴 “한정위헌 취지 위헌제청결정 확인 및 향후대책(대외비)” 보고서의 일부. 법정 스크린에 띄워진 것을 기자가 받아쳐 재구성했다2015년 4월 문성호 당시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이 쓴 “한정위헌 취지 위헌제청결정 확인 및 향후대책(대외비)” 보고서의 일부. 법정 스크린에 띄워진 것을 기자가 받아쳐 재구성했다

검찰은 블라인드 조치를 두고 "이미 종결된 일선 법원의 재판에 개입해 재판의 내용을 사후적으로 변경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라며 "재판의 절차 진행에 영향을 미쳐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했다고 지적합니다. 증인도 "솔직히 이 단계에서는 부담이 됐다"고 증언했습니다.

- 검사: 증인은 이와 같이 전산상 조치까지 요구받고 꺼림직하거나 찝찝한 건 없었습니까?
- 증인: 저거는 좀 꺼림직했죠. 블라인드 처리하고 하는 게. 근데 어쩔 수 없다. 말씀하신 대로, 검색제외 안하면 의미 없다는 설명 듣고... 뭐 어쩔 수 없단 생각하고서 했습니다.

증인이 블라인드 처리에 필요한 절차를 문의하자, 이 전 상임위원은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관리국에 공문을 보내야 한다며 구체적인 공문 양식과 문구까지 메일로 보내줬습니다. 증인은 이 양식과 문구에 따라 공문을 완성한 뒤 법원행정처로 보냈고, '블라인드' 조치는 완성됐습니다. 이렇게 숨겨진 줄 알았던 '결정 번복' 혹은 '재판 개입'의 흔적은, 2018년 검찰 수사로 3년여 만에 다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증인 재판부의 위헌제청결정 사건 진행내역(대법원 나의사건검색). “위헌제청결정”, “직권취소결정”, “위헌제청결정”이 아닌 “결정”, “결정”, “결정”으로만 입력돼 있어, 결정 내용을 알 수 없다증인 재판부의 위헌제청결정 사건 진행내역(대법원 나의사건검색). “위헌제청결정”, “직권취소결정”, “위헌제청결정”이 아닌 “결정”, “결정”, “결정”으로만 입력돼 있어, 결정 내용을 알 수 없다

#2. 감 없는 판사, 답 없는 판사

이쯤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증인의 재판부가 결정의 취소와 재결정, 블라인드 처리까지 하게 된 데는 "대법원 입장"을 언급한 이 전 상임위원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법원이 헌법재판소와 위상·권한 문제를 두고 다툼이 심하다"면서, "일선 법원에서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결정을 하게 되면, 오히려 법원에서 헌재 논리를 인정해주는 결론이 돼서 대법원 입장에선 매우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증인은 이같은 이 전 상임위원의 지적에 수긍했다며 "당사자를 위해 양쪽(대법·헌재)에서 잡음 없게 해결하고 싶었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재판장은 그 의미를 다시 물었습니다.

- 재판장: 증인이 재판장으로 있던 남부지법 11민사부가 원 결정을 직권 취소하면서 취소의 사유로 삼은 것은 무엇입니까?
- 증인: 취소의 사유요?
- 재판장: 네.
- 증인: 방금 얘기했듯이 그.. 단순위헌과 한정위헌의 그 권한. 대법과 헌재 사이의 그런 갈등 관계 있지 않습니까? 그 부분을 고려해서 단순위헌으로 고쳐도 별 지장이 없을 거 같다 해서, 조언받고서 한 거죠.
- 재판장: 그 조언이, 직권 취소를 하면서 취소의 사유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까?
- 증인: 네. 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검사도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 검사: 일선 법원에서 재판할 때 이런 대법과 헌재의 갈등 관계라든지, 대법이 한정위헌 인정하지 않는데 헌재는 계속하고 있고... 대법의 입장이나 행정처 입장이나, 이런 정책적·정무적 부분까지 고려해 재판하십니까?
- 증인: 안하죠. 일선 재판부는 워낙 사건도 많고 처리해야 될...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요. 만약 그런 문제가, 제가 포인트로 알고..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 생각했으면 저런 결정 안했을 텐데, 그거까지는 미처 생각 안하고 사건 처리에 주안점을 두다 보니까 단순위헌일 때 문제점 그런 거 얘기해서, 아. 그럼 한정위헌으로 하자 가볍게 한 거죠.
- 검사: 통상 재판할 때 자기가 주도적으로, 배석이든 재판장이든, '대법원 입장이 이런 게 있으니 대법 입장 고려해서 재판을 하자'. 이런 고려를 하시나요?
- 증인: 그렇지 않죠. 대법 입장을 고려해서 당사자 이익에 반(反)하게 한다든가, 대법원 입장에 맞춰서 재판하진 않죠. 저희가.

결국 증인 스스로도 대법원의 정책적 입장을 재판의 주요 고려 요소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증인은 이 전 실장의 말을 그렇게 의식하면서 기존 결정을 번복했던 것일까요?

“사실 마음에 부담이 상당했습니다. 저는 나름 이론적으로 판단했고 배석판사들과의 논의도 거쳐서 당사자에게 가장 합리적인 구제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최초 결정하였던 것인데, 이규진 부장님으로부터 대법원의 입장을 전해 듣고, 정책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은 제가 생각하지 않아 잘 몰랐던 부분이었는데 대법원의 그러한 정책적인 판단을 거슬러서 자기 고집을 계속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증인에 대한 검찰 진술조서)

증인은 이런 진술을 법정에서도 재확인하면서, 이 전 상임위원의 전화를 받고 "이걸 고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진 않았다"면서도 "정책적 관점에서 접근을 안했다는 생각에 조금 부담을 느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대법원에서는 나를 좀 감이 없는 판사로 생각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도 인정했습니다. 결국 증인의 '재판 번복' 결정에는, 대법원이 주는 무언의 압력 역시 일부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의심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 검사: 이규진으로부터 말을 듣고 […] 대법 수뇌부에서도 이 사건에 관심 많구나, 그런 생각하신 적 있으십니까?
- 증인: [웃으며] 네, 그렇죠. 전화를 받고 나서, 아. 그런 문제가 또 있네. 그런 생각을 했죠.
- 검사: 관심 많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 증인: 통화하면 당연히 수뇌부가 관심 많다는 생각 들지 않겠습니까? 대법 헌법연구반 모임에서 저에게 전화했으면 대법에선 다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럼 당연히 그렇게 생각 들죠.

증인과 함께 일하던 판사(배석)이자 위헌제청 사건의 주심을 맡았던 정 모 판사 역시 "(직권 취소 및 재결정 얘기에) 부담이 상당했고 기분도 좋지 않았고, 판사들마다 법적 견해가 다를 수 있는데 행정처에서 이래라 저래라 해서 상당히 압박감을 많이 받았다"면서 "나와 부장님이 잘못되지 않을까 상당히 걱정됐다. 답이 없는 판사로 인식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습니다.


#3. 소신과 반성

이 전 상임위원은 당시 증인이 판사 생활에서 처음으로 위헌제청 결정을 했던 점도 지적했습니다. 증인의 재판부는 관련 법리에 익숙하지 않았고, 자신은 그런 미숙함을 바로잡아주는 '선배'였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증인의 증언을 보면, 재판부는 적지 않은 고민을 거쳐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검사: 증인은 (위헌제청) 신청인의 신청 취지대로 법률에 단순위헌을 구하게 되면, 기존 법률로 인해 혜택 받았던 사람들까지 모두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습니까?
- 증인: 네. 그게 한정위헌 취지로 위헌제청 결정하게 된 주된 이유였죠.
[…]
- 검사: 주심 판사도 (2014년 5월 29일에) 동종 사건에 대해 합헌 결정난 게 있어서, 그것도 고려해 한정위헌 취지로 하게됐다고 진술했는데. 이런 것도 재판부 논의과정에서 있었다는 거죠?
- 증인: 네.
- 검사: 어쨌든 증인 재판부는 당시 외부 간섭이나 개입없이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는 재판부 소신, 판단에 따라 결정했던 것이죠?
- 증인: 맞습니다.

증인은 또 이 전 상임위원의 '조언'을 받고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을 단순위헌 취지로 바꾼 뒤, 걱정을 했다고도 했습니다.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민해서 한정위헌 취지로 올린 것인데, 결국 결정이 바뀌는 바람에 또 합헌 결정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했다는 겁니다. 검찰은 이런 증언들을 근거로, 이 전 상임위원 등의 재판 개입 때문에 증인의 "법과 양심에 따른 독립된 재판권 행사"가 방해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시간 반 넘게 막힘없이 증언을 이어나간 증인. 재판장이 그밖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 어쨌든... 이런 일련의 경과를 통해서 여러 가지로 물의가 되고 신문과정에 나왔다시피 저뿐 아니라 배석판사한테까지 어떤 심리적 부담을 주게 된 그런 것에 대해 상당히 유감으로 생각하고, 저 자신도 앞으로 재판할 때 더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좀더 신중하게 재판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증인이 법적으로 '재판 개입'의 피해자인지 아닌지는 결국 재판부가 판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더 여러 가지를 고려해 신중하게 재판하겠다"는 증인의 말은 어쩐지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대법원 간부에게서 걸려온 그 전화가, 한 판사에게 굳이 할 필요 없는 '반성'을 하도록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무리없이, 빨리 이 사람의 권리를 구제해 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위헌제청 결정을 했다는 증인. 2016년 2월 헌법재판소는 증인 재판부의 위헌제청을 받아들여, 옛 사학연금법 31조 2항이 "평등 원칙에 위반된다"고 판단하고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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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사와 두 개의 양심]㉑ “감 없는 판사” 시선 부담…나도 모르게 도둑맞은 소신?
    • 입력 2020-02-24 07:00:56
    • 수정2020-02-24 07:01:16
    취재K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스물 한 번째 순서로, 2019년 12월 19일 '사법농단' 사건 공범으로 기소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염 모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0기)의 증언을 지난 기사에 이어서 계속 살펴봅니다.

#1. 재판을 블라인드하다

증인은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취소하고 단순위헌 취지로 다시 결정하라는 이규진 전 상임위원의 말에 대해 "내 재판 결론 바꿔달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프레셔(pressure·압박)는 전혀 안 가졌다"고 여러 차례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증인도 특정 단계에 이르러서는 마음에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재판부의 결정문을 법원 내부 전산망에서 검색되지 않도록 감추는, 이른바 '블라인드' 조치가 문제였습니다.

재판부가 '결정 번복'을 하기로 정해진 이후, 이 전 상임위원은 증인에게 또 전화를 걸어 '블라인드' 조치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이 사건은 보안을 유지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재판부에서 한 기존의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아무도 봐서는 안 됩니다. 사건 검색에서도 단순히 '결정'으로만 입력하고, 코트넷이나 판결문 검색 시스템에서 한정위헌 취지 위헌제청결정문과 직권 취소 결정문을 보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직권 취소를 한 궁극적 목적이 법원행정처와 신청 대리인, 재판부 외에는 아무도 알면 안되는 거라서, 이런 후속 조치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이규진, 증인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

이러한 조치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이었던 문성호 판사가 이 전 상임위원의 지시를 받고 쓴 보고서에서 검토된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2015년 4월 문성호 당시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이 쓴 “한정위헌 취지 위헌제청결정 확인 및 향후대책(대외비)” 보고서의 일부. 법정 스크린에 띄워진 것을 기자가 받아쳐 재구성했다
검찰은 블라인드 조치를 두고 "이미 종결된 일선 법원의 재판에 개입해 재판의 내용을 사후적으로 변경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라며 "재판의 절차 진행에 영향을 미쳐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했다고 지적합니다. 증인도 "솔직히 이 단계에서는 부담이 됐다"고 증언했습니다.

- 검사: 증인은 이와 같이 전산상 조치까지 요구받고 꺼림직하거나 찝찝한 건 없었습니까?
- 증인: 저거는 좀 꺼림직했죠. 블라인드 처리하고 하는 게. 근데 어쩔 수 없다. 말씀하신 대로, 검색제외 안하면 의미 없다는 설명 듣고... 뭐 어쩔 수 없단 생각하고서 했습니다.

증인이 블라인드 처리에 필요한 절차를 문의하자, 이 전 상임위원은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관리국에 공문을 보내야 한다며 구체적인 공문 양식과 문구까지 메일로 보내줬습니다. 증인은 이 양식과 문구에 따라 공문을 완성한 뒤 법원행정처로 보냈고, '블라인드' 조치는 완성됐습니다. 이렇게 숨겨진 줄 알았던 '결정 번복' 혹은 '재판 개입'의 흔적은, 2018년 검찰 수사로 3년여 만에 다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증인 재판부의 위헌제청결정 사건 진행내역(대법원 나의사건검색). “위헌제청결정”, “직권취소결정”, “위헌제청결정”이 아닌 “결정”, “결정”, “결정”으로만 입력돼 있어, 결정 내용을 알 수 없다
#2. 감 없는 판사, 답 없는 판사

이쯤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증인의 재판부가 결정의 취소와 재결정, 블라인드 처리까지 하게 된 데는 "대법원 입장"을 언급한 이 전 상임위원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법원이 헌법재판소와 위상·권한 문제를 두고 다툼이 심하다"면서, "일선 법원에서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결정을 하게 되면, 오히려 법원에서 헌재 논리를 인정해주는 결론이 돼서 대법원 입장에선 매우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증인은 이같은 이 전 상임위원의 지적에 수긍했다며 "당사자를 위해 양쪽(대법·헌재)에서 잡음 없게 해결하고 싶었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재판장은 그 의미를 다시 물었습니다.

- 재판장: 증인이 재판장으로 있던 남부지법 11민사부가 원 결정을 직권 취소하면서 취소의 사유로 삼은 것은 무엇입니까?
- 증인: 취소의 사유요?
- 재판장: 네.
- 증인: 방금 얘기했듯이 그.. 단순위헌과 한정위헌의 그 권한. 대법과 헌재 사이의 그런 갈등 관계 있지 않습니까? 그 부분을 고려해서 단순위헌으로 고쳐도 별 지장이 없을 거 같다 해서, 조언받고서 한 거죠.
- 재판장: 그 조언이, 직권 취소를 하면서 취소의 사유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까?
- 증인: 네. 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검사도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 검사: 일선 법원에서 재판할 때 이런 대법과 헌재의 갈등 관계라든지, 대법이 한정위헌 인정하지 않는데 헌재는 계속하고 있고... 대법의 입장이나 행정처 입장이나, 이런 정책적·정무적 부분까지 고려해 재판하십니까?
- 증인: 안하죠. 일선 재판부는 워낙 사건도 많고 처리해야 될...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요. 만약 그런 문제가, 제가 포인트로 알고..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 생각했으면 저런 결정 안했을 텐데, 그거까지는 미처 생각 안하고 사건 처리에 주안점을 두다 보니까 단순위헌일 때 문제점 그런 거 얘기해서, 아. 그럼 한정위헌으로 하자 가볍게 한 거죠.
- 검사: 통상 재판할 때 자기가 주도적으로, 배석이든 재판장이든, '대법원 입장이 이런 게 있으니 대법 입장 고려해서 재판을 하자'. 이런 고려를 하시나요?
- 증인: 그렇지 않죠. 대법 입장을 고려해서 당사자 이익에 반(反)하게 한다든가, 대법원 입장에 맞춰서 재판하진 않죠. 저희가.

결국 증인 스스로도 대법원의 정책적 입장을 재판의 주요 고려 요소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증인은 이 전 실장의 말을 그렇게 의식하면서 기존 결정을 번복했던 것일까요?

“사실 마음에 부담이 상당했습니다. 저는 나름 이론적으로 판단했고 배석판사들과의 논의도 거쳐서 당사자에게 가장 합리적인 구제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최초 결정하였던 것인데, 이규진 부장님으로부터 대법원의 입장을 전해 듣고, 정책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은 제가 생각하지 않아 잘 몰랐던 부분이었는데 대법원의 그러한 정책적인 판단을 거슬러서 자기 고집을 계속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증인에 대한 검찰 진술조서)

증인은 이런 진술을 법정에서도 재확인하면서, 이 전 상임위원의 전화를 받고 "이걸 고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진 않았다"면서도 "정책적 관점에서 접근을 안했다는 생각에 조금 부담을 느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대법원에서는 나를 좀 감이 없는 판사로 생각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도 인정했습니다. 결국 증인의 '재판 번복' 결정에는, 대법원이 주는 무언의 압력 역시 일부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의심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 검사: 이규진으로부터 말을 듣고 […] 대법 수뇌부에서도 이 사건에 관심 많구나, 그런 생각하신 적 있으십니까?
- 증인: [웃으며] 네, 그렇죠. 전화를 받고 나서, 아. 그런 문제가 또 있네. 그런 생각을 했죠.
- 검사: 관심 많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 증인: 통화하면 당연히 수뇌부가 관심 많다는 생각 들지 않겠습니까? 대법 헌법연구반 모임에서 저에게 전화했으면 대법에선 다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럼 당연히 그렇게 생각 들죠.

증인과 함께 일하던 판사(배석)이자 위헌제청 사건의 주심을 맡았던 정 모 판사 역시 "(직권 취소 및 재결정 얘기에) 부담이 상당했고 기분도 좋지 않았고, 판사들마다 법적 견해가 다를 수 있는데 행정처에서 이래라 저래라 해서 상당히 압박감을 많이 받았다"면서 "나와 부장님이 잘못되지 않을까 상당히 걱정됐다. 답이 없는 판사로 인식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습니다.


#3. 소신과 반성

이 전 상임위원은 당시 증인이 판사 생활에서 처음으로 위헌제청 결정을 했던 점도 지적했습니다. 증인의 재판부는 관련 법리에 익숙하지 않았고, 자신은 그런 미숙함을 바로잡아주는 '선배'였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증인의 증언을 보면, 재판부는 적지 않은 고민을 거쳐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검사: 증인은 (위헌제청) 신청인의 신청 취지대로 법률에 단순위헌을 구하게 되면, 기존 법률로 인해 혜택 받았던 사람들까지 모두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습니까?
- 증인: 네. 그게 한정위헌 취지로 위헌제청 결정하게 된 주된 이유였죠.
[…]
- 검사: 주심 판사도 (2014년 5월 29일에) 동종 사건에 대해 합헌 결정난 게 있어서, 그것도 고려해 한정위헌 취지로 하게됐다고 진술했는데. 이런 것도 재판부 논의과정에서 있었다는 거죠?
- 증인: 네.
- 검사: 어쨌든 증인 재판부는 당시 외부 간섭이나 개입없이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는 재판부 소신, 판단에 따라 결정했던 것이죠?
- 증인: 맞습니다.

증인은 또 이 전 상임위원의 '조언'을 받고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을 단순위헌 취지로 바꾼 뒤, 걱정을 했다고도 했습니다.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민해서 한정위헌 취지로 올린 것인데, 결국 결정이 바뀌는 바람에 또 합헌 결정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했다는 겁니다. 검찰은 이런 증언들을 근거로, 이 전 상임위원 등의 재판 개입 때문에 증인의 "법과 양심에 따른 독립된 재판권 행사"가 방해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시간 반 넘게 막힘없이 증언을 이어나간 증인. 재판장이 그밖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 어쨌든... 이런 일련의 경과를 통해서 여러 가지로 물의가 되고 신문과정에 나왔다시피 저뿐 아니라 배석판사한테까지 어떤 심리적 부담을 주게 된 그런 것에 대해 상당히 유감으로 생각하고, 저 자신도 앞으로 재판할 때 더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좀더 신중하게 재판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증인이 법적으로 '재판 개입'의 피해자인지 아닌지는 결국 재판부가 판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더 여러 가지를 고려해 신중하게 재판하겠다"는 증인의 말은 어쩐지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대법원 간부에게서 걸려온 그 전화가, 한 판사에게 굳이 할 필요 없는 '반성'을 하도록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무리없이, 빨리 이 사람의 권리를 구제해 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위헌제청 결정을 했다는 증인. 2016년 2월 헌법재판소는 증인 재판부의 위헌제청을 받아들여, 옛 사학연금법 31조 2항이 "평등 원칙에 위반된다"고 판단하고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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