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팝의 황제로 기록될 마이클 잭슨

입력 2009.06.26 (09:49)

수정 2009.06.2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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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부터 팝의 신동이었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팝스타였으며, 지구상 최고의 음악인으로 기록될 마이클 잭슨이 50세의 아까운 나이에 스러졌다.
고인은 갔지만 음악과 춤, 이들이 더해진 화려한 뮤직비디오를 선보이며 대중문화를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팝의 황제'란 칭호는 영원히 남을 것으로 보인다.
누구보다도 화려한 나날을 보낸 이 최고의 스타는 그러나 2005년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와 성형수술 논란에 휩싸이며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은둔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두 번의 공식 결혼과 3명의 아이에 대한 양육권을 가진 그는 어린이에 대한 성적학대 사건을 비롯한 여러 소송에 시달리는 등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1958년 8월29일 인디애나 주 게리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마이클 잭슨은 어렸을 적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맘껏 뿜어냈다.
그는 4명의 형들과 함께 구성한 `잭슨파이브'에 6세 때부터 참여했다. 이들은 모타운 레코즈 에 소속돼 7장의 플래티넘 싱글을 기록했으며 이 가운데 3장은 200만장 이상을 판매하는 멀티 플래티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이들은 1976년 CBS의 에픽 레코즈로 적을 옮겼다.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잭슨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경험했던 잭슨은 이 시기를 불행하고 고독한 시절로 기억했다.
잭슨파이브와 결별한 잭슨은 1979년 제작자인 퀸시 존스 아래에서 첫 솔로 앨범인 `오프 더 월'을 내 1천만장 이상을 판매하는 성공을 거뒀다.
퀸시 존스와 다시 뭉쳐 1982년 제작한 `스릴러'는 그의 작곡가 및 공동제작자로서의 재능까지 입증하면서 팝 역사상 전무후무한 4천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최고의 히트를 거둔다.
그러나 오히려 초기의 지나친 성공이 그에게 독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시러큐스대 팝문화 전공인 로버트 톰슨 교수는 스릴러의 성공이 잭슨에게 지나친 부와 권력을 안겼고, 이후 그를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잭슨은 1987년 `배드(2천만장)', 1991년 `데인저러스(2천100만장)' 등 앨범을 히트시켰다.
팝 문화의 아이콘으로 등장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잭슨은 1991년 소니뮤직과 아티스트 역사상 최고액의 계약을 맺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잭슨은 1993년 어린이에 대한 성적학대 사건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며 1년후 무려 2천330만달러에 이르는 합의금을 치러야 했다. 이후 그는 이 합의를 후회했다.
잭슨은 성형수술로 인한 외모의 변화로도 구설수에 올랐다.
수년에 걸쳐 그의 피부는 얇아져갔으며 부작용에 시달렸다. 배너티 페어 지(誌)는 그의 코끝이 보철물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잭슨은 1994년 당시 26세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해 대중을 놀라게 했지만, 이 결혼은 2년도 채 가지 못했다.
이후 내는 앨범마다 실패하는 비운을 겪은 잭슨은 1997년 성형수술 당시 만난 간호사 데비 로(당시 37세)와 재혼해 두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1999년 이혼했다.
잭슨은 2002년 독일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이름모를 여성으로부터 얻었다는 막내아들을 잡고 발코니 밖으로 흔들어대 대중의 엄청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2005년 아동학대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잭슨은 이후 바레인과 아일랜드, 프랑스 등을 전전하며 은둔 생활을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7월13일 예정된 런던 콘서트를 통해 컴백 무대를 가질 예정이었다. 지난 3월 런던에서의 짧은 기자회견에서 그는 10년간의 공백후 갖는 이 공연이 고별무대임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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