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두 개의 양심]⑬ ‘독대의 추억’ 생생 증언…대법관 비밀 목격한 판사

입력 2019.09.30 (12:00) 수정 2019.09.3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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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열세 번째 순서로, 9월 27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이 모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0기·前 대법원 재판연구관)의 증언을 살펴봅니다. 이 부장판사는 2014년 2월부터 2년 동안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일했습니다. 이때는 '사법농단' 의혹에 등장하는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재항고 사건 등이 대법원에서 심리되던 시기. 재판연구관이었던 이 부장판사도 대법관들의 지시를 받아 이 사건들을 검토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증인이 경험한 이례적인 상황과 소회에 대한 증언이 6시간 넘게 이어졌습니다.


#1. 어쩌다 알게 된 비밀

2015년 8월.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일하던 증인은 어느 강제징용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위로금을 달라고 낸 소송(2011두24675)에 대한 의견서, 즉 판결문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이 문건은 그의 상급자인 총괄, 선임재판연구관의 검토를 거쳐 사건의 주심을 맡은 이인복 당시 대법관에게 보고됐습니다.

증인은 당시 판결문 초안에,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인용했습니다.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시한 당시 대법원 판결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판결서를 보고한 다음날, 위에서 날벼락 같은 지시가 내려옵니다.

- 검사: 증인은 당시 수석재판연구관이었던 홍승면 또는 선임재판연구관이었던 유해용 두 분 중 한 분으로부터, 증인이 작성한 의견서(판결문 초고)를 보고한 다음날인 2015년 8월 26일에 "이 의견서에 인용한 2012년 미쓰비시 사건 판결은 재상고 사건이 재검토 중에 있기 때문에, 파기 환송될 가능성도 있으니 인용을 하면 안 된다"라는 취지의 말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까?
- 증인: 네, 그렇습니다.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대해 "파기환송까지 염두에 둔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지고 있다. 2012년 사실상 확정된 판결이라고 생각해 인용했던 대법 판결이, 재상고심에서 다시 뒤집힐 수도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강제징용 사건을 둘러싼 대법원의 '비밀스런' 동향을 증인이 처음 접한 순간이었습니다. 증인은 당시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 증인: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고 그 판결의 기속력에 따라 원심에서 같은 취지로 판결한 사건이 재상고됐을 때, 종전 판결과 다르게 대법원이 판결하게 되면... 종전 대법원판결의 권위와 위신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그건 대법원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쉽게 말하면 '난리가 난다'는 표현을 할 수 있을 정도로[웃음] 총괄 회의에서 얘기가 됐을 거고, 담당하는 공동조에서 심도 있게 논의됐을 거고, 다른 연구관 사이에도 회자되는 게 당연할 텐데, 문제는 아무도 모르고 있어서 전 그렇게 (놀랍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장판사에 앞서 9월 25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홍승면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도 비슷한 취지의 증언을 했습니다. 이미 내려진 대법 판결을 대법원이 다시 뒤집는다는 것은 차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겁니다.

- 검사: 이처럼 증인은 2013년 12월경 당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이 전원합의체에 회부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황진구 민사총괄재판연구관에게 "골치 아픈 사건이다. 걱정이다"라고 말한 것입니까?
- 홍승면 증인: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개인청구권이 국가에 의해 소멸되는지 여부가 중요 쟁점이 될 텐데, 그 부분은 이미 소멸시킬 수 없다는 소부 판결이 (2012년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만약 2012년 대법 판결을 파기한다면) 기속력 있는 판결에 대해 다른 대법관들이 종전 대법 판결을 바로 뒤집는 게 되는데, 소송법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전례가 전혀 없는 일입니다. 법원은 법적 안정성을 위해 선배들의 종전 판단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 와서, 전원합의체로 소부 판결을 파기하는 것은 절차법적으로 작지 않은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홍승면 전 수석재판연구관의 증언에 따르면, 대법원은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이 접수된 2013년부터 이미 2012년 판결의 파기를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증인인 이 부장판사는 2년 뒤에야 우연히 이 비밀을 알게 된 것이었죠.

#2. 독대의 추억

충격적인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이 보고한 사건의 주심인 이인복 대법관을 서둘러 찾아간 증인. 2012년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이 있으니, 이를 다른 사건 판결문에 아직 인용해선 안 된다고 보고했습니다. 당시 증인의 보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증인신문 때 법정 스크린에 띄워진 것을 기자가 재구성한 내용증인신문 때 법정 스크린에 띄워진 것을 기자가 재구성한 내용

하지만 정작 이 보고를 받은 이인복 대법관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결론이 재검토되고 있다는, 2012년 판결의 재판장을 맡았던 인물인데도 말이죠.

- 검사: 증인의 보고를 받은 이인복 대법관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 증인: 다급하게 보고를 드렸는데, 대법관님께선 크게 놀라진 않으셨고 제가 짐작하기로는 이미 알고 계신 내용이신 거 같았고, 왔으니까 차 한잔하시자고 하시면서 미쓰비시 사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재판장으로 참여해서 날인하기까지 한 사건이지만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한일관계에 파장이 클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파기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50년 이상 지난 사건에 대해 다시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소멸시효 제도를 무력하게 하는 거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판사도 저 사건을 보면서 그 보고서 검토해봤을 테니까 그 판결의 타당성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를 해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법관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선고한 판결에 대해 불과 3년 뒤 이렇게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자신이 내놓은 판결이 공개적으로 부정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대법관으로서 납득이 될까. 아무리 민감하고 중요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이미 내려진 대법원판결을 이렇게까지 재검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재검토 과정을 왜 대법원 내부에서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쳤을까. 당시 증인의 머릿속은 수많은 물음표로 채워졌을 겁니다.

의문을 더 증폭시키는 대목은 또 있습니다. 이인복 전 대법관이 지난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한 말이 이날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 일부 공개된 건데요. 이 전 대법관은 당시 "이인복 대법관님도 기존에 2012년 강제징용 사건 판결의 파기 가능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이 모 부장판사의 검찰 진술 내용을 검사에게 듣자마자,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연구관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철없는 소리입니다."
●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한일관계에 문제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2012년에 파기 환송할 때 했던 생각이지, 그렇게 판결한 이후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 "파기환송 가능성을 제가 염두에 두고 얘기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측이죠. 연구관이 그렇게 얘기했다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이인복 피의자신문조서 중 검찰 인용 부분

이인복 전 대법관이 2016년 9월 대법원에서 퇴임사를 전하고 있다이인복 전 대법관이 2016년 9월 대법원에서 퇴임사를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증인은 "대법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서 유감인데 착오하실 수 없는 부분"이라면서, 그 근거로 지난해 가을 사법연수원에서 이인복 전 대법관과 나눈 대화를 들었습니다. 당시 연수원 석좌교수이던 이인복 전 대법관이 '(2015년 독대 자리에서) 소멸시효 제도 무력화, 그 부분은 내가 분명히 말했던 거 같다'라고 인정했다는 겁니다.

증인의 말이 맞다면 이인복 대법관은 검찰 조사에서 거짓말을 한 셈이 됩니다. 2012년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파기될 가능성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일 텐데요. 왜 그랬는지, 진실은 무엇일지, 그의 마음이 궁금해집니다.


#3. 재판의 오염

증인은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하던 2015년, 고영한 당시 대법관의 지시를 받아 당시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해직 교사를 조합원으로 둔 전교조에 대해, 고용노동부가 노조 자격이 없다며 법외노조 통보처분을 하자 전교조가 이에 반발해 이 처분의 효력을 정지시켜달라고 법원에 신청한 사건입니다. 2014년 9월 서울고등법원은 이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였고, 이 결정에 노동부가 반발해 재항고하면서 사건이 대법원으로 오게 된 상황이었죠.

당시 법원행정처는 이런 법원의 효력정지 인용 결정에 청와대의 큰 불만이 감지된다면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대법원에 이득이 될지를 따진 대외비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수많은 '재판 개입' 의혹 문건 중 하나인데요. 검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행정처 심의관에게 이런 문건 작성을 지시함으로써 직권을 남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2014년 12월 법원행정처에서 작성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문건의 일부2014년 12월 법원행정처에서 작성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문건의 일부

변호인들은 이런 행정처의 문건이 실제 대법원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냐며, 재판연구관이었던 증인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 박병대 피고인 변호인: 위 행정처 보고서의 내용과 같이 전교조 재항고 사건을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이나 교원노조법 위헌심판 사건보다 먼저 처리해야 한다거나, 그 결론도 파기돼야 사법부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가 적다는 등의 정무적 검토 결과가 전해진다 하더라도, 재판연구관실 검토 내용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증인의 대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 증인: 재판연구관실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진 못하겠지만, 그런 판단이 대법관님께 보고된다면 대법원의 판단에는 영향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증인: 상식적 문제인데, 만약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하는 문건이라면 그런 문건을 왜 만들까라는 상식적 의문을 제기한 겁니다.

증인은 나아가 이런 문건이 대법원의 재판을 오염시킬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 증인: 행정처와 재판연구관실은 동급의 기관이라고 생각되지 않거든요. 행정처 심의관이 어떤 정무적 판단을 기재한 의견서를 줬을 때는 당연히 처·차장님이나 대법관님 의중이 실린 어떤 방향성을 의식하기 마련이고, 그건 재판연구관의 보고서 작성에 굉장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검토 보고서가 정무적 판단으로 오염되기 마련이죠. 그런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단순한 참고자료로 사용될 가능성이 적고, 정무적 판단이 대법원 재판을 오염시키는 통로로 기능하기 쉽다는 거죠.

'재판 개입' 의혹 문건이 얼마든지 실제 재판에 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는 판사 증인의 증언은 확고했습니다. "법리 문제는 행정처보다 재판연구관실이 더 잘 안다" "재판연구관실이 행정처 문건 같은 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홍승면, 김현석 등 전 수석재판연구관들의 기존 증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증언은 변호인들 말처럼 단지 개인의 의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선 재판연구관의 생각이 법정에서 처음 전달됨으로써, 사건을 보는 관점이 보다 다양해진 건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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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⑬ ‘독대의 추억’ 생생 증언…대법관 비밀 목격한 판사
    • 입력 2019-09-30 12:00:43
    • 수정2019-09-30 12:03:48
    취재K
●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

● 선서서에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기재하여야 한다. (형사소송법 157조 2항)

양심에 따라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들. 최근 또 다른 이유로 양심을 갖춰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양심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 최대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입니다. 법대에서 이젠 증언대로 내려와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판사들. 이 이례적인 법정에서 나온 '양심적 증언'과, 대화의 요모조모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열세 번째 순서로, 9월 27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이 모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0기·前 대법원 재판연구관)의 증언을 살펴봅니다. 이 부장판사는 2014년 2월부터 2년 동안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일했습니다. 이때는 '사법농단' 의혹에 등장하는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재항고 사건 등이 대법원에서 심리되던 시기. 재판연구관이었던 이 부장판사도 대법관들의 지시를 받아 이 사건들을 검토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증인이 경험한 이례적인 상황과 소회에 대한 증언이 6시간 넘게 이어졌습니다.


#1. 어쩌다 알게 된 비밀

2015년 8월.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일하던 증인은 어느 강제징용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위로금을 달라고 낸 소송(2011두24675)에 대한 의견서, 즉 판결문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이 문건은 그의 상급자인 총괄, 선임재판연구관의 검토를 거쳐 사건의 주심을 맡은 이인복 당시 대법관에게 보고됐습니다.

증인은 당시 판결문 초안에,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인용했습니다.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시한 당시 대법원 판결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판결서를 보고한 다음날, 위에서 날벼락 같은 지시가 내려옵니다.

- 검사: 증인은 당시 수석재판연구관이었던 홍승면 또는 선임재판연구관이었던 유해용 두 분 중 한 분으로부터, 증인이 작성한 의견서(판결문 초고)를 보고한 다음날인 2015년 8월 26일에 "이 의견서에 인용한 2012년 미쓰비시 사건 판결은 재상고 사건이 재검토 중에 있기 때문에, 파기 환송될 가능성도 있으니 인용을 하면 안 된다"라는 취지의 말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까?
- 증인: 네, 그렇습니다.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대해 "파기환송까지 염두에 둔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지고 있다. 2012년 사실상 확정된 판결이라고 생각해 인용했던 대법 판결이, 재상고심에서 다시 뒤집힐 수도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강제징용 사건을 둘러싼 대법원의 '비밀스런' 동향을 증인이 처음 접한 순간이었습니다. 증인은 당시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 증인: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고 그 판결의 기속력에 따라 원심에서 같은 취지로 판결한 사건이 재상고됐을 때, 종전 판결과 다르게 대법원이 판결하게 되면... 종전 대법원판결의 권위와 위신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그건 대법원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쉽게 말하면 '난리가 난다'는 표현을 할 수 있을 정도로[웃음] 총괄 회의에서 얘기가 됐을 거고, 담당하는 공동조에서 심도 있게 논의됐을 거고, 다른 연구관 사이에도 회자되는 게 당연할 텐데, 문제는 아무도 모르고 있어서 전 그렇게 (놀랍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장판사에 앞서 9월 25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홍승면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도 비슷한 취지의 증언을 했습니다. 이미 내려진 대법 판결을 대법원이 다시 뒤집는다는 것은 차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겁니다.

- 검사: 이처럼 증인은 2013년 12월경 당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이 전원합의체에 회부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황진구 민사총괄재판연구관에게 "골치 아픈 사건이다. 걱정이다"라고 말한 것입니까?
- 홍승면 증인: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개인청구권이 국가에 의해 소멸되는지 여부가 중요 쟁점이 될 텐데, 그 부분은 이미 소멸시킬 수 없다는 소부 판결이 (2012년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만약 2012년 대법 판결을 파기한다면) 기속력 있는 판결에 대해 다른 대법관들이 종전 대법 판결을 바로 뒤집는 게 되는데, 소송법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전례가 전혀 없는 일입니다. 법원은 법적 안정성을 위해 선배들의 종전 판단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 와서, 전원합의체로 소부 판결을 파기하는 것은 절차법적으로 작지 않은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홍승면 전 수석재판연구관의 증언에 따르면, 대법원은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이 접수된 2013년부터 이미 2012년 판결의 파기를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증인인 이 부장판사는 2년 뒤에야 우연히 이 비밀을 알게 된 것이었죠.

#2. 독대의 추억

충격적인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이 보고한 사건의 주심인 이인복 대법관을 서둘러 찾아간 증인. 2012년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이 있으니, 이를 다른 사건 판결문에 아직 인용해선 안 된다고 보고했습니다. 당시 증인의 보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증인신문 때 법정 스크린에 띄워진 것을 기자가 재구성한 내용
하지만 정작 이 보고를 받은 이인복 대법관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결론이 재검토되고 있다는, 2012년 판결의 재판장을 맡았던 인물인데도 말이죠.

- 검사: 증인의 보고를 받은 이인복 대법관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 증인: 다급하게 보고를 드렸는데, 대법관님께선 크게 놀라진 않으셨고 제가 짐작하기로는 이미 알고 계신 내용이신 거 같았고, 왔으니까 차 한잔하시자고 하시면서 미쓰비시 사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재판장으로 참여해서 날인하기까지 한 사건이지만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한일관계에 파장이 클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파기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50년 이상 지난 사건에 대해 다시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소멸시효 제도를 무력하게 하는 거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판사도 저 사건을 보면서 그 보고서 검토해봤을 테니까 그 판결의 타당성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를 해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법관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선고한 판결에 대해 불과 3년 뒤 이렇게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자신이 내놓은 판결이 공개적으로 부정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대법관으로서 납득이 될까. 아무리 민감하고 중요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이미 내려진 대법원판결을 이렇게까지 재검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재검토 과정을 왜 대법원 내부에서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쳤을까. 당시 증인의 머릿속은 수많은 물음표로 채워졌을 겁니다.

의문을 더 증폭시키는 대목은 또 있습니다. 이인복 전 대법관이 지난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한 말이 이날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 일부 공개된 건데요. 이 전 대법관은 당시 "이인복 대법관님도 기존에 2012년 강제징용 사건 판결의 파기 가능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이 모 부장판사의 검찰 진술 내용을 검사에게 듣자마자,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연구관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철없는 소리입니다."
●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한일관계에 문제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2012년에 파기 환송할 때 했던 생각이지, 그렇게 판결한 이후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 "파기환송 가능성을 제가 염두에 두고 얘기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측이죠. 연구관이 그렇게 얘기했다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이인복 피의자신문조서 중 검찰 인용 부분

이인복 전 대법관이 2016년 9월 대법원에서 퇴임사를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증인은 "대법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서 유감인데 착오하실 수 없는 부분"이라면서, 그 근거로 지난해 가을 사법연수원에서 이인복 전 대법관과 나눈 대화를 들었습니다. 당시 연수원 석좌교수이던 이인복 전 대법관이 '(2015년 독대 자리에서) 소멸시효 제도 무력화, 그 부분은 내가 분명히 말했던 거 같다'라고 인정했다는 겁니다.

증인의 말이 맞다면 이인복 대법관은 검찰 조사에서 거짓말을 한 셈이 됩니다. 2012년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파기될 가능성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일 텐데요. 왜 그랬는지, 진실은 무엇일지, 그의 마음이 궁금해집니다.


#3. 재판의 오염

증인은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하던 2015년, 고영한 당시 대법관의 지시를 받아 당시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해직 교사를 조합원으로 둔 전교조에 대해, 고용노동부가 노조 자격이 없다며 법외노조 통보처분을 하자 전교조가 이에 반발해 이 처분의 효력을 정지시켜달라고 법원에 신청한 사건입니다. 2014년 9월 서울고등법원은 이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였고, 이 결정에 노동부가 반발해 재항고하면서 사건이 대법원으로 오게 된 상황이었죠.

당시 법원행정처는 이런 법원의 효력정지 인용 결정에 청와대의 큰 불만이 감지된다면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대법원에 이득이 될지를 따진 대외비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수많은 '재판 개입' 의혹 문건 중 하나인데요. 검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행정처 심의관에게 이런 문건 작성을 지시함으로써 직권을 남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2014년 12월 법원행정처에서 작성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문건의 일부
변호인들은 이런 행정처의 문건이 실제 대법원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냐며, 재판연구관이었던 증인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 박병대 피고인 변호인: 위 행정처 보고서의 내용과 같이 전교조 재항고 사건을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이나 교원노조법 위헌심판 사건보다 먼저 처리해야 한다거나, 그 결론도 파기돼야 사법부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가 적다는 등의 정무적 검토 결과가 전해진다 하더라도, 재판연구관실 검토 내용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증인의 대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 증인: 재판연구관실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진 못하겠지만, 그런 판단이 대법관님께 보고된다면 대법원의 판단에는 영향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증인: 상식적 문제인데, 만약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하는 문건이라면 그런 문건을 왜 만들까라는 상식적 의문을 제기한 겁니다.

증인은 나아가 이런 문건이 대법원의 재판을 오염시킬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 증인: 행정처와 재판연구관실은 동급의 기관이라고 생각되지 않거든요. 행정처 심의관이 어떤 정무적 판단을 기재한 의견서를 줬을 때는 당연히 처·차장님이나 대법관님 의중이 실린 어떤 방향성을 의식하기 마련이고, 그건 재판연구관의 보고서 작성에 굉장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검토 보고서가 정무적 판단으로 오염되기 마련이죠. 그런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단순한 참고자료로 사용될 가능성이 적고, 정무적 판단이 대법원 재판을 오염시키는 통로로 기능하기 쉽다는 거죠.

'재판 개입' 의혹 문건이 얼마든지 실제 재판에 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는 판사 증인의 증언은 확고했습니다. "법리 문제는 행정처보다 재판연구관실이 더 잘 안다" "재판연구관실이 행정처 문건 같은 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홍승면, 김현석 등 전 수석재판연구관들의 기존 증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증언은 변호인들 말처럼 단지 개인의 의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선 재판연구관의 생각이 법정에서 처음 전달됨으로써, 사건을 보는 관점이 보다 다양해진 건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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