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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진정한 공감에 이르는 길 - 윤후명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
입력 2021.09.26 (21:36) 수정 2021.09.26 (21:37) 취재K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내지만 우리는 별이 고즈넉이 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열심히 말을 하지만 너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때로는 오해하고 때로는 전혀 다르게 기억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듯이 우리는 모르면서 사랑하고 모르면서 미워하고 세상을 모르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엉거추춤한 서술,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비판 대신에 사적인 이야기들이 더듬더듬 길을 찾는 윤후명의 작품 세계는 독특하다.

오래전에 나는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는 단편을 읽었을 때 가슴이 먹먹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고독을 이렇게 표할 수 있다니. 서로 어긋나는 인물들을 그린 단편의 내용과 제목이 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 단절과 고립감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서술자의 유머도 돋보였다. 소설이라기보다 한 편의 시요, 사색이 스며든 산문이었다. 그런데 몇 년 후 같은 제목의 중편을 읽었고 세월이 흘러 다시 장편을 읽었다. 세 번째 것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나?

예전에는 명료한 서술이나 거대서사를 거부하던 갈림 언어 혹은 <미니멀리즘>으로 그의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최근의 심리학이나 뇌과학으로 읽힌다. 아니 현상학으로도 읽힌다. 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이다. 의식은 완벽한 섬이고 각기 다르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절대 법이다. 기본적인 심리적 사실은 '이 생각'도 '저 생각'도 아니고 '나의 생각'이요, 모든 생각은 개인에게 속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떤 같은 시간대도 가까운 거리도 내용과 질에서 비슷하다 해도 동일한 생각들로 용해될 수 없다. 그것들은 제각기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장벽에 의해 갈라진다. 그러므로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들 간의 불화는 본질적으로 가장 절대적인 불화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지만 윤후명의 말처럼 들린다. 의식의 진화로 개체화된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자의식은 나를 사회 속의 독립된 개체로 인지하지만 나는 여전히 떠나온 고향, 만물과 하나라는 추억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외롭다. 너를 이해하기 위해 소통을 꿈꾸지만 이게 쉽지 않다. 나는 유전적 공통점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내 경험과 기억과 지식에 의해 너를 판단하기 때문에 언어는 투명하지 않다. 윤후명은 언어가 모호하고 다의적인 것을 유머로 재현한다. “너는 미국이 철수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분단의 현실에서 묻는 정치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이북에서 내려와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꾸려가던 주변머리 없는 큰아버지가 화자에게 묻는 걱정스러운 말이다. 같은 언어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때 어떻게 플롯이 견고한 거대서사를 쓸 수 있는가. 그가 시인이 된 사유도 비슷하다.


화자는 이념에 대해 잘 모른다. 어릴 적에 우연히 4.19 데모 대열에 섞여 함께 고함을 지르다가 갑자기 낙오되었을 때 그는 지독한 고립감을 느꼈다. 그때 길을 잃은 당황함과 고독한 인간의 실존은 그를 존재론적 물음으로 이끌었다. 나는 누구인가. 우주는 나와 무슨 관계인가. 그는 그때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줄곧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힌다. 변호사였으나 잘 모르는 이유로 자격을 정지당하고 봉천동 변두리에 동물농장을 차려 초라한 삶을 끌어가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법을 공부하라고 끈질기게 권유하지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 자신이 초라한 삶으로 가족을 고생시키기 때문이다. 우연히 마주친 밤길의 여자를 못 잊는 아들에게 그는 모든 여자는 여우요 독사라고 가르친다. 그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말로 들린다.

화자와 아버지의 불화는 원초적인 적대감에 가깝다. 소통을 거부한 철저한 고립이다. 서로 나의 길을 가련다는 주장으로 한치의 양보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원초적 고립은 아버지와의 불화가 아닐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가난한 살림을 책임진 폐마, 그리고 마구간 옆 창으로 시인을 내려다보는 늙은 말, 이런 환경에서 화자의 사색도 현실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단편에서 보여주던 치명적인 고독은 장편에 이르러 조금 풀린다. 의식의 진화는 고독한 인간을 낳았지만 공감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었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너의 시선 아래 나를 의식하며 살아가기에 공감은 고독과 뗄 수 없는 짝이다. 언어가 제대로 의미를 전하지 못할 때 의식이 명료하게 현실을 인지하고 판단하지 못할 때 어떻게 공감이 가능한가. 장편에서 화자는 세상을 향한 긴 여행을 떠난다. 익숙한 이름들이 묻힌 묘지를 순례하면서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버지도 나와 똑같이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현실에 절망하고 고독한 존재로서 그는 나와 전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늦었으나 시인은 이제 아버지를 이해한다. 비로소 공감이라는 소통의 문이 열린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별이었다. 별들은 영원히 만날 수 없어서 어둠 속에서 눈빛을 반짝이며 알 수 없는 소리는 낸다. 단편의 화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 장편에서 시인은 별의 소리를 듣지는 못해도 별의 냄새를 맡는다. 비록 우리가 언어로는 타인과 우주를 알지 못해도 우리는 그들을 느낀다. 시인은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파리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고국으로 가는 길을 도와주는 시인은 이제 따스한 연민을 품게 된다. 진정한 공감이란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너의 감정을 느끼는 것, 그리고 나의 판단과 자유만큼 너의 판단과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공감은 고독한 인간에게 신이 내린 선물이다. 윤후명은 고독과 공감을 예술 언어로 승화한 작가다. 그러기에 작가는 화자를 구속하지 않는다. 인물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놓아준다. 관용과 유머로 화자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바라본다. 그러기에 서술이 흩어지고 견고한 플롯이 없다. 이런 기법은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모호함으로 독자를 자유롭게 놓아주고 여러 갈래의 해석을 내리게 한다. 나는 옛날에 그를 <미니멀리즘>으로 읽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상학이나 심리학으로 그를 읽는다.

윤후명 소설에서 자유란 무엇일까. 나의 길을 고집하면서 경험과 의식을 확장하여 타인을 포함한 우주 만물에 따스한 연민을 품는 것, 이것이 같은 제목의 작품이 점차 확장되어 세 편에 이르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권택영/문학평론가
  • [비평] 진정한 공감에 이르는 길 - 윤후명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
    • 입력 2021-09-26 21:36:37
    • 수정2021-09-26 21:37:07
    취재K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내지만 우리는 별이 고즈넉이 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열심히 말을 하지만 너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때로는 오해하고 때로는 전혀 다르게 기억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듯이 우리는 모르면서 사랑하고 모르면서 미워하고 세상을 모르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엉거추춤한 서술,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비판 대신에 사적인 이야기들이 더듬더듬 길을 찾는 윤후명의 작품 세계는 독특하다.

오래전에 나는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는 단편을 읽었을 때 가슴이 먹먹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고독을 이렇게 표할 수 있다니. 서로 어긋나는 인물들을 그린 단편의 내용과 제목이 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 단절과 고립감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서술자의 유머도 돋보였다. 소설이라기보다 한 편의 시요, 사색이 스며든 산문이었다. 그런데 몇 년 후 같은 제목의 중편을 읽었고 세월이 흘러 다시 장편을 읽었다. 세 번째 것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나?

예전에는 명료한 서술이나 거대서사를 거부하던 갈림 언어 혹은 <미니멀리즘>으로 그의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최근의 심리학이나 뇌과학으로 읽힌다. 아니 현상학으로도 읽힌다. 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이다. 의식은 완벽한 섬이고 각기 다르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절대 법이다. 기본적인 심리적 사실은 '이 생각'도 '저 생각'도 아니고 '나의 생각'이요, 모든 생각은 개인에게 속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떤 같은 시간대도 가까운 거리도 내용과 질에서 비슷하다 해도 동일한 생각들로 용해될 수 없다. 그것들은 제각기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장벽에 의해 갈라진다. 그러므로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들 간의 불화는 본질적으로 가장 절대적인 불화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지만 윤후명의 말처럼 들린다. 의식의 진화로 개체화된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자의식은 나를 사회 속의 독립된 개체로 인지하지만 나는 여전히 떠나온 고향, 만물과 하나라는 추억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외롭다. 너를 이해하기 위해 소통을 꿈꾸지만 이게 쉽지 않다. 나는 유전적 공통점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내 경험과 기억과 지식에 의해 너를 판단하기 때문에 언어는 투명하지 않다. 윤후명은 언어가 모호하고 다의적인 것을 유머로 재현한다. “너는 미국이 철수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분단의 현실에서 묻는 정치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이북에서 내려와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꾸려가던 주변머리 없는 큰아버지가 화자에게 묻는 걱정스러운 말이다. 같은 언어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때 어떻게 플롯이 견고한 거대서사를 쓸 수 있는가. 그가 시인이 된 사유도 비슷하다.


화자는 이념에 대해 잘 모른다. 어릴 적에 우연히 4.19 데모 대열에 섞여 함께 고함을 지르다가 갑자기 낙오되었을 때 그는 지독한 고립감을 느꼈다. 그때 길을 잃은 당황함과 고독한 인간의 실존은 그를 존재론적 물음으로 이끌었다. 나는 누구인가. 우주는 나와 무슨 관계인가. 그는 그때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줄곧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힌다. 변호사였으나 잘 모르는 이유로 자격을 정지당하고 봉천동 변두리에 동물농장을 차려 초라한 삶을 끌어가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법을 공부하라고 끈질기게 권유하지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 자신이 초라한 삶으로 가족을 고생시키기 때문이다. 우연히 마주친 밤길의 여자를 못 잊는 아들에게 그는 모든 여자는 여우요 독사라고 가르친다. 그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말로 들린다.

화자와 아버지의 불화는 원초적인 적대감에 가깝다. 소통을 거부한 철저한 고립이다. 서로 나의 길을 가련다는 주장으로 한치의 양보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원초적 고립은 아버지와의 불화가 아닐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가난한 살림을 책임진 폐마, 그리고 마구간 옆 창으로 시인을 내려다보는 늙은 말, 이런 환경에서 화자의 사색도 현실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단편에서 보여주던 치명적인 고독은 장편에 이르러 조금 풀린다. 의식의 진화는 고독한 인간을 낳았지만 공감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었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너의 시선 아래 나를 의식하며 살아가기에 공감은 고독과 뗄 수 없는 짝이다. 언어가 제대로 의미를 전하지 못할 때 의식이 명료하게 현실을 인지하고 판단하지 못할 때 어떻게 공감이 가능한가. 장편에서 화자는 세상을 향한 긴 여행을 떠난다. 익숙한 이름들이 묻힌 묘지를 순례하면서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버지도 나와 똑같이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현실에 절망하고 고독한 존재로서 그는 나와 전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늦었으나 시인은 이제 아버지를 이해한다. 비로소 공감이라는 소통의 문이 열린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별이었다. 별들은 영원히 만날 수 없어서 어둠 속에서 눈빛을 반짝이며 알 수 없는 소리는 낸다. 단편의 화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 장편에서 시인은 별의 소리를 듣지는 못해도 별의 냄새를 맡는다. 비록 우리가 언어로는 타인과 우주를 알지 못해도 우리는 그들을 느낀다. 시인은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파리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고국으로 가는 길을 도와주는 시인은 이제 따스한 연민을 품게 된다. 진정한 공감이란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너의 감정을 느끼는 것, 그리고 나의 판단과 자유만큼 너의 판단과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공감은 고독한 인간에게 신이 내린 선물이다. 윤후명은 고독과 공감을 예술 언어로 승화한 작가다. 그러기에 작가는 화자를 구속하지 않는다. 인물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놓아준다. 관용과 유머로 화자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바라본다. 그러기에 서술이 흩어지고 견고한 플롯이 없다. 이런 기법은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모호함으로 독자를 자유롭게 놓아주고 여러 갈래의 해석을 내리게 한다. 나는 옛날에 그를 <미니멀리즘>으로 읽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상학이나 심리학으로 그를 읽는다.

윤후명 소설에서 자유란 무엇일까. 나의 길을 고집하면서 경험과 의식을 확장하여 타인을 포함한 우주 만물에 따스한 연민을 품는 것, 이것이 같은 제목의 작품이 점차 확장되어 세 편에 이르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권택영/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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