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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현대소설의 핵심을 꿰뚫은 의식의 현상학…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입력 2022.01.16 (21:30) 수정 2022.01.16 (21:32) 취재K

이인성의 중편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1980)는 잇달아 발표된 세 중편소설과 함께 한 권의 연작소설집으로 출판되었다. 그 소설집의 제목도 <낯선 시간 속으로>(1983)다. 이 연작소설은 한 청년이 군 복무를 마치고 귀가하는 데서 시작해서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가 마침내 삶의 의지를 되찾기까지의 1년간의 시간을 그렸다. 이야기만을 생각해보면 주인공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혼돈에서 조화로 등을 내용으로 하는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서술 방식이다. 연작의 첫 작품 「길, 한 이십 년」에는 <1974년 봄, 또는 1973년 겨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작품의 서술은 시간적으로 이중적이다. 1974년 봄 어느 날 두 시간 동안의 <그>와 1973년 겨울 어느 날 두 시간 동안의 <그>가 동일한 과거 시제로 조금씩 서로 교차되면서 서술된다. 74년 봄의 <그>는 서울 안을 방황하는 학생이고 73년 겨울의 <그>는 춘천에서 서울로 이동 중인 제대 군인이다. 이 두 시간대의 교차 서술은 무려 52페이지에 걸쳐 문단 구분 없이 한 문단으로 진행된다. 그런 뒤 문단이 바뀌면서 다음과 같은 독백이 나온다.

“......나는, 그의 두 시간을 따르던, 내 의식을, 정지시킨다. 나의 밖. 늦은 봄 또는 이른 여름의 밤비가 내리고 있다.”

그러니까 52페이지에 걸친 <그>의 두 시간대에 대한 서술은 현재의 <나>의 의식을 기술(記述)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니다. 우선 <나>와 작가는 같지 않고, <나>와 <그>는, <그>가 과거의 <나>라는 의미에서 같다. 같든 같지 않든 중요한 것은 기술되는 <나>의 의식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재현이 아니라 구성이고 상상이다.

이러한 서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일반적인 회고체로 서술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것은 재현이 된다. 과거의 사실을 재현하는 회고체 서술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작가가 아무리 개입하지 않으려 해도 서술의 모든 요소에 개입을 할 수밖에 없다. 그 개입에는 설명이 수반된다. 재현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어떻게 하면 개입을 하지 않고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 이인성의 선택은 구성하는 의식을 단지 제시하는 것이다.


연작의 두 번째 작품 「그 세월의 무덤」은 삼인칭 주관적 시점으로 서술한다. <그>가 1974년 여름 어느 날 자다가 깨어나 아버지 무덤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 거울 속에서 <나>가 등장한다. 자아의 분열이다. <그>와 <나>의 대화가 진행되고, 둘은 무덤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그>는 자신이 쓴 극본으로 공연 준비를 하는 연극 동아리에 들렀다가 <그녀-너>(<그>의 옛 사랑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친구>의 새 사랑이 된)와 대화하고, 그런 뒤 무덤으로 간다. <그>가 아버지의 무덤 아래 파여진 흙구덩이로 들어가고 <나>는 <그>를 흙으로 덮어 버린다. 이 작품은 내적 독백으로 가득하지만, 서술 자체는 첫 작품 「길, 한 이십 년」보다 한결 온건하다. 세 번째 작품 「지금 그가 내 앞에서」는 일인칭 서술이다. 1974년 가을 현재 연극이 공연 중이고 <나>는 극본을 쓴 작가로서 연극을 관람 중이다. 극중 인물 <그>는 과거의 <나>이다. 연극은 부친 살해를 주제로 하는 부조리극이다. <그녀-너>가 <그>의 상대역으로 출연한다. 이 극본을 써서 <나>에게 넘겨준 것은 <그-과거의 나>이지만 이 공연을 결정한 것은 <나>이고, <그-과거의 나>는 지금 연극 공연 속에 존재하지만, 연극이 끝나면 사라질 허구의 존재이다. 자아의 분열이 앞의 작품보다 훨씬 더 심해진 모습이고 그런 만큼 내적 독백이 흘러넘친다.

연작의 마지막 작품 「낯선 시간 속으로」에서 작중 화자 <나>는 1974년 겨울 현재 미구시(迷口市)라는 동해안 도시에 와 있다(가상의 지명에 의도적으로 미혹할 ‘미’자를 사용한 것임). 며칠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구시에 머물던 <나>가 미구시를 떠나는(아마도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작품이 끝난다. 미구시에 머무는 시간 동안 <나>의 자아의 분열은 극에 달하고 내적 독백은 거의 폭발 상태에 도달한다. 혼자 미구시에 온 <나>, 함께 미구시에 온 <나>와 <너>(<너>는 <그녀-너>와는 별개의 인물로서 <나>의 새 사랑이다. 암시되는 것처럼 <다른 친구>의 이전 연인이었다가 헤어진 여자가 <너>라면, <나>와 <너>는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새로 시작하는 게 된다), 바닷가에서 경계 근무 중인 병정, 의가사 제대를 한 군인 등이 동시에 출현한다. 착란이 극심해지고 사실과 기억과 환각이 마구 뒤엉켜서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 혼돈의 상태에 빠진다. 이 작품의 서술은 그 혼돈의 상태를 <나>의 의식에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제시한다. 제대 군인이 작별을 고하는 장면 직후에 <내 입에서 문장이 씌어져> 나온다. 그 문장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작품에도 나왔던 <그녀-너>가 원래 <나>의 사랑의 대상이었는데 <나>의 군 복무 시기에 <나>의 다른 친구와 연인 관계가 되었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두 사람이 군 복무 중인 나를 면회 왔으며 충격을 받은 <나>는 자살을 기도했고 그 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것은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인지, 수용, 이해하는 일에 해당된다. 그리고서 <나>는 마침내 혼돈을 벗어날 실마리를 잡는다. 그것은 <상처>다. “상처를 통해, 마침내 우리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제목의 <낯선 시간 속으로>는 미구시에서 겪은 혼돈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살게 될 다른 삶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버지로부터의 독립, 사랑을 상실한 고통의 극복, 죽음의 유혹에서 삶의 의지로의 복귀 등은 성장소설의 대표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주제들을 어떻게 서술했느냐 하는 데 있다. 이 연작소설의 서술 전략은 의식을 기술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구성하는 의식을 직접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술에서 재현과 설명이 얼마나 허위에 감염되어 있는지에 대한 강한 비판이기도 하다. 의식의 현상학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이 실험적 서술은 한국 소설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기였고, 그 획기로서의 의미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프루스트와 조이스, 그리고 베케트가 현대소설의 지평을 열어놓았다고 말할 때 그 지평의 핵심을 꿰뚫은 한국 소설은 바로 <낯선 시간 속으로>이다.

성민엽 문학평론가·서울대 중문과 교수
  • [비평] 현대소설의 핵심을 꿰뚫은 의식의 현상학…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 입력 2022-01-16 21:30:50
    • 수정2022-01-16 21:32:04
    취재K

이인성의 중편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1980)는 잇달아 발표된 세 중편소설과 함께 한 권의 연작소설집으로 출판되었다. 그 소설집의 제목도 <낯선 시간 속으로>(1983)다. 이 연작소설은 한 청년이 군 복무를 마치고 귀가하는 데서 시작해서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가 마침내 삶의 의지를 되찾기까지의 1년간의 시간을 그렸다. 이야기만을 생각해보면 주인공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혼돈에서 조화로 등을 내용으로 하는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서술 방식이다. 연작의 첫 작품 「길, 한 이십 년」에는 <1974년 봄, 또는 1973년 겨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작품의 서술은 시간적으로 이중적이다. 1974년 봄 어느 날 두 시간 동안의 <그>와 1973년 겨울 어느 날 두 시간 동안의 <그>가 동일한 과거 시제로 조금씩 서로 교차되면서 서술된다. 74년 봄의 <그>는 서울 안을 방황하는 학생이고 73년 겨울의 <그>는 춘천에서 서울로 이동 중인 제대 군인이다. 이 두 시간대의 교차 서술은 무려 52페이지에 걸쳐 문단 구분 없이 한 문단으로 진행된다. 그런 뒤 문단이 바뀌면서 다음과 같은 독백이 나온다.

“......나는, 그의 두 시간을 따르던, 내 의식을, 정지시킨다. 나의 밖. 늦은 봄 또는 이른 여름의 밤비가 내리고 있다.”

그러니까 52페이지에 걸친 <그>의 두 시간대에 대한 서술은 현재의 <나>의 의식을 기술(記述)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니다. 우선 <나>와 작가는 같지 않고, <나>와 <그>는, <그>가 과거의 <나>라는 의미에서 같다. 같든 같지 않든 중요한 것은 기술되는 <나>의 의식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재현이 아니라 구성이고 상상이다.

이러한 서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일반적인 회고체로 서술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것은 재현이 된다. 과거의 사실을 재현하는 회고체 서술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작가가 아무리 개입하지 않으려 해도 서술의 모든 요소에 개입을 할 수밖에 없다. 그 개입에는 설명이 수반된다. 재현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어떻게 하면 개입을 하지 않고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 이인성의 선택은 구성하는 의식을 단지 제시하는 것이다.


연작의 두 번째 작품 「그 세월의 무덤」은 삼인칭 주관적 시점으로 서술한다. <그>가 1974년 여름 어느 날 자다가 깨어나 아버지 무덤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 거울 속에서 <나>가 등장한다. 자아의 분열이다. <그>와 <나>의 대화가 진행되고, 둘은 무덤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그>는 자신이 쓴 극본으로 공연 준비를 하는 연극 동아리에 들렀다가 <그녀-너>(<그>의 옛 사랑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친구>의 새 사랑이 된)와 대화하고, 그런 뒤 무덤으로 간다. <그>가 아버지의 무덤 아래 파여진 흙구덩이로 들어가고 <나>는 <그>를 흙으로 덮어 버린다. 이 작품은 내적 독백으로 가득하지만, 서술 자체는 첫 작품 「길, 한 이십 년」보다 한결 온건하다. 세 번째 작품 「지금 그가 내 앞에서」는 일인칭 서술이다. 1974년 가을 현재 연극이 공연 중이고 <나>는 극본을 쓴 작가로서 연극을 관람 중이다. 극중 인물 <그>는 과거의 <나>이다. 연극은 부친 살해를 주제로 하는 부조리극이다. <그녀-너>가 <그>의 상대역으로 출연한다. 이 극본을 써서 <나>에게 넘겨준 것은 <그-과거의 나>이지만 이 공연을 결정한 것은 <나>이고, <그-과거의 나>는 지금 연극 공연 속에 존재하지만, 연극이 끝나면 사라질 허구의 존재이다. 자아의 분열이 앞의 작품보다 훨씬 더 심해진 모습이고 그런 만큼 내적 독백이 흘러넘친다.

연작의 마지막 작품 「낯선 시간 속으로」에서 작중 화자 <나>는 1974년 겨울 현재 미구시(迷口市)라는 동해안 도시에 와 있다(가상의 지명에 의도적으로 미혹할 ‘미’자를 사용한 것임). 며칠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구시에 머물던 <나>가 미구시를 떠나는(아마도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작품이 끝난다. 미구시에 머무는 시간 동안 <나>의 자아의 분열은 극에 달하고 내적 독백은 거의 폭발 상태에 도달한다. 혼자 미구시에 온 <나>, 함께 미구시에 온 <나>와 <너>(<너>는 <그녀-너>와는 별개의 인물로서 <나>의 새 사랑이다. 암시되는 것처럼 <다른 친구>의 이전 연인이었다가 헤어진 여자가 <너>라면, <나>와 <너>는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새로 시작하는 게 된다), 바닷가에서 경계 근무 중인 병정, 의가사 제대를 한 군인 등이 동시에 출현한다. 착란이 극심해지고 사실과 기억과 환각이 마구 뒤엉켜서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 혼돈의 상태에 빠진다. 이 작품의 서술은 그 혼돈의 상태를 <나>의 의식에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제시한다. 제대 군인이 작별을 고하는 장면 직후에 <내 입에서 문장이 씌어져> 나온다. 그 문장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작품에도 나왔던 <그녀-너>가 원래 <나>의 사랑의 대상이었는데 <나>의 군 복무 시기에 <나>의 다른 친구와 연인 관계가 되었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두 사람이 군 복무 중인 나를 면회 왔으며 충격을 받은 <나>는 자살을 기도했고 그 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것은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인지, 수용, 이해하는 일에 해당된다. 그리고서 <나>는 마침내 혼돈을 벗어날 실마리를 잡는다. 그것은 <상처>다. “상처를 통해, 마침내 우리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제목의 <낯선 시간 속으로>는 미구시에서 겪은 혼돈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살게 될 다른 삶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버지로부터의 독립, 사랑을 상실한 고통의 극복, 죽음의 유혹에서 삶의 의지로의 복귀 등은 성장소설의 대표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주제들을 어떻게 서술했느냐 하는 데 있다. 이 연작소설의 서술 전략은 의식을 기술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구성하는 의식을 직접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술에서 재현과 설명이 얼마나 허위에 감염되어 있는지에 대한 강한 비판이기도 하다. 의식의 현상학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이 실험적 서술은 한국 소설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기였고, 그 획기로서의 의미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프루스트와 조이스, 그리고 베케트가 현대소설의 지평을 열어놓았다고 말할 때 그 지평의 핵심을 꿰뚫은 한국 소설은 바로 <낯선 시간 속으로>이다.

성민엽 문학평론가·서울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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