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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살아 있는 개인으로서 한국인을 그리다­­ - 김승옥 ‘무진기행’
입력 2021.07.11 (21:33) 수정 2021.07.11 (21:33) 취재K
정과리 문학평론가정과리 문학평론가

살아 있는 개인으로서 한국인을 그리다
- 김승옥과 「무진기행」

생의 감각
김승옥은 1961년 대학생 신분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순간부터 독자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에는 생생한 감각이 맑은 못의 잉어들처럼 팔딱거리고 있었다. 이런 묘사를 보라. “형이 나와 누나에게 그 말을 처음 끄집어냈을 때도 내 발가락 사이로 초가을 햇살이 히히덕 거리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굵은 모래가 펼쳐진 해변에서였다.”(「생명연습」)

가을은 저물어 가는 계절이다. 그러나 초가을이다. 초가을엔 여름의 왕성한 생명력이 아직 남아서 꿈틀거린다. 그것이 햇살에 투영되었다. 햇살이 아지랑이를 일으키며 고물거리는 모습은 낙조와 안식의 어스름이 깔리는 배경으로부터 탈출하여 삶의 열락을 즐기고자 하는 미세 감각들의 운동을 눈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 느낌은 “굵은 모래”의 바탕 위에서 더 진해진다. 색조의 대비로 느낌이 선명해지고, 굵기의 대비로 생 속에 도사린 소멸의 기운마저 느끼게 해준다.

평론가 유종호가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찬사를 보냈던 이 감각적 묘사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두 방향에서 이 질문에 접근할 수가 있다. 첫째, 그가 4.19세대라는 것. 4.19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민주 혁명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18세기 말 이래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슬며시 틈입해 들어온 ‘세상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현실에 적용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갑신정변, 동학혁명, 갑오경장, 3.1운동, 8.15해방, 6.25전쟁 등 그 이전의 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4.19를 통해 한국인들은 자신의 주체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부터 세상과 물상들은 모두 내 손아귀에서 놀 것들이 되었다. 둘째, 한글 세대라는 것. 해방과 더불어 비로소 ‘국어’의 지위를 획득한 한글은 김승옥 세대에게는 유년 시절부터 몸에 배인 자연어로서 기능했다. 즉 한글은 생활어이자 사유어이고 동시에 표현어였다. 한글을 통해 김승옥 세대는 삶과 생각과 느낌을, 혹은 육체와 정신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었으니, 한글을 가장 아름답게 쓴다는 것은 그 일치를 최등급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


자기세계
김승옥은 바로 그 최대치에 근접한 소설을 펼쳐 보였다. 그가 생래적인 언어를 그냥 즐기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농밀한 언어를 통해서 무언가를 빚어내려 했다. 그 무언가를 그는 ‘자기세계’라고 명명하였다. ‘자기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만이 만들어낼 세상’의 다른 말이었다. 왜 그것이 중요했던가? 그 이전까지 한국인들은 지독한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외세의 압박, 일제, 식민, 주어진 해방, 분단, 전쟁 어느 하나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어난 일인데, 그러나 때마다 이보다 지독할 게 없는 고통과 고난을 강요하기만 했던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1950년대의 작가들의 빈번한 화두는 ‘실존’(시시각각의 생존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잉여인간”, “비인(非人)탄생”(장용학), “신의 희작(戲作)”(손창섭), “수난 이대”(하근찬)라는 자조적이고 탄식조의 모멸어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멸의 늪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무언가 나만의 세계를 일궈내야 한다. 그 자기세계는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할 보증서이자, 내가 창조할 미래 세계의 모형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민주공화국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자유를 구가하며, 성공의 기회를 균등히 배분받으면서, 자신의 개성을 활짝 피어낼 권리이자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모든 소설은 그러한 개성의 가장 첨예한 표현들로 반짝거린다. 가령, ‘공감각적 비유’의 예로 수능시험에 자주 등장했던,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껍데기를 한꺼번에 맞부빌 때 나는 듯한 소리”는 김승옥만이 쓸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묘사라는 걸 먼저 눈여겨볼 때 우리의 감수성 역시 자발적으로 열릴 것이다.


「무진기행」의 문학적 가치
「무진기행」은 이러한 김승옥의 탐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잉태된 작품이다. 간단히 말해, 이 작품은 ‘자기세계’에 대한 욕망을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차원으로 선회시킨다. 반성이 왜 필요한가? 자기세계에 대한 욕망은 오로지 자기만을 향하면서 이중의 왜곡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개인들의 허약성으로 인해 강력한 집단적 통제 앞에서 좌절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4.19가 성공한 지 1년 후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근대화의 방향을 총체적 민주화에서 경제성장으로 재정향했던 것이 직접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자유의 무한한 개방은 최종적으로 독점과 예속으로 귀결할 수 있다는 시민 사회 자체의 자가당착이라는 결과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자기세계는 타자의 세계들과 연대해야 하며, 동시에 상호 이해를 꾀해야 한다.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자기 세계는 음침한 자기만의 동굴에 갇히게 되고, 그 안에서 벌레처럼 제 살을 물어뜯으며 살아가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무진기행」의 인물들은 바로 이 이중적 왜곡을 포괄적으로 은유하면서, 그 너머의 태도들을 독자에게 궁리케 한다.

부인 덕분에 기업의 고급 간부가 된 ‘나’는 회사 내의 승진을 앞두고 고향에 잠시 쉬러 온다. 안개가 잔뜩 끼곤 해서 ‘무진(霧津)’이란 이름을 가진 그의 고향은 우리가 막연히 동경할 때의 그런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거기는 서울의 복본이자, 서울이 못 되어서 잔뜩 짓눌린, 일그러진 욕망들의 세계이다. 거기에서도 모두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자신만의 음침한 지하실을 파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소득 없는 더듬이를 놀리고 있다. 그 모습은 출세하기 전 낙향했던 ‘나’의 모습이며, 현재 무진에 갇힌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거기에서 ‘나’는 나의 전신과도 같은 ‘하인숙’을 만났고, 서로 유혹하고, 그리고 ‘나’는 하인숙을 코 풀듯이 버리고 떠난다. 이제 즐겼으니, 서울에 올라가 승진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복기하면서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김승옥의 글쓰기는 이 과정의 이행과 복기를 부채처럼 펼쳤다 접었다 하는 동작을 되풀이함으로써 독자에게 참여와 성찰 사이를 부단히 왕복케 한다.


김승옥의 작품들은, 1960년대 한국인이 직면한 자기 갱신이라는 운명과의 결투를 끈질기게 묘파하였다. 그 운명을 주체성의 확립과 상호 연대에 관한 구상이라고 한다면, 김승옥은 살아 숨쉬는 인간을 빚어내는 걸로 그 결투에 매진하였다. 살아 있는 인간을 증명하는 최고의 지름길은 맥박이 팔딱이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김승옥의 감각적 문체는 바로 독자의 손바닥 혹은 손가락을 인물들의 가슴 또는 손목에 끌어다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가 1960년대 작가군에서 첨단을 달려나간 것은 그 때문이다.

정과리(정명교)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비평] 살아 있는 개인으로서 한국인을 그리다­­ - 김승옥 ‘무진기행’
    • 입력 2021-07-11 21:33:08
    • 수정2021-07-11 21:33:25
    취재K
정과리 문학평론가정과리 문학평론가

살아 있는 개인으로서 한국인을 그리다
- 김승옥과 「무진기행」

생의 감각
김승옥은 1961년 대학생 신분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순간부터 독자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에는 생생한 감각이 맑은 못의 잉어들처럼 팔딱거리고 있었다. 이런 묘사를 보라. “형이 나와 누나에게 그 말을 처음 끄집어냈을 때도 내 발가락 사이로 초가을 햇살이 히히덕 거리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굵은 모래가 펼쳐진 해변에서였다.”(「생명연습」)

가을은 저물어 가는 계절이다. 그러나 초가을이다. 초가을엔 여름의 왕성한 생명력이 아직 남아서 꿈틀거린다. 그것이 햇살에 투영되었다. 햇살이 아지랑이를 일으키며 고물거리는 모습은 낙조와 안식의 어스름이 깔리는 배경으로부터 탈출하여 삶의 열락을 즐기고자 하는 미세 감각들의 운동을 눈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 느낌은 “굵은 모래”의 바탕 위에서 더 진해진다. 색조의 대비로 느낌이 선명해지고, 굵기의 대비로 생 속에 도사린 소멸의 기운마저 느끼게 해준다.

평론가 유종호가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찬사를 보냈던 이 감각적 묘사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두 방향에서 이 질문에 접근할 수가 있다. 첫째, 그가 4.19세대라는 것. 4.19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민주 혁명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18세기 말 이래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슬며시 틈입해 들어온 ‘세상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현실에 적용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갑신정변, 동학혁명, 갑오경장, 3.1운동, 8.15해방, 6.25전쟁 등 그 이전의 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4.19를 통해 한국인들은 자신의 주체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부터 세상과 물상들은 모두 내 손아귀에서 놀 것들이 되었다. 둘째, 한글 세대라는 것. 해방과 더불어 비로소 ‘국어’의 지위를 획득한 한글은 김승옥 세대에게는 유년 시절부터 몸에 배인 자연어로서 기능했다. 즉 한글은 생활어이자 사유어이고 동시에 표현어였다. 한글을 통해 김승옥 세대는 삶과 생각과 느낌을, 혹은 육체와 정신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었으니, 한글을 가장 아름답게 쓴다는 것은 그 일치를 최등급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


자기세계
김승옥은 바로 그 최대치에 근접한 소설을 펼쳐 보였다. 그가 생래적인 언어를 그냥 즐기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농밀한 언어를 통해서 무언가를 빚어내려 했다. 그 무언가를 그는 ‘자기세계’라고 명명하였다. ‘자기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만이 만들어낼 세상’의 다른 말이었다. 왜 그것이 중요했던가? 그 이전까지 한국인들은 지독한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외세의 압박, 일제, 식민, 주어진 해방, 분단, 전쟁 어느 하나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어난 일인데, 그러나 때마다 이보다 지독할 게 없는 고통과 고난을 강요하기만 했던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1950년대의 작가들의 빈번한 화두는 ‘실존’(시시각각의 생존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잉여인간”, “비인(非人)탄생”(장용학), “신의 희작(戲作)”(손창섭), “수난 이대”(하근찬)라는 자조적이고 탄식조의 모멸어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멸의 늪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무언가 나만의 세계를 일궈내야 한다. 그 자기세계는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할 보증서이자, 내가 창조할 미래 세계의 모형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민주공화국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자유를 구가하며, 성공의 기회를 균등히 배분받으면서, 자신의 개성을 활짝 피어낼 권리이자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모든 소설은 그러한 개성의 가장 첨예한 표현들로 반짝거린다. 가령, ‘공감각적 비유’의 예로 수능시험에 자주 등장했던,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껍데기를 한꺼번에 맞부빌 때 나는 듯한 소리”는 김승옥만이 쓸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묘사라는 걸 먼저 눈여겨볼 때 우리의 감수성 역시 자발적으로 열릴 것이다.


「무진기행」의 문학적 가치
「무진기행」은 이러한 김승옥의 탐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잉태된 작품이다. 간단히 말해, 이 작품은 ‘자기세계’에 대한 욕망을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차원으로 선회시킨다. 반성이 왜 필요한가? 자기세계에 대한 욕망은 오로지 자기만을 향하면서 이중의 왜곡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개인들의 허약성으로 인해 강력한 집단적 통제 앞에서 좌절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4.19가 성공한 지 1년 후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근대화의 방향을 총체적 민주화에서 경제성장으로 재정향했던 것이 직접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자유의 무한한 개방은 최종적으로 독점과 예속으로 귀결할 수 있다는 시민 사회 자체의 자가당착이라는 결과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자기세계는 타자의 세계들과 연대해야 하며, 동시에 상호 이해를 꾀해야 한다.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자기 세계는 음침한 자기만의 동굴에 갇히게 되고, 그 안에서 벌레처럼 제 살을 물어뜯으며 살아가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무진기행」의 인물들은 바로 이 이중적 왜곡을 포괄적으로 은유하면서, 그 너머의 태도들을 독자에게 궁리케 한다.

부인 덕분에 기업의 고급 간부가 된 ‘나’는 회사 내의 승진을 앞두고 고향에 잠시 쉬러 온다. 안개가 잔뜩 끼곤 해서 ‘무진(霧津)’이란 이름을 가진 그의 고향은 우리가 막연히 동경할 때의 그런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거기는 서울의 복본이자, 서울이 못 되어서 잔뜩 짓눌린, 일그러진 욕망들의 세계이다. 거기에서도 모두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자신만의 음침한 지하실을 파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소득 없는 더듬이를 놀리고 있다. 그 모습은 출세하기 전 낙향했던 ‘나’의 모습이며, 현재 무진에 갇힌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거기에서 ‘나’는 나의 전신과도 같은 ‘하인숙’을 만났고, 서로 유혹하고, 그리고 ‘나’는 하인숙을 코 풀듯이 버리고 떠난다. 이제 즐겼으니, 서울에 올라가 승진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복기하면서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김승옥의 글쓰기는 이 과정의 이행과 복기를 부채처럼 펼쳤다 접었다 하는 동작을 되풀이함으로써 독자에게 참여와 성찰 사이를 부단히 왕복케 한다.


김승옥의 작품들은, 1960년대 한국인이 직면한 자기 갱신이라는 운명과의 결투를 끈질기게 묘파하였다. 그 운명을 주체성의 확립과 상호 연대에 관한 구상이라고 한다면, 김승옥은 살아 숨쉬는 인간을 빚어내는 걸로 그 결투에 매진하였다. 살아 있는 인간을 증명하는 최고의 지름길은 맥박이 팔딱이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김승옥의 감각적 문체는 바로 독자의 손바닥 혹은 손가락을 인물들의 가슴 또는 손목에 끌어다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가 1960년대 작가군에서 첨단을 달려나간 것은 그 때문이다.

정과리(정명교)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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