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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와 두 개의 양심]⑦ 임종헌 ‘건망증’ 틈타…보고서 써놓고도 자체 폐기한 판사
입력 2019.07.28 (07:02) 수정 2019.07.28 (22:22) 취재K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⑦ 임종헌 ‘건망증’ 틈타…보고서 써놓고도 자체 폐기한 판사
●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재판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일곱 번째 순서로, 그제(2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건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된 시진국 창원지법 통원지원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2기·전 법원행정처 기획제1·2심의관)의 진술 내용을 살펴봅니다.

사실 시 부장판사는 이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고, 지난 4월 본 연재물에서 다뤄진 적이 있습니다.(▶연관기사: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② “재판결과 유출 왜 문제냐” 묻자…동문서답한 판사) 하지만 그가 양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에서 나와 진술한 내용도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는데다, '결석왕' 타이틀까지 차지했던 보기 힘든 증인임을 고려해(▶연관기사: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⑥ 자꾸만 결석하는 ‘판사 증인’들…못 나오는 이유도 제각각) 한 번 더 주인공으로 채택했습니다.


#1. 힘들게 쓴 보고서, 결국 '뭉갠' 이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수많은 문건 작성 지시를 받았던 시 부장판사. 그는 임 전 차장이 종종 과거의 지시를 깜빡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 양승태 피고인 변호인(이하 '양 변'): 보고서 작성 업무에 대해 행정처 분위기가 심의관들의 명시적 반대의사를 억압해가면서까지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인가요?
- 증인: 제 기억으로는 명시적으로 반대했던 심의관은 거의 없었던 것 같고요. 다만 작성 지시 취지를 이해를 잘 못하겠다거나, 약간 좀 부적절해 보인다 하면 심의관 차원에서 거기에 대응방법은 보고서 작성 보고 시기를 늦춘다거나 그렇게 하다보면 (임 전 차장이) 작성 지시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내키지 않는 보고서 작성 지시가 있으면 일단 '뭉갰고', 그러다보면 임 전 차장이 지시를 까먹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는…, 나름의 생존전략이 있었다고 고백한 겁니다.

이 전략을 실제 활용한 경험도 증언했습니다. 2015년 2월,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이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개설된 법관들의 카페에 대한 문건 작성 지시를 내렸을 때의 일입니다.

이판사판 카페를 소개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내부 문건이판사판 카페를 소개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내부 문건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임 전 차장은 이 익명 카페에서 활동하고 있는 법관과 게시글의 동향을 파악하고, 게시글의 외부 공개를 막고 카페를 폐쇄할 수 있는 대처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시 부장판사는 이에 대해 '현황 파악'까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대처방안 강구' 지시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 바람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쓸 만한 내용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 양 변: 그 대책(대처방안)들은 증인이 임종헌 실장이 좋아할 내용으로 증인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안을 기재한 거죠?
- 증인: 좋아할 만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단 대처방안으로 쓸 게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고서 작성 지시를 받고 시간이 가고 하니까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니 고민했던 기억이 나고, 그런 상태에서 심의관들이 대처방안이라 쓰는 것은 모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이것저것 머리에서 꺼내서 기재하는 거라. 그런 과정에서 나왔던 방안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 짜내서 완성한 보고서, '150214 이판사판 카페 현황'. 하지만 시 부장판사는 정작 그 보고서를 임 전 차장에게 올리지 않았습니다. 보고서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했습니다. "이건 정말 보고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토로했습니다.

- 박병대 피고인 변호인(이하 '박 변'): 임종헌에게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증인: 가장 큰 건 대처방안 내용이 제가 어떻게 뭐 쓰긴 했지만 제가 쓰고도 적절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고 드리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두 번째 이유는 그런 차제에 우연히 같은 주제 관련 다른 판사의 보고서가 보고되는 걸 제가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잘됐다' 생각하고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박상언 심의관이 먼저 지시를 이행한 걸 보고 잘됐다고 안심했다니, '이판사판' 카페 관련 지시가 정말 스트레스였던 모양입니다. 이런 '뭉개기' 이후에도 임 전 차장은 다행히 보고 누락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상언 심의관이 2015년 7월 보고한 ‘익명카페 설득논리 및 대응방안 검토’ 문건의 일부. 박상언 심의관이 2015년 7월 보고한 ‘익명카페 설득논리 및 대응방안 검토’ 문건의 일부.

이후 좌배석 판사는 임 전 차장의 건망증이 의아하다는 듯, 증인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 좌배석: 임종헌으로부터 (이판사판 카페 관련) 지시를 받은 시점이 (2015년) 1월 말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맞는 거 같습니까?
- 증인: 1월 말 2월 초... 뭐 그 즈음이었던 거 같습니다. 예.
- 좌배석: 작성 지시자인 것으로 진술되고 있는 임종헌이, 관련 보고가 아예 안올라왔음 모를까... 2월 15일에 유사한 내용 지시했던 박상언으로부터, 그런 보고서를 하나 보고 받았는데도 역시 같은 지시를 했던 증인에게 "왜 내가 예전에 지시했던 보고 안하냐"고 물은 적 없었나요?
- 증인: 네, 그런 얘기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2. 국회의원 '재판 청탁'? "일방적인 요구였을 뿐"

그렇다고 임 전 차장이 모든 걸 잊어버리는 건 아니니, 시 부장판사의 수난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겠죠. 국회의원 '재판 청탁' 관련 문건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 검사: 서영교가 임종헌 차장에게 지역구 관계자 아들의 강제추행 미수 사건을 청탁해서, 증인이 그 사건 진행경과나 이런 걸 청탁자 쪽에 확인한 다음에 벌금액의 감액 등을 원하고 있다, 1심에서도 서 의원이 차장님께 부탁해서 벌금형의 선처를 받았다. 이런 내용 보고서 작성한 거 기억 나시죠? 그런 것들은 명백히 재판의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위법한 보고서고, 그건 보고도 되었던 거 아닌가요?


시 부장판사는 자신은 물론 임 전 차장도 다소 불쾌해했던 업무였다고 회상했습니다.

- 증인: 그 문건 보고한 거 맞고요. 일단 임종헌 차장 지시를 받아서. 그때 분위기도 임종헌 차장도 뭐 이런 걸 부탁하는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약간 불만섞인 분위기로 '좀 알아나 봐라. 보좌관 연락한단다'라고 지시했고, 그래서 제가 보좌관 전화 연락 받고 저도 작성하면서 뭐 이런 것까지 하나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어찌됐든 지시가 왔기 때문에 그래서 최대한 요지만 간단히 적어서. 그리고 이메일 보고도 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 문건은. 그래서 임 차장에게 전달했고.

그러면서도 세상이 '재판 청탁' '재판 거래'라고 이름 붙이는 그 문건에 별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 증인: 제 생각은 그건 서영교의 일방적인 청탁 내용인 것이지. 그 내용이 재판부에 전달된다거나 결과에 반영될 거라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검사가 문건의 일부 내용을 문제삼자, 그건 자신의 의견이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 검사: 1심에서도 이미 서 의원이 (임종헌) 차장님께 부탁해 벌금형의 선처를 받았다는 내용도 본인이 기재했는데...
- 증인: [말 끊으며] 그거 제가 병기한 거 같은데요. "보좌진 의견임" 이렇게 썼습니다.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온 국회의원 재판청탁 논란이, 시 부장판사에는 터무니없는 음모론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3. '사법농단' 논란 예견한 증인

시 부장판사는 자신이 행정처에서 작성·편집한 여러 문건을 두고 '재판 개입' 의혹을 제기하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 양 변: 그런 문건은 청와대 또는 행정부의 법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꾸려는 의도 정도로 해석해야지, 이를 재판 개입의 의도로... 재판 개입이 있었다는 그런 사례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이지요?
- 증인: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양 변: 지나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맞지 않는 것이죠?
- 증인: 굉장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증언을 보면, 시 부장판사는 이런 '오해'가 벌어질 것을 훨씬 전부터 걱정했던 것도 같습니다.

- 박 변: 증인은 검찰에서 '사법부가 상고법원 입법을 추진 위해 BH가 관심가질 만한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어떤가요?'라는 검사의 질문에, '임종헌 실장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시도를 했던 건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진술하였죠?
- 증인: 조서에는 그렇게 돼 있다고 하는데. 임종헌 실장께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겠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 같습니다.
- 박 변: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증인이 이해한 바를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 증인: 제 진술의 취지는 어쨌든 당시에 계속 중인 사건에 대해서 그걸 어떤 매개를 삼아서 그런 사건이 있으니까 청와대에서 관심을 표명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이, 상대방 입장에서는 '아, 쟤네들이 저거 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구나'라고 오해를 받을수도 있겠다 이런 취지였습니다.


2015년 7월 20일 작성된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 전략' 보고서의 일부 표현이 부적절해서, 바꿔야 한다는 의사를 표현했다고도 말했습니다.

- 증인: 제가 1차 작성자한테도 표현은 바꿔야하는 것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고, (임종헌) 실장님한테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취지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이게 실행될지 안될지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얘기를 듣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판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런 취지의 맥락의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고요. 그런 얘기 했다는 거 자체가 표현이라 할지라도 적절하지는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판결을 뭐라고 보는 거냐" "딜의 대상"이라는 표현들은 작금의 '사법농단' 의혹을 비판하는 데도 자주 쓰이죠. 자신이 관여한 문건들이 '재판 개입''재판 거래' 의혹을 받을 위험성을 미리 내다봤던 셈입니다.

#4. 심의관은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조금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가장 중요한 혐의는 '직권남용'입니다. 공무원이 공무 수행을 위해 부여된 직권을 부당하게 사용해, 상대방에게 할 필요 없는(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죄를 말합니다. 실제로 양 전 대법원장 등의 공소장엔 아래와 같은 표현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이로써 피고인들은 그 직권을 남용하여 …할 목적으로 …등 사법부의 독립 및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내용의 검토를 하도록 위법·부당한 지시를 함으로써 A, B, C...로 하여금 …하게 하는 등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이 자신에 대한 수사를 넘어 '사찰'을 했고, 그 과정에서 "직권남용이라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를 개발했다"라고 억울해하기도 했었지요.


이날 증인신문에서는 이 직권남용죄의 성립과 관련해 중요한 쟁점이 상당수 거론됐습니다. 윗선의 지시로 '재판 거래', '재판 개입' 의혹 문건을 작성한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이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대표적인데요.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이와 관련된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 측의 증인신문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 양 변: 증인은 상고법원 관련해서 여러 종류의 보고서를 작성하셨는데...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해서 보고서를 작성하신 게 아니라, 주로 기존에 존재하던 자료들을 취합해서 편집하셨던 것으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 증인: 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박 변: 보고서의 체계나 구체적 내용을 (임종헌이) 알려주며 그대로 작성하라고 지시한 경우, 그런 보고서는 임종헌을 보좌해 임종헌 의견과 그로부터 교부 받은 자료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 증인: 세부적인 내용까지... 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변호인 모두, 시 부장판사의 문건 작성 업무가 임종헌 전 차장의 지시를 '받아쓰는' 정도였다는 취지의 증언을 확보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상급자인 임 전 차장 등의 일을 이렇게 보좌하는 것은 행정처 심의관들의 직무 집행이기 때문에, 직권남용죄에서 말하는 "의무 없는 일"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논리입니다. (▶관련 기사: 사법농단 판사들 직권남용 줄줄이 무죄 시나리오)

반면 검찰은 행정처 심의관들의 역할이 단순 '보좌'에만 그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 검사: 임종헌 실장이 구체적으로 결론을 알려주거나 내용 일부를 알려주면, 증인이 그 주장에 대해 기존에 있던 자료를 분석하고 새로 리서치도 하고 거기에 아이디어를 더해 보고서 완성한 건 맞는 거죠?
- 증인: 네.
- 검사: 그렇게 분석을 할 때 증인이 10년 정도 법관으로 근무하며 쌓은 법률적 지식이나 법관, 심의관으로서 쌓은 경험, 이런 게 바탕이 돼서 분석한 거 맞는 거죠?
- 증인: 뭐 그런 것들이 활용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검찰은 심의관들이 단순히 받아쓰기만 한 게 아니라, 심의관 스스로의 판단과 의견을 포함해 문건을 작성한 것이라는 취지의 증언을 얻으려 노력했습니다. 심의관들도 하급자(직원)를 둔 결재권자, 중견법관이라는 점 역시 강조합니다. 임 전 차장 등에게 지시를 받으면 그걸 단순 보좌만 하는 게 아니라 "고유한 권한과 역할"이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지위를 지닌 심의관들에게 임 전 차장과 양 전 원장 등이 위법·부당한 지시로 "의무없는 일"을 시켰으니, 직권남용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법 농단' 사건에서의 직권남용죄 성립 문제를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박판규 전 판사(현 변호사)가 쓴 ‘사법농단과 검찰수사 – 직권남용죄 적용에 관한 검토’[PDF](링크: idp.or.kr/lib/file_down.php?bf_idx=1709)라는 글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⑦ 임종헌 ‘건망증’ 틈타…보고서 써놓고도 자체 폐기한 판사
    • 입력 2019.07.28 (07:02)
    • 수정 2019.07.28 (22:22)
    취재K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⑦ 임종헌 ‘건망증’ 틈타…보고서 써놓고도 자체 폐기한 판사
●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재판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일곱 번째 순서로, 그제(2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건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된 시진국 창원지법 통원지원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2기·전 법원행정처 기획제1·2심의관)의 진술 내용을 살펴봅니다.

사실 시 부장판사는 이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고, 지난 4월 본 연재물에서 다뤄진 적이 있습니다.(▶연관기사: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② “재판결과 유출 왜 문제냐” 묻자…동문서답한 판사) 하지만 그가 양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에서 나와 진술한 내용도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는데다, '결석왕' 타이틀까지 차지했던 보기 힘든 증인임을 고려해(▶연관기사: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⑥ 자꾸만 결석하는 ‘판사 증인’들…못 나오는 이유도 제각각) 한 번 더 주인공으로 채택했습니다.


#1. 힘들게 쓴 보고서, 결국 '뭉갠' 이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수많은 문건 작성 지시를 받았던 시 부장판사. 그는 임 전 차장이 종종 과거의 지시를 깜빡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 양승태 피고인 변호인(이하 '양 변'): 보고서 작성 업무에 대해 행정처 분위기가 심의관들의 명시적 반대의사를 억압해가면서까지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인가요?
- 증인: 제 기억으로는 명시적으로 반대했던 심의관은 거의 없었던 것 같고요. 다만 작성 지시 취지를 이해를 잘 못하겠다거나, 약간 좀 부적절해 보인다 하면 심의관 차원에서 거기에 대응방법은 보고서 작성 보고 시기를 늦춘다거나 그렇게 하다보면 (임 전 차장이) 작성 지시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내키지 않는 보고서 작성 지시가 있으면 일단 '뭉갰고', 그러다보면 임 전 차장이 지시를 까먹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는…, 나름의 생존전략이 있었다고 고백한 겁니다.

이 전략을 실제 활용한 경험도 증언했습니다. 2015년 2월,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이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개설된 법관들의 카페에 대한 문건 작성 지시를 내렸을 때의 일입니다.

이판사판 카페를 소개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내부 문건이판사판 카페를 소개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내부 문건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임 전 차장은 이 익명 카페에서 활동하고 있는 법관과 게시글의 동향을 파악하고, 게시글의 외부 공개를 막고 카페를 폐쇄할 수 있는 대처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시 부장판사는 이에 대해 '현황 파악'까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대처방안 강구' 지시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 바람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쓸 만한 내용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 양 변: 그 대책(대처방안)들은 증인이 임종헌 실장이 좋아할 내용으로 증인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안을 기재한 거죠?
- 증인: 좋아할 만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단 대처방안으로 쓸 게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고서 작성 지시를 받고 시간이 가고 하니까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니 고민했던 기억이 나고, 그런 상태에서 심의관들이 대처방안이라 쓰는 것은 모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이것저것 머리에서 꺼내서 기재하는 거라. 그런 과정에서 나왔던 방안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 짜내서 완성한 보고서, '150214 이판사판 카페 현황'. 하지만 시 부장판사는 정작 그 보고서를 임 전 차장에게 올리지 않았습니다. 보고서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했습니다. "이건 정말 보고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토로했습니다.

- 박병대 피고인 변호인(이하 '박 변'): 임종헌에게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증인: 가장 큰 건 대처방안 내용이 제가 어떻게 뭐 쓰긴 했지만 제가 쓰고도 적절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고 드리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두 번째 이유는 그런 차제에 우연히 같은 주제 관련 다른 판사의 보고서가 보고되는 걸 제가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잘됐다' 생각하고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박상언 심의관이 먼저 지시를 이행한 걸 보고 잘됐다고 안심했다니, '이판사판' 카페 관련 지시가 정말 스트레스였던 모양입니다. 이런 '뭉개기' 이후에도 임 전 차장은 다행히 보고 누락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상언 심의관이 2015년 7월 보고한 ‘익명카페 설득논리 및 대응방안 검토’ 문건의 일부. 박상언 심의관이 2015년 7월 보고한 ‘익명카페 설득논리 및 대응방안 검토’ 문건의 일부.

이후 좌배석 판사는 임 전 차장의 건망증이 의아하다는 듯, 증인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 좌배석: 임종헌으로부터 (이판사판 카페 관련) 지시를 받은 시점이 (2015년) 1월 말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맞는 거 같습니까?
- 증인: 1월 말 2월 초... 뭐 그 즈음이었던 거 같습니다. 예.
- 좌배석: 작성 지시자인 것으로 진술되고 있는 임종헌이, 관련 보고가 아예 안올라왔음 모를까... 2월 15일에 유사한 내용 지시했던 박상언으로부터, 그런 보고서를 하나 보고 받았는데도 역시 같은 지시를 했던 증인에게 "왜 내가 예전에 지시했던 보고 안하냐"고 물은 적 없었나요?
- 증인: 네, 그런 얘기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2. 국회의원 '재판 청탁'? "일방적인 요구였을 뿐"

그렇다고 임 전 차장이 모든 걸 잊어버리는 건 아니니, 시 부장판사의 수난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겠죠. 국회의원 '재판 청탁' 관련 문건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 검사: 서영교가 임종헌 차장에게 지역구 관계자 아들의 강제추행 미수 사건을 청탁해서, 증인이 그 사건 진행경과나 이런 걸 청탁자 쪽에 확인한 다음에 벌금액의 감액 등을 원하고 있다, 1심에서도 서 의원이 차장님께 부탁해서 벌금형의 선처를 받았다. 이런 내용 보고서 작성한 거 기억 나시죠? 그런 것들은 명백히 재판의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위법한 보고서고, 그건 보고도 되었던 거 아닌가요?


시 부장판사는 자신은 물론 임 전 차장도 다소 불쾌해했던 업무였다고 회상했습니다.

- 증인: 그 문건 보고한 거 맞고요. 일단 임종헌 차장 지시를 받아서. 그때 분위기도 임종헌 차장도 뭐 이런 걸 부탁하는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약간 불만섞인 분위기로 '좀 알아나 봐라. 보좌관 연락한단다'라고 지시했고, 그래서 제가 보좌관 전화 연락 받고 저도 작성하면서 뭐 이런 것까지 하나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어찌됐든 지시가 왔기 때문에 그래서 최대한 요지만 간단히 적어서. 그리고 이메일 보고도 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 문건은. 그래서 임 차장에게 전달했고.

그러면서도 세상이 '재판 청탁' '재판 거래'라고 이름 붙이는 그 문건에 별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 증인: 제 생각은 그건 서영교의 일방적인 청탁 내용인 것이지. 그 내용이 재판부에 전달된다거나 결과에 반영될 거라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검사가 문건의 일부 내용을 문제삼자, 그건 자신의 의견이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 검사: 1심에서도 이미 서 의원이 (임종헌) 차장님께 부탁해 벌금형의 선처를 받았다는 내용도 본인이 기재했는데...
- 증인: [말 끊으며] 그거 제가 병기한 거 같은데요. "보좌진 의견임" 이렇게 썼습니다.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온 국회의원 재판청탁 논란이, 시 부장판사에는 터무니없는 음모론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3. '사법농단' 논란 예견한 증인

시 부장판사는 자신이 행정처에서 작성·편집한 여러 문건을 두고 '재판 개입' 의혹을 제기하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 양 변: 그런 문건은 청와대 또는 행정부의 법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꾸려는 의도 정도로 해석해야지, 이를 재판 개입의 의도로... 재판 개입이 있었다는 그런 사례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이지요?
- 증인: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양 변: 지나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맞지 않는 것이죠?
- 증인: 굉장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증언을 보면, 시 부장판사는 이런 '오해'가 벌어질 것을 훨씬 전부터 걱정했던 것도 같습니다.

- 박 변: 증인은 검찰에서 '사법부가 상고법원 입법을 추진 위해 BH가 관심가질 만한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어떤가요?'라는 검사의 질문에, '임종헌 실장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시도를 했던 건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진술하였죠?
- 증인: 조서에는 그렇게 돼 있다고 하는데. 임종헌 실장께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겠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 같습니다.
- 박 변: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증인이 이해한 바를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 증인: 제 진술의 취지는 어쨌든 당시에 계속 중인 사건에 대해서 그걸 어떤 매개를 삼아서 그런 사건이 있으니까 청와대에서 관심을 표명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이, 상대방 입장에서는 '아, 쟤네들이 저거 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구나'라고 오해를 받을수도 있겠다 이런 취지였습니다.


2015년 7월 20일 작성된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 전략' 보고서의 일부 표현이 부적절해서, 바꿔야 한다는 의사를 표현했다고도 말했습니다.

- 증인: 제가 1차 작성자한테도 표현은 바꿔야하는 것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고, (임종헌) 실장님한테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취지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이게 실행될지 안될지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얘기를 듣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판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런 취지의 맥락의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고요. 그런 얘기 했다는 거 자체가 표현이라 할지라도 적절하지는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판결을 뭐라고 보는 거냐" "딜의 대상"이라는 표현들은 작금의 '사법농단' 의혹을 비판하는 데도 자주 쓰이죠. 자신이 관여한 문건들이 '재판 개입''재판 거래' 의혹을 받을 위험성을 미리 내다봤던 셈입니다.

#4. 심의관은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조금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가장 중요한 혐의는 '직권남용'입니다. 공무원이 공무 수행을 위해 부여된 직권을 부당하게 사용해, 상대방에게 할 필요 없는(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죄를 말합니다. 실제로 양 전 대법원장 등의 공소장엔 아래와 같은 표현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이로써 피고인들은 그 직권을 남용하여 …할 목적으로 …등 사법부의 독립 및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내용의 검토를 하도록 위법·부당한 지시를 함으로써 A, B, C...로 하여금 …하게 하는 등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이 자신에 대한 수사를 넘어 '사찰'을 했고, 그 과정에서 "직권남용이라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를 개발했다"라고 억울해하기도 했었지요.


이날 증인신문에서는 이 직권남용죄의 성립과 관련해 중요한 쟁점이 상당수 거론됐습니다. 윗선의 지시로 '재판 거래', '재판 개입' 의혹 문건을 작성한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이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대표적인데요.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이와 관련된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 측의 증인신문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 양 변: 증인은 상고법원 관련해서 여러 종류의 보고서를 작성하셨는데...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해서 보고서를 작성하신 게 아니라, 주로 기존에 존재하던 자료들을 취합해서 편집하셨던 것으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 증인: 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박 변: 보고서의 체계나 구체적 내용을 (임종헌이) 알려주며 그대로 작성하라고 지시한 경우, 그런 보고서는 임종헌을 보좌해 임종헌 의견과 그로부터 교부 받은 자료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 증인: 세부적인 내용까지... 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변호인 모두, 시 부장판사의 문건 작성 업무가 임종헌 전 차장의 지시를 '받아쓰는' 정도였다는 취지의 증언을 확보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상급자인 임 전 차장 등의 일을 이렇게 보좌하는 것은 행정처 심의관들의 직무 집행이기 때문에, 직권남용죄에서 말하는 "의무 없는 일"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논리입니다. (▶관련 기사: 사법농단 판사들 직권남용 줄줄이 무죄 시나리오)

반면 검찰은 행정처 심의관들의 역할이 단순 '보좌'에만 그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 검사: 임종헌 실장이 구체적으로 결론을 알려주거나 내용 일부를 알려주면, 증인이 그 주장에 대해 기존에 있던 자료를 분석하고 새로 리서치도 하고 거기에 아이디어를 더해 보고서 완성한 건 맞는 거죠?
- 증인: 네.
- 검사: 그렇게 분석을 할 때 증인이 10년 정도 법관으로 근무하며 쌓은 법률적 지식이나 법관, 심의관으로서 쌓은 경험, 이런 게 바탕이 돼서 분석한 거 맞는 거죠?
- 증인: 뭐 그런 것들이 활용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검찰은 심의관들이 단순히 받아쓰기만 한 게 아니라, 심의관 스스로의 판단과 의견을 포함해 문건을 작성한 것이라는 취지의 증언을 얻으려 노력했습니다. 심의관들도 하급자(직원)를 둔 결재권자, 중견법관이라는 점 역시 강조합니다. 임 전 차장 등에게 지시를 받으면 그걸 단순 보좌만 하는 게 아니라 "고유한 권한과 역할"이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지위를 지닌 심의관들에게 임 전 차장과 양 전 원장 등이 위법·부당한 지시로 "의무없는 일"을 시켰으니, 직권남용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법 농단' 사건에서의 직권남용죄 성립 문제를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박판규 전 판사(현 변호사)가 쓴 ‘사법농단과 검찰수사 – 직권남용죄 적용에 관한 검토’[PDF](링크: idp.or.kr/lib/file_down.php?bf_idx=1709)라는 글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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