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안보정상회의는 말 그대로 각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 수반이나 유엔 같은 국제기구의 수장들끼리 모이는 회의체다.
그러나 유럽연합(EU)에선 헤르만 반롬푀이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조제 마누엘 바호주 집행위원장 두 사람이 대표로 참석한다.
이는 2차대전 후 다시는 유럽 국가끼리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출발한 EU의 발전 역사와 27개국의 공동체라는 특성과 관련이 있다.
개별 국가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곳이 EU에선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다. 집행위의 수장인 집행위원장은 임기가 5년이며 유럽의회에서 표결로 선출한다.
EU에만 있는 독특한 기관이 이사회(The Council of European Union)다.
이사회는 27개 회원국 대표들의 모임으로 EU의 중요 정책을 각국이 이해관계에 바탕해 타협해 결정하는 곳이다.
회원국의 최고 대표, 즉 총리나 대통령들이 모이는 정상회의(European Council)는 속칭 '유러피안 서밋(European Summit)'으로 불리며 이곳에서 합의하는 사항은 형식적으론 법적 구속력이 없으나 실질적으로는 이사회나 집행위 등 다른 기구에 막강한 영향을 주는 사실상의 지침으로 작용한다.
EU의 기존 기본조약을 개혁한 리스본조약이 2009년 11월 발효되기 이전까지 정상회의는 순번 의장국 수반이, 분야별 9개 이사회는 순번의장국의 소관 부처 장관이 의장을 맡았다.
하지만 6개월 순번 의장제도는 일관성에 문제가 있고 비효율성이 크다는 비판이 있었다.
또 2004년 이후 대거 가입한 옛 공산권 회원국 가운데 일부 국가는 의장국으로서 지도력과 추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받았다.
특히 대외적으로 EU의 대표가 누구인지가 모호해 외교상의 문제들도 일어났다.
그래서 리스본조약을 통해 임기 2년6개월(1회 연임 가능)의 정상회의 상임의장직이 신설됐다.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회원국 정상 모임을 주재하는 자리여서 일각에선 `EU 대통령'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개별 국가 대통령과는 권한과 위치가 다르다. 집행위원장과 상임의장 간의 관계가 불투명하고, 누가 대외적으로 EU를 대표하느냐는 문제는 리스본조약 체제 이전보다 더 모호해졌다.
이에 따른 우려가 외교적 혼선으로 나타난 사례는 적지 않다. 지난 2010년 2월 미국 신문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5월 하순으로 예정된 연례 EU-미국 정상회의에 불참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 회의는 당시 EU 이사회 순번의장국인 스페인 정부가 주최할 예정이었으나 백악관은 주최자인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의 대표성에 의구심을 제기, 불참을 결정했다고 WSJ는 설명했다. 도대체 누가 EU를 대외적으로 대표하느냐는 물음이다.
이는 리스본 조약 체제가 출범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도기의 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도 EU 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정상회담 등 중요 행사가 열릴 때면 대부분 반롬푀이 상임의장과 바호주 집행위원장이 함께 참석한다. 이에 따라 EU 측은 물론 상대국도 의전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난감해 하는 때가 많다.
굳이 순서를 따져야 할 때면 바호주가 반롬푀이에게 양보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다.
두 사람이 가급적 어색한 자리를 만들지 않으려 한다는 말도 있으나 정상회의 등이 잦기 때문에 EU 조약이 개정돼 권력구조가 바뀌기 전까지는 묘한 상황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두 명 모두 참석하는 이번 서울 회의에선 어떤 식으로 어색함을 해소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