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두 개의 양심]⑯ 헌재소장 비판 기사 ‘대필’한 판사…복종의 한계는 어디?

입력 2019.11.11 (07:00) 수정 2019.11.11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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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열여섯 번째 순서로, 10월 16일과 11월 6일 두 차례에 걸쳐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문성호 서울중앙지법 판사(사법연수원 33기·前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의 증언을 살펴봅니다.

문 판사는 2015년 2월부터 2017년 2월까지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으로 일했습니다. 헌법과 헌법재판소 관련 업무를 주로 수행하면서,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실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처장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 최희준 부장판사[연관 기사] 헌법재판관이 ‘스파이’라 놀린 판사…“난 부조리극 주인공?”로부터 헌재 정보를 받아, 이규진 실장이 지시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또 상급자 지시로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낸 행정소송 상고심의 전원합의체 회부 여부를 검토한 보고서를 작성해 "부적절한 사법행정권 행사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징계(견책)를 받았습니다. 문 판사는 이 징계에 불복해 대법원을 상대로 소송을 낸 상태입니다.

#1. 복종의 의무와 한계

증인이 한 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이른바 '법률신문 기사 대필'입니다. 2016년 3월 박한철 당시 헌법재판소장이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한 발언―재판소원 도입 필요성, 대법원장의 헌법재판관 지명권에 반감 표명 등―을 비판하는 기사 초안(박한철 헌재소장, 거침없는 발언으로 법조계 '술렁')을 써서, 언론사인 법률신문에 보내준 겁니다.

나중에 법률신문 기자가 살을 덧붙이긴 했지만, 기사 제목도 거의 바뀌지 않았고 초안의 주요 내용이 모두 포함됐습니다. 심지어 증인이 허위로 지어낸 "서초동의 한 변호사"의 발언 내용까지 그대로 실렸습니다. '대필'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문성호 판사가 초안을 쓴 것으로 드러난 법률신문 기사 캡처문성호 판사가 초안을 쓴 것으로 드러난 법률신문 기사 캡처

이 일은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시킨 것으로 드러났는데, 심지어 증인의 직속 상급자였던 심준보 사법정책실장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준보 실장은 지난 10월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기사 초안을 써준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임종헌 전 차장은 지난 3월 자신의 재판에서 "기자들은 기사 초안 형태의 보도자료에 호응도가 가장 높다"라며 기사 초안을 써준 게 무엇이 문제냐는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 검사: (임종헌 차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시하던가요?
- 증인: (…) "제가 아주 잘 아는 언론인이 편집인협회 토론회를 보고, 굉장히 불만을 토로하시면서 자기 매체에 싣겠다고 하신다. 문 판사님이 얼마 전에 쓴 보고서(헌재소장 발언 내용과 언론 대응 방향을 정리한 보고서) 있지요? 그거 가지고 기사 초안을 한번 작성해보세요"라고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증인은 이 지시가 내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설 작성에 참고하라며 법률신문에 참고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사법정책심의관이 해오던 일이었지만, 기사 초안까지 작성해주는 것은 "적절한지 의문"이었다는 겁니다. 문 판사가 거절의 뜻을 내비친 뒤 겪은 일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 검사: 그러니 임 차장이 뭐라고 다시 지시하셨습니까?
- 증인: 큰 소리로 말씀하셨고요, "일.단.써.오.세.요!"[또박또박 말함]라고 하셨습니다.

증인은 '강압적'인 지시 때문에 결국 알겠다고 답하고 차장 집무실에서 나왔다고 회고했습니다.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

검찰은 이 사건을 두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임 차장이 직권을 남용해 위법한 지시로 문 판사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공소장에 적었습니다. 변호인들은 즉각 탄핵에 나섰고, '복종 의무'라는 단어도 등장했습니다.

- 고영한 피고인 변호인: (…) 증인. 실장이나 처장, 차장의 사법정책을 보좌하는 사법정책심의관으로서 기사 초고 작성하는 것이 증인의 업무 범위 내에 해당하고, 그 지시가 명백히 위법하지 않는다면, 상급자인 임 차장 지시에 복종하는 의무를 부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인식하고 계셨죠?
- 증인: 복종 의무가 저에게 적용된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검사의 반박이 이어지자, 증인은 '복종의 한계'를 언급했습니다.

- 검사: 상급자 지시가 명백히 위법하지 않더라도, 법령과 공익에 위배되는 지시이면 상급자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 건가요?
- 증인: 뭐, 복종의 한계가 있다는 거는 저도 알고 있고요. 대법원 판례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걸 제가 여기서 얘기할 건 아니고... 당시에는 제가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 거절을 했던 겁니다.

증인은 "기사는 기자가 쓰는 것"이라고도 말했는데요. 변호인들의 주장처럼, 기사 초안 작성이 사법정책심의관의 '정당한' 업무 범위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어쩌면 몇몇 기자들이 농담조라도 법원행정처에 기사를 대신 써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2. 비상과 극단

기사 대필 사건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불편한 긴장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증인은 사실 이 사건 이전부터, 헌재 견제를 목적으로 한 지시를 받아왔습니다.

증인이 행정처에서 일한 지 다섯달 쯤 지난 2015년 7월. 이규진 양형실장은 '헌법재판소의 움직임에 대한 비상적이고 극단적인 대처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보고서를 만들어보라'는 취지로 지시합니다. 증인은 대법관 청문회 등 다른 업무로 바빴던데다 '뭐 이런 것까지 시키나'라고 생각해 일을 미뤘지만, 이규진 실장이 수차례 독촉해 9월 중하순 보고서를 쓰기 시작해 10월 초 보고했습니다.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I. 검토 배경
□ 현재 헌재는 유화적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조만간 공세적 자세를 취할 것으로 예상됨
- 제주대 교수 및 GS 칼텍스 관련 재판소원, 과거사 소멸시효 및 업무방해 관련 위헌소원, 관습법 규범통제 관련 위헌소원 등 민감현안 다수 계류 중
- 상고법원 국회 심사 등 중요 국면에서 법원에 대한 공세 강화할 것으로 보임.
- 헌재가 적극적 자세를 보이는 등 유사시를 대비하여 현 시점에서 헌재 상대로 취할 수 있는 비상적, 극단적 대처방안을 검토할 필요


이후 "헌재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는 방안" "헌재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방안" "헌재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 전략 검토" 등의 소제목이 이어집니다. 전쟁에라도 대비하는 듯한 비장한 인상을 줍니다. 증인은 이 보고서에 대해 "(이 실장이) 대법원장님을 뵙고 와서 저에게 지시한 것"이라며, "대법원장님께서 지시한 사항이다"라는 이 실장의 말도 기억도 난다고 증언했습니다.

- 검사: (…) 이규진 실장의 업무일지 내용과 그때 당시 기억 돌려보니 "대법원장 지시 사항"이라는 말이 기억이 나서, 이 '헌재 관련 비상적 대처방안 검토(대외비)' 문건이 피고인 양승태가 직접 지시한 것으로 당시에 알고 있었습니까?
- 증인: 제 기억으로는 지시하면서 대법원장님 얘기를 이규진 상임위원이 한 것으로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변호인 측은 이규진 실장이 독자적 판단으로 먼저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뒤 윗선에 사후 보고했을 가능성도 있고, 보고서 내용 역시 터무니없고 실제 실행된 것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 대응 방안에 ●교대역에 설치한 헌재 광고판을 참고하여, 안국역 등에 헌재의 결정 번복 사례·단심제의 폐해 등을 지적하는 광고판을 설치 ●헌법재판소장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활용 ●헌법재판관으로 만 40세 이상을 간신히 넘긴 법관을 지명 등 황당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3. 목격자

하지만 검찰 주장은 달랐습니다. 증인이 이규진 실장의 지시에 따라 '업무방해 관련, 즉시 시행가능 비상대처방안(대외비)'라는 보고서를 한달 뒤 추가로 보고했고, 특히 "법원에 계류 중인 소송사건의 적절한 활용"이라는 보고서 항목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통진당 국회의원 지위 확인 사건(서울행정법원 2015구합50320)' 등 특정 사건을 활용 대상으로 적어놨는데, 헌재 견제를 위해 재판 개입을 계획한 셈이고 실제 실행에 옮겨졌다는 주장입니다.

검찰은 문 판사를 통진당 행정소송 '재판 개입'의 목격자로 보고, 여러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 검사: 2015년 11월 12일 서울행정법원이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에 대해 소 각하 판결을 선고한 직후, 이규진 양형실장과 한승 사법정책실장에게 그 판결 결과를 보고했습니까?
- 증인: 네 그렇습니다.
(…)
- 증인: 제가 기억하고 있는 건, 이규진 실장이 절 다시 부르셨을 때 얼굴이 좀 상기돼 있는 상태였고, (박병대) 처장님께서 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말끝을 흐리면서 "내가 조한창 판사한테도 얘기를 했는데..." 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검사: 사건을 심리 중인 서울행정법원 재판부에, 조한창을 통해 (소를 각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법원행정처의 의견을 전달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까?
- 증인: 어떤 식으로든 의사를 전달했구나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 검사: 증인은 2016년 1월경 이규진 실장이 광주지법에서 통진당 지방의회 의원 행정소송을 담당하고 있던 박강회 판사에게 전화해 '청구 기각'을 요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 증인: 나중에 수사과정에서 검사로부터 전해들었습니다.
- 검사: 증인은 임종헌 차장으로부터 "통진당 지방의원 사건은 어떤 결론이 사법부에 제일 유리해요?"라는 질문을 받고 "논리적으로는 인용이 맞는 거 같다"라고 답변했고, 그러니까 임 차장이 증인에게 "기각이 사법부에는 제일 좋은 것이 아니예요?"라고 되물어서, 속으로 '이 양반은 기각을 원하시나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까?
- 증인: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016년 3월 전국 선거전담 재판장 회의에 참석한 모습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016년 3월 전국 선거전담 재판장 회의에 참석한 모습

증인은 심의관 부임 초기인 2015년 4월 행정처의 재판부 접촉을 더 가까이서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서울남부지법의 한 재판부가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결정을 하자, 이규진 실장이 증인에게 "위에서 다시 결정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했다" "재판장과도 통화를 마쳤다"라며 기존 결정을 '단순위헌' 취지로 바꾸도록 하고, 재결정 절차의 흔적이 전산에서 검색되지 않게 감추라고 지시한 일이 있었던 겁니다.

이에 대해 변호인들은 남부지법 재판부가 법률적 쟁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착오'로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결정을 했고, 재판장 역시 "그런 문제가 있는지 몰랐다" "고맙다"라고 하며 재결정에 동의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증인 역시 이런 지적에 수긍했지만, 그럼에도 일선 재판부가 이미 내린 결정에 행정처가 관여하는 건 꺼려졌다고 증언했습니다.

- 검사: 증인, 위헌제청결정의 직권취소는 법률적이나 윤리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이라 보고 있습니까?
- 증인: 네, 그렇습니다.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이 "증인이 경험한 사실이 아닌 의견을 묻고 있다"라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판장은 "의견을 질문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 그런 증인"이라며 기각했습니다.

- 증인: 제가 이해하고 있는 법률지식 내에서는...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검사: 그럼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증인: 어... 일선 재판에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성찰의 유효 시간

전 행정처 심의관들이 증인으로 나올 때, 검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지 못했느냐"는 겁니다. 문 판사는 지금까지 불려나온 판사 증인 중 가장 후회스럽다는 태도를 많이 보였습니다.

- 검사: (윗선에서 검토하라고 했어도) 증인이 봤을 때 부정하거나 부당한 방법이라 생각하면 거절할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 증인: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 검사: 증인은 (…) 이 지시를 받고 부적절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고 진술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소심 재판부 접촉 계획 등 향후 대책을 마련하라는 이규진 양형실장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 증인: (…) 이 문서를 가지고 보고를 하는 사람이 이규진 상임위원이기 때문에 뜻이 반영되는 것은 맞습니다. 다만 제가 관여한 문서이니까요, 거기에 그와 같은 부적절한 기재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후회스럽고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증인은 또 "업무상 어쩔 수 없이 작성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은 보여주기 싫은" 내용이 들어있는 보고서에는 '대외비' 표시를 했다며, 업무 당시에도 상당한 자괴감을 느꼈음을 시사했습니다.

증인은 다만 이미 위에서 결론을 정한 뒤 지시가 내려와 적극 항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특정 판결 이후의 파장을 예상하는 보고서를 쓰는 건 자신이 해야하는 업무라고 인식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행정처 분위기가 "KKSS(까라면 까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라)"는 식이어서 지시를 거부하면 "곧바로 행정처 일을 그만두고 나가야 할 상황"이었고, "일 자체가 너무 많아 심신이 많이 피폐해졌고, 자정 능력도 많이 약해졌다"라고 검찰 조사에서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도 15시간 가까이 증인석을 지켜야 했던 문성호 판사는 힘겨워 보였습니다. 어깨가 축 처진 채 고개를 숙이거나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대답하는가 하면, 중간중간 헛웃음도 지었습니다. 판사 증인들은 자신이 법정에서 기나긴 고문, 형벌 아닌 형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제로 주어지는 성찰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판사의 얼굴을 하고 심판자로서 법대에 앉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법정에서 만나는 시민 대부분은 그들을 "존경하는 판사님"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부르며 올려다 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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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⑯ 헌재소장 비판 기사 ‘대필’한 판사…복종의 한계는 어디?
    • 입력 2019-11-11 07:00:38
    • 수정2019-11-11 07:34:33
    취재K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열여섯 번째 순서로, 10월 16일과 11월 6일 두 차례에 걸쳐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문성호 서울중앙지법 판사(사법연수원 33기·前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의 증언을 살펴봅니다.

문 판사는 2015년 2월부터 2017년 2월까지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으로 일했습니다. 헌법과 헌법재판소 관련 업무를 주로 수행하면서,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실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처장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 최희준 부장판사[연관 기사] 헌법재판관이 ‘스파이’라 놀린 판사…“난 부조리극 주인공?”로부터 헌재 정보를 받아, 이규진 실장이 지시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또 상급자 지시로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낸 행정소송 상고심의 전원합의체 회부 여부를 검토한 보고서를 작성해 "부적절한 사법행정권 행사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징계(견책)를 받았습니다. 문 판사는 이 징계에 불복해 대법원을 상대로 소송을 낸 상태입니다.

#1. 복종의 의무와 한계

증인이 한 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이른바 '법률신문 기사 대필'입니다. 2016년 3월 박한철 당시 헌법재판소장이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한 발언―재판소원 도입 필요성, 대법원장의 헌법재판관 지명권에 반감 표명 등―을 비판하는 기사 초안(박한철 헌재소장, 거침없는 발언으로 법조계 '술렁')을 써서, 언론사인 법률신문에 보내준 겁니다.

나중에 법률신문 기자가 살을 덧붙이긴 했지만, 기사 제목도 거의 바뀌지 않았고 초안의 주요 내용이 모두 포함됐습니다. 심지어 증인이 허위로 지어낸 "서초동의 한 변호사"의 발언 내용까지 그대로 실렸습니다. '대필'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문성호 판사가 초안을 쓴 것으로 드러난 법률신문 기사 캡처
이 일은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시킨 것으로 드러났는데, 심지어 증인의 직속 상급자였던 심준보 사법정책실장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준보 실장은 지난 10월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기사 초안을 써준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임종헌 전 차장은 지난 3월 자신의 재판에서 "기자들은 기사 초안 형태의 보도자료에 호응도가 가장 높다"라며 기사 초안을 써준 게 무엇이 문제냐는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 검사: (임종헌 차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시하던가요?
- 증인: (…) "제가 아주 잘 아는 언론인이 편집인협회 토론회를 보고, 굉장히 불만을 토로하시면서 자기 매체에 싣겠다고 하신다. 문 판사님이 얼마 전에 쓴 보고서(헌재소장 발언 내용과 언론 대응 방향을 정리한 보고서) 있지요? 그거 가지고 기사 초안을 한번 작성해보세요"라고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증인은 이 지시가 내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설 작성에 참고하라며 법률신문에 참고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사법정책심의관이 해오던 일이었지만, 기사 초안까지 작성해주는 것은 "적절한지 의문"이었다는 겁니다. 문 판사가 거절의 뜻을 내비친 뒤 겪은 일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 검사: 그러니 임 차장이 뭐라고 다시 지시하셨습니까?
- 증인: 큰 소리로 말씀하셨고요, "일.단.써.오.세.요!"[또박또박 말함]라고 하셨습니다.

증인은 '강압적'인 지시 때문에 결국 알겠다고 답하고 차장 집무실에서 나왔다고 회고했습니다.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
검찰은 이 사건을 두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임 차장이 직권을 남용해 위법한 지시로 문 판사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공소장에 적었습니다. 변호인들은 즉각 탄핵에 나섰고, '복종 의무'라는 단어도 등장했습니다.

- 고영한 피고인 변호인: (…) 증인. 실장이나 처장, 차장의 사법정책을 보좌하는 사법정책심의관으로서 기사 초고 작성하는 것이 증인의 업무 범위 내에 해당하고, 그 지시가 명백히 위법하지 않는다면, 상급자인 임 차장 지시에 복종하는 의무를 부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인식하고 계셨죠?
- 증인: 복종 의무가 저에게 적용된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검사의 반박이 이어지자, 증인은 '복종의 한계'를 언급했습니다.

- 검사: 상급자 지시가 명백히 위법하지 않더라도, 법령과 공익에 위배되는 지시이면 상급자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 건가요?
- 증인: 뭐, 복종의 한계가 있다는 거는 저도 알고 있고요. 대법원 판례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걸 제가 여기서 얘기할 건 아니고... 당시에는 제가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 거절을 했던 겁니다.

증인은 "기사는 기자가 쓰는 것"이라고도 말했는데요. 변호인들의 주장처럼, 기사 초안 작성이 사법정책심의관의 '정당한' 업무 범위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어쩌면 몇몇 기자들이 농담조라도 법원행정처에 기사를 대신 써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2. 비상과 극단

기사 대필 사건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불편한 긴장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증인은 사실 이 사건 이전부터, 헌재 견제를 목적으로 한 지시를 받아왔습니다.

증인이 행정처에서 일한 지 다섯달 쯤 지난 2015년 7월. 이규진 양형실장은 '헌법재판소의 움직임에 대한 비상적이고 극단적인 대처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보고서를 만들어보라'는 취지로 지시합니다. 증인은 대법관 청문회 등 다른 업무로 바빴던데다 '뭐 이런 것까지 시키나'라고 생각해 일을 미뤘지만, 이규진 실장이 수차례 독촉해 9월 중하순 보고서를 쓰기 시작해 10월 초 보고했습니다.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I. 검토 배경
□ 현재 헌재는 유화적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조만간 공세적 자세를 취할 것으로 예상됨
- 제주대 교수 및 GS 칼텍스 관련 재판소원, 과거사 소멸시효 및 업무방해 관련 위헌소원, 관습법 규범통제 관련 위헌소원 등 민감현안 다수 계류 중
- 상고법원 국회 심사 등 중요 국면에서 법원에 대한 공세 강화할 것으로 보임.
- 헌재가 적극적 자세를 보이는 등 유사시를 대비하여 현 시점에서 헌재 상대로 취할 수 있는 비상적, 극단적 대처방안을 검토할 필요


이후 "헌재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는 방안" "헌재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방안" "헌재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 전략 검토" 등의 소제목이 이어집니다. 전쟁에라도 대비하는 듯한 비장한 인상을 줍니다. 증인은 이 보고서에 대해 "(이 실장이) 대법원장님을 뵙고 와서 저에게 지시한 것"이라며, "대법원장님께서 지시한 사항이다"라는 이 실장의 말도 기억도 난다고 증언했습니다.

- 검사: (…) 이규진 실장의 업무일지 내용과 그때 당시 기억 돌려보니 "대법원장 지시 사항"이라는 말이 기억이 나서, 이 '헌재 관련 비상적 대처방안 검토(대외비)' 문건이 피고인 양승태가 직접 지시한 것으로 당시에 알고 있었습니까?
- 증인: 제 기억으로는 지시하면서 대법원장님 얘기를 이규진 상임위원이 한 것으로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변호인 측은 이규진 실장이 독자적 판단으로 먼저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뒤 윗선에 사후 보고했을 가능성도 있고, 보고서 내용 역시 터무니없고 실제 실행된 것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 대응 방안에 ●교대역에 설치한 헌재 광고판을 참고하여, 안국역 등에 헌재의 결정 번복 사례·단심제의 폐해 등을 지적하는 광고판을 설치 ●헌법재판소장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활용 ●헌법재판관으로 만 40세 이상을 간신히 넘긴 법관을 지명 등 황당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3. 목격자

하지만 검찰 주장은 달랐습니다. 증인이 이규진 실장의 지시에 따라 '업무방해 관련, 즉시 시행가능 비상대처방안(대외비)'라는 보고서를 한달 뒤 추가로 보고했고, 특히 "법원에 계류 중인 소송사건의 적절한 활용"이라는 보고서 항목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통진당 국회의원 지위 확인 사건(서울행정법원 2015구합50320)' 등 특정 사건을 활용 대상으로 적어놨는데, 헌재 견제를 위해 재판 개입을 계획한 셈이고 실제 실행에 옮겨졌다는 주장입니다.

검찰은 문 판사를 통진당 행정소송 '재판 개입'의 목격자로 보고, 여러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 검사: 2015년 11월 12일 서울행정법원이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에 대해 소 각하 판결을 선고한 직후, 이규진 양형실장과 한승 사법정책실장에게 그 판결 결과를 보고했습니까?
- 증인: 네 그렇습니다.
(…)
- 증인: 제가 기억하고 있는 건, 이규진 실장이 절 다시 부르셨을 때 얼굴이 좀 상기돼 있는 상태였고, (박병대) 처장님께서 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말끝을 흐리면서 "내가 조한창 판사한테도 얘기를 했는데..." 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검사: 사건을 심리 중인 서울행정법원 재판부에, 조한창을 통해 (소를 각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법원행정처의 의견을 전달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까?
- 증인: 어떤 식으로든 의사를 전달했구나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 검사: 증인은 2016년 1월경 이규진 실장이 광주지법에서 통진당 지방의회 의원 행정소송을 담당하고 있던 박강회 판사에게 전화해 '청구 기각'을 요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 증인: 나중에 수사과정에서 검사로부터 전해들었습니다.
- 검사: 증인은 임종헌 차장으로부터 "통진당 지방의원 사건은 어떤 결론이 사법부에 제일 유리해요?"라는 질문을 받고 "논리적으로는 인용이 맞는 거 같다"라고 답변했고, 그러니까 임 차장이 증인에게 "기각이 사법부에는 제일 좋은 것이 아니예요?"라고 되물어서, 속으로 '이 양반은 기각을 원하시나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까?
- 증인: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016년 3월 전국 선거전담 재판장 회의에 참석한 모습
증인은 심의관 부임 초기인 2015년 4월 행정처의 재판부 접촉을 더 가까이서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서울남부지법의 한 재판부가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결정을 하자, 이규진 실장이 증인에게 "위에서 다시 결정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했다" "재판장과도 통화를 마쳤다"라며 기존 결정을 '단순위헌' 취지로 바꾸도록 하고, 재결정 절차의 흔적이 전산에서 검색되지 않게 감추라고 지시한 일이 있었던 겁니다.

이에 대해 변호인들은 남부지법 재판부가 법률적 쟁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착오'로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결정을 했고, 재판장 역시 "그런 문제가 있는지 몰랐다" "고맙다"라고 하며 재결정에 동의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증인 역시 이런 지적에 수긍했지만, 그럼에도 일선 재판부가 이미 내린 결정에 행정처가 관여하는 건 꺼려졌다고 증언했습니다.

- 검사: 증인, 위헌제청결정의 직권취소는 법률적이나 윤리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이라 보고 있습니까?
- 증인: 네, 그렇습니다.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이 "증인이 경험한 사실이 아닌 의견을 묻고 있다"라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판장은 "의견을 질문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 그런 증인"이라며 기각했습니다.

- 증인: 제가 이해하고 있는 법률지식 내에서는...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검사: 그럼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증인: 어... 일선 재판에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성찰의 유효 시간

전 행정처 심의관들이 증인으로 나올 때, 검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지 못했느냐"는 겁니다. 문 판사는 지금까지 불려나온 판사 증인 중 가장 후회스럽다는 태도를 많이 보였습니다.

- 검사: (윗선에서 검토하라고 했어도) 증인이 봤을 때 부정하거나 부당한 방법이라 생각하면 거절할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 증인: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 검사: 증인은 (…) 이 지시를 받고 부적절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고 진술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소심 재판부 접촉 계획 등 향후 대책을 마련하라는 이규진 양형실장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 증인: (…) 이 문서를 가지고 보고를 하는 사람이 이규진 상임위원이기 때문에 뜻이 반영되는 것은 맞습니다. 다만 제가 관여한 문서이니까요, 거기에 그와 같은 부적절한 기재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후회스럽고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증인은 또 "업무상 어쩔 수 없이 작성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은 보여주기 싫은" 내용이 들어있는 보고서에는 '대외비' 표시를 했다며, 업무 당시에도 상당한 자괴감을 느꼈음을 시사했습니다.

증인은 다만 이미 위에서 결론을 정한 뒤 지시가 내려와 적극 항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특정 판결 이후의 파장을 예상하는 보고서를 쓰는 건 자신이 해야하는 업무라고 인식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행정처 분위기가 "KKSS(까라면 까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라)"는 식이어서 지시를 거부하면 "곧바로 행정처 일을 그만두고 나가야 할 상황"이었고, "일 자체가 너무 많아 심신이 많이 피폐해졌고, 자정 능력도 많이 약해졌다"라고 검찰 조사에서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도 15시간 가까이 증인석을 지켜야 했던 문성호 판사는 힘겨워 보였습니다. 어깨가 축 처진 채 고개를 숙이거나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대답하는가 하면, 중간중간 헛웃음도 지었습니다. 판사 증인들은 자신이 법정에서 기나긴 고문, 형벌 아닌 형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제로 주어지는 성찰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판사의 얼굴을 하고 심판자로서 법대에 앉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법정에서 만나는 시민 대부분은 그들을 "존경하는 판사님"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부르며 올려다 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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