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정권들이 홀대했던 음력 설, 왜 대세가 됐나?

입력 2015.02.18 (06:56)

수정 2015.02.18 (17:17)

KBS 뉴스 이미지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고 있는 가운데 설 연휴 변천사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있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인 설은 세수(歲首), 원단(元旦), 원일(元日, 신원(新元)이라고도 한다. 근신·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으로 신일(愼日)이라고도 불렸다.

옛부터 설날 아침엔 사당에서 차례(茶禮)를 지내고 새 옷을 입은 후 어른들을 찾아 새해 문안을 드린 후 덕담을 나눴다.



조선 순조 때 김매순이 한양(漢陽)의 연중 행사를 기록한 책인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설날부터 3일 동안은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한 많은 남녀들이 길거리를 떠들썩하게 왕래하며 반갑게 "과거 급제하세요", "돈 많이 버세요"라며 덕담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떡국을 만들어 손님을 대접하고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설은 한 때 ‘수난기’를 겪었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우리 민족의 전통인 음력 설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일제는 1895년 을미개혁 당시 태양력과 함께 도입된 양력 설을 공식적인 '설'로 인정하고, 양력 설과 음력 설을 동시에 지내지 못하게 했다. 음력 설에는 떡방앗간을 못 돌리게도 했다.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음력설을 없애겠다는 의도였다.

이에 따라 설 명절은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신정(양력 1월1일)과 구정(음력 1월1일)으로 이원화됐다. 여전히 음력설을 지내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른바 '왜(倭)설'로 불린 양력설을 쇠는 사람도 늘었다.

◆ 이승만, 박정희가 신봉했던 양력 설



해방 이후 양력 설이 대세로 떠올랐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모두 양력 설을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하자, 음력 설을 지내는 사람은 줄고, 양력 설을 지내는 사람이 급증했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부터 1월1일부터 3일까지를 공휴일로 지정, 3일간의 양력 설을 쇨 것을 장려했다.

박정희 정권은 양력 설을 장려하는 정책을 보다 강화했다. 양력 설은 3일 연휴로 지정했지만, 음력 설은 아예 평일로 만들었다. 음력 설이 평일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양력 설을 쇠었다. 70년대만 해도 귀향의 행렬은 양력 설에 이뤄졌다.

그렇다면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왜 음력 설을 홀대했을까.

일각에서는 두 대통령이 친일 성향 때문에 '왜설'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던 양력 설을 장려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양력이 국민 생활에 깊이 뿌리박힌 상황에서 양력 설이 여러모로 생활패턴에 맞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구정 공휴일을 지내는 것은 산업 경제를 일으키는 것과는 거꾸로 가는 일이라며 음력 설을 반대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75년 국무회의에서 "정부가 이중과세(二重過歲. 이중으로 해맞이를 하는 일)를 하지 않도록 국민을 지도·계몽하는 방침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며 "공무원부터 솔선수범해 두 번 설을 쇠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촉구했다.

1978년 최규하 당시 총리는 "구정에 공무원이 정시에 출퇴근을 하는지 근무 중 자리를 뜨지는 않는지 철저히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 전두환, 노태우가 살린 음력 설…양력 설은 이름을 잃다



1980년대 들어 음력 설은 다시 부활기를 맞는다.

음력 설에 대한 수요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80년대 각종 선거를 치르면서 음력 설 부활은 선거 공약으로 내걸리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5년 현재의 설은 공휴일로 재지정됐다. 전두환 대통령은 음력 설을 공휴일인 '민속의 날'로 명명했다.

음력 설이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은 노태우 대통령 때였다.

노 전 대통령은 1989년 2월에 '설날'이라는 명칭을 복원하고 3일의 공휴일을 지정했다. 민족 최대명절인 설을 맞아 고향을 찾는 귀성객의 교통 편의를 위한 조치였다.

음력 설이 대세가 되자 김대중 대통령은 양력 설에 대한 '옥죄기'에 들어갔다.

양력 1월1일은 '설'이라는 이름 조차 잃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 해인 1998년 12월에 규정을 개정, 양력 1월1일을 '설'이 아닌 '1월1일'로 규정하고 공휴일을 하루로 축소했다.

◆10명 중 9명은 음력 설…양력 설 신봉자도 여전

여론조사를 해보면 음력 설은 이미 민족의 설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양력 설은 딱 하루, 음력 설은 길게는 5~6일씩 연휴가 되는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의 결과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2006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7.7%가 '음력설을 쇤다'고 대답했다. 특히 광주ㆍ전남 지역 97.6%, 전북지역 95.2%가 '음력설을 쇤다'고 응답해 호남지역에서 음력 설을 쇠는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여전히 '양력설을 쇤다'는 응답자도 8%나 됐다. '둘 다 쇤다'는 의견(3.2%)는 의견까지 합치면 10%는 여전히 양력 설을 쇤다는 얘기다.

양력 설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통상 2월에 맞는 음력 설보다는 1월1일이 새해 맞이라는 느낌이 더 난다고 말한다. 시민 정재우(36)씨는 "양력 설 쇠는 사람들을 위해서 신정도 이틀 정도는 연휴를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KBS 뉴스 이미지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