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영, 타인 슬픔 먼저였던 사람”

입력 2009.07.19 (19:58)

수정 2009.07.19 (20:02)

"생전에 마지막 남긴 말이 `11번째 8천m 정상에 서서 기쁘지만, 낭가파르밧 등정 중 오스트리아 대원 1명이 사라진 게 가슴 아프다'였을 정도로 자신의 기쁨보다 타인의 슬픔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낭가파르밧(8천126m) 설원에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꿈을 묻은 여성 산악인 고(故) 고미영씨의 영원한 동지인 김재수 원정대장은 19일 고인의 시신이 안치된 국립의료원 영안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고인에 대해 이렇게 추억했다.
2006년 초오유(8천201m)를 제외한 히말라야 8천m 고봉 10개를 고인과 함께 오르며 생사를 같이한 김 대장은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미영이는 사고 지점에서 미끄러졌기 보다는 신발에 설치된 아이젠이 옷이나 다른 아이젠 끝에 걸려서 갑작스럽게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김 대장은 자신에게 고인이 어떤 존재였냐는 질문에 "사적인 감정을 떠나서 고미영 대장은 나에게 초록빛 꿈을 준 여성"이라며 "(히말라야 14좌 완등 이후) 고인과 함께 히말라야 등반학교를 짓고 싶었는데 청사진을 보여줬던 고 대장이 사라져 지금으로서는 암흑에 빠진 것 같다"라며 절망적 심정을 피력했다.
다음은 김 대장과 일문일답.
- 사고 당시 상황은
▲10일 조금 늦은 시간인 오후 7시11분에 정상에 섰다. 강한 바람에 하산이 늦어졌고 정상과 캠프4 사이에서 고소 포터가 심한 고소증으로 전혀 거동할 수 없어 전 대원이 합심해 고소 포터를 캠프 4까지 이송하느라 하산이 점점 더 늦어졌다.
캠프3에서 캠프2까지는 전 루트가 로프로 연결돼 있다. 그런데 캠프2 30m 위쪽 완경사 지점에 로프가 묻혀있었다. 먼저 내려오면서 그 로프를 바깥으로 드러내려고 했지만 결국 3-4m만 드러났고 나머지 10m는 드러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로프 없이도 내려올 수 있는 지점이어서 저는 먼저 내려와 뒷사람을 위해 물을 끓이고 있었다.
고 대장이 그 지점을 지나다가 신발 밑의 아이젠 부분이 옷이나 (다른 신발의) 아이젠 끝에 걸려서 갑작스럽게 추락한 것 같다. 미끄러진다면 제동할 능력이 있었다. 아이젠 때문에 급작스럽게 넘어지면서 제동을 못했다.
- 시신 수습 당시 상황은 어땠나.
▲고 대장이 있던 곳은 눈이 녹으면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 지점이다. 거기에 조그만 바위가 있었는데 그 지점에 상체 등 부분이 바위에 걸려있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시신이 반쯤 눈에 묻혀 있었다. 시신 주위 얼음을 2시간여에 걸쳐 다 깨서 시신을 수습했다. 외관상 전혀 손상된 부분은 없고 단지 추락하면서 머리 부분이 함몰되는 상처를 입었다.
- 고인 시신이라고 모셔올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가장 가슴아픈 사람은 가족이겠지만, 사고 이후 오늘 시신이 들어올 때까지 가장 가슴아팠던 사람은 저라고 생각한다. 시신은 보이는데 있고, 어두워지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현장을 목격한 저는 어땠겠느냐. 가족에 비하지는 못하겠지만 정말 찢어지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고 대장이 더 이상 인명은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모양이다. 수십개 낙석과 낙빙이 떨어지는데도 5명 대원이 전혀 다치지 않고 피해도 없었다. 현장 사진을 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암벽을 등반해서 시신을 운구했다.
- 고 대장이 마지막 남긴 말이나 떠오르는 말은.
▲고 대장이 낭가파르밧 정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 중에 그런 말이 있다. "11번째 8천m 정상에 선 것이 상당히 기쁘다. 하지만 낭가파르밧 등정 중 오스트리아 대원 1명이 사라진게 가슴 아프다" 항상 자신의 기쁨보다 타인의 슬픔을 더 생각했다.
- 김 대장에게 고인은 어떤 존재인가.
▲사적인 감정을 떠나서 31년째 등산을 해 온 나에게 초록빛 꿈을 준 여성이다. 이 등반이 끝난 후 히말라야를 동경하는 이들을 위한 등반학교를 열고 싶었다. 나 혼자 능력으로는 부족했다. 히말라야 14좌를 다 오른 남녀가 등반학교를 함께 개설했다면 엄청난 파급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청사진을 보여줬던 고 대장이 순식간에 사라져서 지금으로서는 암흑에 빠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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