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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은어와 함께 여행하는 방법 - 윤대녕 ‘은어낚시통신’
입력 2021.06.20 (21:30) 수정 2021.06.20 (21:30) 취재K
남진우 문화평론가

남진우 문화평론가

1990년대가 중반 지점에 다다르고 있을 즈음 윤대녕이란 신예작가의 첫 창작집 <은어낚시통신>이 출간되었다. 새로운 개성의 출현에 목말라 하고 있었던 당시 문학계에 이 작품집은 즉각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 책이 한창 화제 몰이를 하고 있을 때 젊은 글쟁이들 사이에 통용되던 실없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에 가면 이 책이 문학 코너가 아니라 낚시 관련 서적이 비치된 레저코너에 꽂혀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농담에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제 그 책을 찾으려면 컴퓨터 정보 분야 섹션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다수 재담이 그렇듯이 이 농담 역시 어느 정도 당시의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윤대녕의 소설은 제목 자체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은어낚시로 대변되는 시원적이고 낭만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통신이라는 정보화 사회로 막 진입해 들어가는 새로운 사회적 징후에 대한 예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본격적인 메트로폴리스의 대두와 더불어 새로운 도시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도시적 삶이 주는 피로와 상실에 대한 정서적 도피처로서, 자본주의와 산업사회로 대변되는 현재적 질서와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젊은이들의 노마드적 여정을 추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문단에서 윤대녕의 등장은 1960년대 김승옥이나 1970년대 최인호의 등장이 그러했듯이 일종의 '감수성의 혁명'을 예고하는 신호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감수성의 혁명이란 그 직전 연대인 1980년대 소설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문학적 경향, 그러니까 계급문제나 민족문제 같은 정치사회적 주제의 형상화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던 이념 지향적 문학이 1990년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블록의 패퇴 이후 더 이상의 현실 적합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와해되어가던 저간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민중과 민족을 표나게 앞세우던 이런 문학적 경향은 1990년대 초반 후일담 소설이란 유형의 몇몇 감상적인 작품들을 끝으로 서서히 언론과 대중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처럼 윤대녕은 그보다 조금 늦게 데뷔했으며 다음 세대의 선두주자로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더 친화적이었던 김영하나 박민규의 소설과 비교해볼 때 훨씬 온건하고 정통적인 스타일의 작법을 고수하고 있는 작가이긴 하지만 사회현실의 반영이나 비판에 방점을 찍는 리얼리즘 소설과 분명히 구분되는 단층선을 세기말의 한국 문학사에 뚜렷이 그은 작가인 것이다.

이 작가의 개성은 첫 창작집에 실린 대다수 단편소설을 관류하고 있는 신화적 상상력에서 우선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 <무녀도>, <황토기>의 김동리나 1960년대 박상륭의 <열명길>, <남도> 연작 이후 그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신화적 상상력이 현대의 대도시를 무대로 한 이 작가의 소설에서 새로운 이미지와 서사의 의상을 걸치고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첫 창작집에 실린 <불귀>, <국화 옆에서>,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등의 작품은 그 이후 발표된 일련의 소설들 <남쪽 계단을 보라>, <상춘곡>, <<천지간> 등의 중단편소설들, 그리고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같은 장편소설과 함께 우리 문학에서 흔치 않은 신화적 상상력의 한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 당시 폭넓게 수용된 종교학자 엘리아데나 철학자 바슐라르, 분석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 등의 이론에다가 불교의 연기설과 윤회와 업장의 소멸에 대한 통찰이 녹아 있는 그의 소설은 어쩌면 상투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도시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 하잘 것 없는 상열지사(相悅之事)를 매우 아름답고 세련된 시의 수준으로 승화시켜 놓고 있다.


윤대녕의 초기소설의 이런 신화적 상상력이 응축된 이미지가 바로 표제작 <은어낚시통신>에 나오는 회귀성 물고기 은어이다. 산란하기 위해 바다에서 자신의 출생지인 강물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야말로 존재의 시원을 향한 둥근 순환적 회귀의 여정을 보여주는 신화적 상상력의 객관적 상관물인 것이다. 소설 서두에 제사처럼 제시된 문단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생물학적 출생과 아버지의 은어낚시가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가 자라서 아버지를 따라 은어낚시를 떠나는 것은 자신이 탄생하던 순간의 비의(秘意)를 추체험하는 것이자 모든 생물이 사계절의 자연질서 속에서 연연히 지속해나가는 우주적 제의에 참여하는 것이다. 작가는 현대인이 상실한 줄도 모르고 잃어버린 이런 우주적 감각의 회복이야말로 1990년대 세기말의 인간들에게 더없이 유효한 심리적 처방전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삼십 대를 앞두고 있는 주인공은 어느 날 미지의 인물로부터 은어낚시를 명목으로 한 모임의 초대를 알리는 편지를 받는다. 추리를 한 끝에 그는 발신인이 옛날 사귀었다 헤어진 연인이라는 판단이 들어 그 초대에 응한다. 약속한 날 일련의 과정을 거쳐 비밀스러운 회합이 열리고 있는 음습한 지하 클럽에서 옛 연인과 해후한 그는 예전의 이별의 과정에서 그가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고 그녀와 더 멀리 거슬러 오르기로, 즉 은어처럼 존재의 시원을 향해 회향하기로 결심한다.

그렇다면 이 기묘한 입사식, 방황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이십 대를 졸업하고 삼십 대라는 한 사람의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을 앞둔 주인공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행하는 이 통과의례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와서 보면 신촌과 홍대 사이의 어디쯤에 위치한 것으로 설정된 지하 클럽과 거기 모인 군상들의 행태에는 다분히 철 지난 십구세기적 댄디의 심미주의 쾌락주의나 1960년대 히피들의 퇴폐와 방종의 흔적이 어른거리고 있다. 알콜은 물론이고 은근히 마리화나 또는 프리섹스를 나타내는 문장들로 묘사된 이 소규모 공동체, 언더그라운드 모임이 과연 당대 풍속의 반영을 넘어서서 어떤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 작품은 그것에 대한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않은 채 다만 주인공이 그 모임의 일원이 되기로 했다는 전언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은, 그런 의미에서, 한 존재가 어떻게 책임감 있는 주체로 설 수 있느냐, 어떻게 독립적이면서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는 문제적 작품이다. 민중이나 민족 같은 거대주체 속에 자아를 귀속시켜 거기서 안정감을 얻는 지난 연대의 이념적 방식은 그 시효를 다했다. 그러나 그것의 대안으로 소설 속에 제시된 상처받은 이들, 소외된 이들, 저마다 간직한 트라우마 때문에 고뇌하는 이들의 자기탐닉적 공동체 역시 그 현실적 효력이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이들의 위반적 제스쳐 역시 혼돈스러웠던 시대적 분위기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긴 하지만 안온한 카페문화 살롱문화의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닐까.

아마도 작가는 여기서 눈을 돌려 저 하늘을 나는 철새를 보라, 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떼 연어떼를 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기능적 효율성과 환금 가능성을 넘어 삶의 기반을 지시해주는 새로운 신화체계가 필요하다고, 그것만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사랑이 가능한 공동체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리 속에서의 추방이 곧 죽음을 의미했던 원시시대로부터 현대인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불의 연대인 1980년대와 새로운 21세기의 개막 사이에 끼인 1990년대가 그렇듯이, 윤대녕의 이 작품은 기존 집단에서 분리돼 나왔지만, 아직 새로운 준거집단을 찾지 못한 존재의 과도기적 모험을 그린 소설로 음미될 필요가 있다.

남진우 문학평론가·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 [비평] 은어와 함께 여행하는 방법 - 윤대녕 ‘은어낚시통신’
    • 입력 2021-06-20 21:30:16
    • 수정2021-06-20 21:30:47
    취재K

남진우 문화평론가

1990년대가 중반 지점에 다다르고 있을 즈음 윤대녕이란 신예작가의 첫 창작집 <은어낚시통신>이 출간되었다. 새로운 개성의 출현에 목말라 하고 있었던 당시 문학계에 이 작품집은 즉각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 책이 한창 화제 몰이를 하고 있을 때 젊은 글쟁이들 사이에 통용되던 실없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에 가면 이 책이 문학 코너가 아니라 낚시 관련 서적이 비치된 레저코너에 꽂혀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농담에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제 그 책을 찾으려면 컴퓨터 정보 분야 섹션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다수 재담이 그렇듯이 이 농담 역시 어느 정도 당시의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윤대녕의 소설은 제목 자체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은어낚시로 대변되는 시원적이고 낭만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통신이라는 정보화 사회로 막 진입해 들어가는 새로운 사회적 징후에 대한 예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본격적인 메트로폴리스의 대두와 더불어 새로운 도시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도시적 삶이 주는 피로와 상실에 대한 정서적 도피처로서, 자본주의와 산업사회로 대변되는 현재적 질서와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젊은이들의 노마드적 여정을 추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문단에서 윤대녕의 등장은 1960년대 김승옥이나 1970년대 최인호의 등장이 그러했듯이 일종의 '감수성의 혁명'을 예고하는 신호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감수성의 혁명이란 그 직전 연대인 1980년대 소설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문학적 경향, 그러니까 계급문제나 민족문제 같은 정치사회적 주제의 형상화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던 이념 지향적 문학이 1990년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블록의 패퇴 이후 더 이상의 현실 적합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와해되어가던 저간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민중과 민족을 표나게 앞세우던 이런 문학적 경향은 1990년대 초반 후일담 소설이란 유형의 몇몇 감상적인 작품들을 끝으로 서서히 언론과 대중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처럼 윤대녕은 그보다 조금 늦게 데뷔했으며 다음 세대의 선두주자로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더 친화적이었던 김영하나 박민규의 소설과 비교해볼 때 훨씬 온건하고 정통적인 스타일의 작법을 고수하고 있는 작가이긴 하지만 사회현실의 반영이나 비판에 방점을 찍는 리얼리즘 소설과 분명히 구분되는 단층선을 세기말의 한국 문학사에 뚜렷이 그은 작가인 것이다.

이 작가의 개성은 첫 창작집에 실린 대다수 단편소설을 관류하고 있는 신화적 상상력에서 우선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 <무녀도>, <황토기>의 김동리나 1960년대 박상륭의 <열명길>, <남도> 연작 이후 그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신화적 상상력이 현대의 대도시를 무대로 한 이 작가의 소설에서 새로운 이미지와 서사의 의상을 걸치고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첫 창작집에 실린 <불귀>, <국화 옆에서>,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등의 작품은 그 이후 발표된 일련의 소설들 <남쪽 계단을 보라>, <상춘곡>, <<천지간> 등의 중단편소설들, 그리고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같은 장편소설과 함께 우리 문학에서 흔치 않은 신화적 상상력의 한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 당시 폭넓게 수용된 종교학자 엘리아데나 철학자 바슐라르, 분석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 등의 이론에다가 불교의 연기설과 윤회와 업장의 소멸에 대한 통찰이 녹아 있는 그의 소설은 어쩌면 상투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도시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 하잘 것 없는 상열지사(相悅之事)를 매우 아름답고 세련된 시의 수준으로 승화시켜 놓고 있다.


윤대녕의 초기소설의 이런 신화적 상상력이 응축된 이미지가 바로 표제작 <은어낚시통신>에 나오는 회귀성 물고기 은어이다. 산란하기 위해 바다에서 자신의 출생지인 강물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야말로 존재의 시원을 향한 둥근 순환적 회귀의 여정을 보여주는 신화적 상상력의 객관적 상관물인 것이다. 소설 서두에 제사처럼 제시된 문단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생물학적 출생과 아버지의 은어낚시가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가 자라서 아버지를 따라 은어낚시를 떠나는 것은 자신이 탄생하던 순간의 비의(秘意)를 추체험하는 것이자 모든 생물이 사계절의 자연질서 속에서 연연히 지속해나가는 우주적 제의에 참여하는 것이다. 작가는 현대인이 상실한 줄도 모르고 잃어버린 이런 우주적 감각의 회복이야말로 1990년대 세기말의 인간들에게 더없이 유효한 심리적 처방전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삼십 대를 앞두고 있는 주인공은 어느 날 미지의 인물로부터 은어낚시를 명목으로 한 모임의 초대를 알리는 편지를 받는다. 추리를 한 끝에 그는 발신인이 옛날 사귀었다 헤어진 연인이라는 판단이 들어 그 초대에 응한다. 약속한 날 일련의 과정을 거쳐 비밀스러운 회합이 열리고 있는 음습한 지하 클럽에서 옛 연인과 해후한 그는 예전의 이별의 과정에서 그가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고 그녀와 더 멀리 거슬러 오르기로, 즉 은어처럼 존재의 시원을 향해 회향하기로 결심한다.

그렇다면 이 기묘한 입사식, 방황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이십 대를 졸업하고 삼십 대라는 한 사람의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을 앞둔 주인공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행하는 이 통과의례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와서 보면 신촌과 홍대 사이의 어디쯤에 위치한 것으로 설정된 지하 클럽과 거기 모인 군상들의 행태에는 다분히 철 지난 십구세기적 댄디의 심미주의 쾌락주의나 1960년대 히피들의 퇴폐와 방종의 흔적이 어른거리고 있다. 알콜은 물론이고 은근히 마리화나 또는 프리섹스를 나타내는 문장들로 묘사된 이 소규모 공동체, 언더그라운드 모임이 과연 당대 풍속의 반영을 넘어서서 어떤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 작품은 그것에 대한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않은 채 다만 주인공이 그 모임의 일원이 되기로 했다는 전언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은, 그런 의미에서, 한 존재가 어떻게 책임감 있는 주체로 설 수 있느냐, 어떻게 독립적이면서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는 문제적 작품이다. 민중이나 민족 같은 거대주체 속에 자아를 귀속시켜 거기서 안정감을 얻는 지난 연대의 이념적 방식은 그 시효를 다했다. 그러나 그것의 대안으로 소설 속에 제시된 상처받은 이들, 소외된 이들, 저마다 간직한 트라우마 때문에 고뇌하는 이들의 자기탐닉적 공동체 역시 그 현실적 효력이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이들의 위반적 제스쳐 역시 혼돈스러웠던 시대적 분위기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긴 하지만 안온한 카페문화 살롱문화의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닐까.

아마도 작가는 여기서 눈을 돌려 저 하늘을 나는 철새를 보라, 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떼 연어떼를 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기능적 효율성과 환금 가능성을 넘어 삶의 기반을 지시해주는 새로운 신화체계가 필요하다고, 그것만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사랑이 가능한 공동체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리 속에서의 추방이 곧 죽음을 의미했던 원시시대로부터 현대인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불의 연대인 1980년대와 새로운 21세기의 개막 사이에 끼인 1990년대가 그렇듯이, 윤대녕의 이 작품은 기존 집단에서 분리돼 나왔지만, 아직 새로운 준거집단을 찾지 못한 존재의 과도기적 모험을 그린 소설로 음미될 필요가 있다.

남진우 문학평론가·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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